연성/단편

카이저켄 - 악몽

Doctor Box 2015. 11. 15. 14:51

카이저켄 - 악몽

2015년 11월 7일


어쩌면,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한 게 잘못이었을까.


눈을 떴을 때, 이치죠우지 켄은 잠옷 차림으로 다시 그 곳에 있었다. 맨발에 느껴지는 이 생기 하나 없는 모래와 털을 곤두세우는 이 바람의 촉감은- 눈을 뜨지 않아도, 절대 잊어버릴 수 없는 기억이었다.


곧이어, 짭짤한 바닷 내음이 두 눈을 꼭 감고 주먹을 쥔 켄의 코를 간지럽혔다. 하지만 그가 친구들과 함께 현실 세계에서, 디지털 세계에서 느끼던 바다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향기- 공포가, 절망이, 죽음이- 그의 뺨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이 곳은 정확히 무엇일까 라는 생각에 다다른 켄은, 과거의 모든 신화들이 얘기하던,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망자들의 강을 떠올렸다. 그렇다면 여기는 그 곳의 일부인걸까? 스틱스 강? 요르단 강? 


어느 쪽이든, 확실한 건-


"코퀴토스가 더 어울릴 거 같지 않아?"


익숙한 목소리에 켄은 감고 있던 두 눈을 뜨고 허둥지둥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목소리의 주인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과거가 비추어져 보이는 시름의 강. 그만큼 완벽한 이름도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럴리가 없어.

고개를 세차게 저은 켄은 이 곳을 떠나려 했지만, 행복한 것을 떠오르려 했지만-

그의 손에는 이미 그의 과거를 대변하는 차가운 채찍이 쥐어져 있었다.


"카이저님..."


그의 등 뒤에서 겁에 질린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켄은 차마 돌아볼 수 없었다. 지금 와서 돌아본다면, 그의 치욕을, 그의 수치스런 과거를 다시 맞이해야 하는데- 


켄에게는 그럴 자신도, 용기도 없었으니까.


"카이저님... 카이저님..."


목소리는 점점 더 커졌고, 그 수도 점점 더 많아지고 있었다. 요동치는 죽음의 바다를 스피커 삼아 메아리치는 그들의 부름은, 아무리 귀를 틀어막아도 켄을 집요하게 파고들기만 할 뿐이었다.


"그만!!! 그만해!!!!"


더 이상 참을 수 없던 켄이 돌아보며 외쳤지만, 그 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한 줌 재와 같은 모래와 그가 내던져버린 채찍만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을 뿐.


"왜? 왜 그렇게 거부하는건데?"


또 다시 들려오는 목소리에 켄은 다시금 고개를 세차게 돌렸고, 거기엔 그가- 

그가 서 있었다.


"아무리 도망치려 해봤자 소용 없어. 아무리 잊어보려 해봤자 소용 없다구."


디지털 문자가 새겨져 있는 선글라스를 조용히 치켜올린 그 남자는, 가시처럼 솟은 머리를 쓸어넘기며 웃었다.


"느껴져, 이 추위가? 이 오한이?"


얼어붙어 있는 켄에게, 이 남자는 망토를 펄럭이며 다가왔다. 자신의 얼굴 앞까지 다가왔을때에야 켄은 뒷걸음질을 쳤지만, 남자는 그런 켄의 손목을 휘어잡고는 차가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너를 증오하는 모든 이들의 한이 너를 짓누르고 있어. 그들의 분노가, 그들의 증오가 느껴져? 느껴지냐구?"


섬뜩할 정도로 부자연스런 미소를 띄고 있던 남자는- 디지몬 카이저는- 아니, 과거의 켄 그 자신은- 켄을 꽉 끌어안고는, 발버둥치는 켄의 귀 옆에서 속삭였다. 그 섬찟한 미소를 계속 지은 채로.


"너에게 미래란 없어. 빛에 다가갈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다니, 안일하기도 하지. 애써 속죄라는 사탕발린 말 따위로 날 덮을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어?"


"그만.. 아냐... 난.. 친구들이.."


옴짝달싹 못하게 된 켄이 중얼거렸지만, 카이저의 미소는 점점 더 커지기만 할 뿐이었다. 


"친구라고? 그 뭐 하나 구별할 수 없는 고글 멍청이 말이야? 아니면 네 얼굴만 보고 널 쫓아오는 여자아이? 너에겐 관심조차 없는 빛의 소유자? 아, 나머지 두 명은 아직도 널 껄끄러워 하지? 그리고 너도 그걸 잘 알고 있잖아?"


"아니야... 아니라고... 너 따위..!"


하지만 그의 입에서 새어나오는 말과 달리, 켄의 반항은 계속 잦아들고 있었다.


"너 따위? 하하, 뭘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치죠우지. 난 너야. 너 그 자신이라고. 나는 그저 네 그림자에 불과해. 네가 도망가려고 하고 있는 그림자. 하지만 네가 어디로 도망치든, 그림자는 늘 네 곁에 있지. 나 없인 넌 살 수 없어."


말이 끝남과 동시에 꽉 껴안고 있던 켄을 놔준 카이저는, 곧이어 그를 물가로 밀쳐내고는, 무릎 꿇은 켄의 머리채를 잡고 그의 앞으로 파도치는 바닷물을 바라보게 했다- 그리고 그 바닷물에 비친 건, 머리채를 잡혀 있는 켄도, 그를 거칠게 누르고 있는 카이저도 아니었다.


그저, 홀로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디지몬 카이저와, 그를 바라보는 수많은 붉은 눈동자들.


켄은 움직일 수 없었다. 카이저는 더 이상 그를 누르고 있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그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카이저는 켄 그 자신이자 그 자체니까.


"아니야... 아니야!!!"


자신을 죽일듯이 노려보는 셀 수 없는 눈동자를 뒤로하고, 카이저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소리쳤지만, 그의 울분 가득한 목소리는 누구에도 닿지 못하고 힘없이 메아리칠 뿐이었다.



***



"켄 쨩.. 무슨 일이야? 괜찮아?"


"어.. 어?"


켄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온몸이 땀에 젖어 힘껏 몸부림치는 그를 보고 걱정되어 달려온 웜몬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 응, 아무것도 아니야, 웜몬. 걱정시켜서 미안해. 그냥 나쁜 꿈을 꿨을 뿐이야."


걱정스런 표정을 하고 있는 웜몬을 쓰다듬으며 몸을 일으킨 켄은, 그저 자신이 악몽을 꾸었다고 생각하려 애썼지만, 그 모든 것은 너무 생생했다. 어쩌면 그는 정말로 그가 가장 무방비한 시간- 수면을 취하는 바로 그 시간에- 어둠의 바다로 끌려갔던 것일지도 몰랐다.


'혹시 모르니 타케루 군이랑 히카리 쨩한테 물어보는 것이..'


켄은 알지 못했지만, 그가 무의식적으로 어루만지던 그의 목 뒷덜미는, 불안한 검붉은색으로 은은히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