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타케 - Lather, Rinse, Repeat
다이타케 - Lather, Rinse, Repeat
2015년 5월 3일
이야기를 읽기 전에:
이 단편은 애니코믹스 판 디지몬 어드벤처 02에서 타케루와 다이스케가 처음 만나는 장면에, 타케루가 "전에 쓰고 있던 고글은 어디가고, 그런 이상한 걸 차고 있는거야?" 라는 소리를 한 것에서부터 착안한 타임루프물입니다. (사진: http://i.imgur.com/03HRBwl.jpg)
***
익숙한 풍경.
“잘 먹었습니다—“
똑같은 일상.
“미안하구나 타케루, 내가—“
이미 셀 수도 없이 많이 겪은 대화들.
“아니에요.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나를 걱정스런 눈으로 돌아보는 어머니의 눈빛마저도, 이제는 싸늘하게만 느껴진다.
더 이상 일말의 감정도, 일말의 후회도 느껴지지 않는다. 지금 이 상황은, 중요치 않음을 안다.
가방을 메고 현관문을 나선다. 산뜻하게 불어오는 봄바람.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문다.
평화로운 세상이 내 눈 앞에 펼쳐진다. 다른 세계에 온 것 같은 착각— 아니, 어쩌면, 다른 세계일지도.
더 이상 원래 세계가 어떤지조차 기억할 수 없다. 모든 것이 일말의 파편으로만 남아있다. 산산조각난 거울을 통해 내 얼굴을 들여다보려 해봤자, 흐릿한 단편의 조각만이 나를 돌아볼 뿐.
뚜벅, 뚜벅.
복도 끝에서 나를 일층으로 데려다 줄 엘레베이터를 기다린다.
문이 열리고, 조그마한 소년 하나와 분홍색 머리의 여자아이가 나를 반긴다. 바로 앞에 있음에도 그들의 목소리는 내게 들리지 않는다. 마치 휘몰아치는 폭풍우 같은 내 마음 속에서, 하염없이 비를 맞으며 그만 포기하라고, 돌아가라고 악이 받치도록 소리를 지르는 이성의 마지막 끈처럼.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 이미 수십번도, 아니, 수백번도 넘게 해본 대화. 억지 웃음을 지으며 내 대사를 읊는다. 거세게 몰아치는 폭풍의 노호 속에 내 목소리도 묻힌 듯 들리지 않았지만, 그들이 나를 보며 웃는다— 적어도, 실수는 하지 않은 것 같군.
엘레베이터를 타고 모자를 푹 눌러쓴다. 깊은 한숨이 내 목구멍을 간지럽히며 타고 올라온다.
내 이름은 타카이시 타케루. 오늘도 난, 초등학생이라는 명목 하에 내 옛 추억을 되짚는다.
***
모든 것은 다이스케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난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아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직 고등학생인데. 아직 해야할 일이 많은데, 아직, 아직—
하루하루를 고통 속에 살아갔다. 죄책감 속에 살아갔다.
내 잘못이 아니라고,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고 사람들은 얘기했지만, 그들이 뭘 안단 말인가. 내 앞에서 그가 죽는 것을 직접 본 내 기분을, 그들이 어찌 감히 상상조차 할수 있긴 할까?
내가 소중한 존재를 잃어버린 것이, 처음이 아니니까, 더 의연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거야? 내가 결국 웃으며 쓰라린 기억을 짚고 다시 일어설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냔 말이야?
나에 대해서 무엇을 안다고...
그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내 자신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난 가면을 썼다.
웃음이라는 가면. 사람들에게서 내 진정한 마음을 숨길 수 있는 가면. 오직 그만이— 나에게서 벗겨낼 수 있었던 그 가면을, 또다시. 두 겹, 세 겹으로.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내 가면은 나의 일부가 되었다. 떨어질 수 없는 접착제로 붙여놓은 듯, 그 누구에게도 더 이상 내 진심을 보여주지 않았다. 가끔은 무엇이 내 진심인지 헷갈릴 때도 있었지만, 그의 부서진 고글을 내 손에 쥐는 하루하루가 나에게 그 날의 쓰라린 기억을, 그리고 내 진심을 다시 깨닫게 해 주었다.
그들이 뭐라고 하든 상관 없었다. 난 그를 되찾을 방법을 찾을 것이었다. 설령 그러기 위해 그 때의 그 지옥같은 기억을 매일 다시 떠올려야 한다손 쳐도.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 했던가.
***
내가 처음으로 다시 웃었던 것은 코시로 형이 몇십 년도 더 지나,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기계를 마침내 만들었다고 했을 때였다. 우리가 처음 모험을 할 적, 디지털 세계의 시간이 현실 세계와 다르게 돌아갔다는 점에서 착안해, 겐나이 상의 도움으로 디지털 세계를 통해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고 그는 우리에게 얘기했지만, 그 기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알 바 아니었다.
돌아갈 수 있어.
다이스케 군을 살릴 수 있어.
딱히 코시로 형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거나 동의를 구할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그들이 내 의견을 들어줄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기에.
코시로 형은 타임머신을 보여줄 적 과거를 바꾸는 행동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아예 통째로 근간부터 흔들어 놓을 것이라고 경고했었지만, 새벽에 연구실 안에 잠입해 떨리는 손으로 어쩌면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는 과거의 여행을 시작하려는 나에겐, 그의 경고 따위는 머릿속에서 내 진정한 웃음처럼 희미하게 사라져 버린지 오래였다.
다만 그도, 나도 알지 못했던 것은, 과거로 돌아간다는 것이, 과거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을 역사를 공부하듯이 훑는것이 아닌, 내 자신이 그 시대로 돌아가버린다는 것이었을까.
나는, 다시 10살이 되어있었다.
어머니는, 오늘이 내가 처음으로 오다이바 초등학교로 다시 입학하는 날이라 나를 흔들어 깨웠고, 난 그제서야 내가 여태까지 겪어왔던 모든 것을 모두 다 다시 겪을 것임을 깨달았다.
그럼에도, 다이스케를 만날 수 있다는 것에, 희망을 가졌다.
처음에는.
***
내게 선명하게 남아있는 우리의 두번째 모험을 모두 다시 겪고, 중학생이, 그리고 고등학생이 되어 다시 그 운명의 날을 맞이했지만—
나는 그를 구할 수 없었다.
왜?
어째서?
내가 너를 구할 방법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는데, 어째서 난 너를 구하지 못한거지?
넌 왜 나에게서 계속 멀어지기만 하는거야?
왜?
돌아와.
돌아오란 말이야...
그 때의 충격은 처음보다 더 심했다. 그를 또다시 잃었다고 생각하니 더 이상 가면도 소용이 없었다. 무너져 내리는 둑처럼, 절망이, 공포가, 파도처럼 나를 덮쳤다.
그래서 나는 다시 시도했다.
타임머신을 타고, 다시 우리가 처음 만난 그 날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나는 또다시 실패했다.
자책.
재시도.
실패.
자책, 재시도, 실패. 자책, 재시도, 실패—
나는 시간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코시로 형의 기계로,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영원한 시간의 아지랑이 속에, 끊임없이 돌아가는 시계바늘 속에 손발이 묶여 인형처럼 다스려지고 있는 것은 나였다.
째깍째깍대는 시곗소리에 트라우마가 생겼다. 처음 내가 기억하는 우리의 모험과 다른 일도 많이 겪었고, 코시로 형의 경고에 맞게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타임머신은 늘 개발되었고, 나는 늘 돌아갔다.
내 정신이 피폐해지고, 나를 비웃는 시계추가 나를 부숴놓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내 대사 하나하나를 모두 기억할 수 있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늘...
돌아갔다.
***
처음으로 그를 만나는 순간이 매정하게도 또다시 나를 찾아왔다.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 차라리 이 때 그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가 용기와 우정을 이어받는 아이가 아니었더라면 같은 생각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몰랐지만, 그를 만나면 그 모든 것이 사라지곤 했다.
그리고 난 그런 내가 미웠다—
내 자신을 갉아먹고 있음을 앎에도, 다시 돌아올 수 밖에 없는 나를, 그가 행복할 수 있도록, 우리가 행복할 수 있도록, 그를 처음 본 것처럼 행동해야 하는 나를.
끔찍하게도 증오했다.
툭.
내 앞으로 축구공이 굴러온다.
“여어, 축구공 좀 던져줄래—“
천천히 몸을 숙여 축구공을 집어든다. 차마 앞을 바라볼 자신이 없다. 목이 뻣뻣하게 굳는다. 이 모자로 가려진 시야 앞에, 그가 서있다.
“이봐—“
그의 목소리에 마른 침을 삼키며 고개를 든다. 붉은 머리. 진한 갈색 눈동자. 네모난 고글.
네모난 고글?
아아, 그래. 그랬다. 그는 타이치 형을 동경해서 고글을 쓰고 다녔었다. 우리의 첫 모험에서 브이몬을 만나고, 그에게 동그란 고글을 물려받기 전까지, 그는 저 고글을 썼었다.
“야, 거기, 축구공 줄거야, 말거야?”
그의 짜증나 하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 다시 그를 쳐다본다. 그에게 삐걱거리는 미소를 지어보이고 축구공을 던진다. 이제 내가 해야할 대사를 읊어야 할 차례.
말문이 막힌다.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내가 정작 해야할 말은 내 목구멍에서 나오질 않는다. 감정이 메말랐다고 생각했지만, 이 순간만 되면 모든 것이 터져나올 것만 같았다.
이상하게 나를 쳐다보는 그의 고글에 다시 시선이 쏠린다. 안 어울리는 네모난 고글.
“전에 쓰고 있던 고글은 어디 가고, 그런 이상한 걸 차고 있는거야?”
내 입에서 내 진심이 흘러나온다. 늘 그랬듯이, 그는 존재만으로 내 가면을 벗겨버리고 있었다.
더욱 더 나를 이상하게 바라보는 그를 마주할 자신이 없다. 분명 미친놈이라고 생각하겠지. 오늘 처음 만났는데, 전에 쓰고 있는 고글이라니. 온 몸이 떨린다, 그가 뭐라고 중얼거린 것 같았지만, 그를 쳐다볼 수도, 그의 목소리를 감히 들을 수도 없다.
그가 내 이름을 부른 것 같지만, 날 본 적도 없는 녀석이 내 이름을 알리가 없다. 이젠 환청까지 들리는 걸까.
닭똥같이 떨어지는 눈물을 닦으려 하지도 않고, 그를 지나쳐 간다.
숨을 쉴 수조차 없다.
누가 제발 이 고리를 끊어줘.
이런 생각을 매일 하면서도, 결국 그를 보며 웃고, 그와 대화하고, 그를 구하기 위해 다시 이 세계로 돌아오는 내가...
참 밉다.
***
익숙한 풍경.
똑같은 일상.
이미 셀 수도 없이 많이 겪은 대화들.
오늘도 나는 같은 대사를 읊으며 학교로 나선다. 한숨을 쉬고, 입술을 깨물며 공을 찬다.
이번에도 나는 또 과거로 돌아왔다. 가끔은 그가 밉다. 하지만 그를 보고 있으면 그런 마음이 눈 녹듯 사라져 버린다. 후회하면서도, 그를 저주하고 싶을 때가 있음에도, 모든 것이 그의 눈웃음에 산산조각나 버린다.
그것이 너무 고통스러워.
그러니까...
그러니까 이제 제발.
...
이제 제발 날 놔줘.
너를 구한 것이 몇번째인지, 네가 내 몫까지 행복한 삶을 살길 바라며, 네가 죽는 것을 볼 바에 차라리 내 목숨을 댓가로 바쳐 널 구한 것이 몇번째인지— 너는 모른다.
난 네가 망가지는 것을 알고 있어.
그러니까 제발 그만.
내가 대신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날 줄 알았다. 하지만 너는 계속 돌아왔다.
운명은 가혹했다. 네가 없는 세상은 지옥같았고, 코시로 형이 만든 타임머신을 타고 난 돌아와 너를 구하기 위해 몇번이고 우리의 모험을 다시 겪었다. 하지만, 하지만— 너를 구할 순 없었다.
단 한가지 방법만을 빼고.
근데 너는 왜 계속 돌아오는거야?
이제는 내가 널 구하더라도 네가 계속 돌아올 것을 안다. 우리의 이야기가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절대 끝나지 않을 것임을 안다. 이야기가 돌고 돌아, 우리 둘 다 완전히 파멸할 때까지 네가 돌아올 것임을 나는 안다.
하지만 미안해.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네가 죽은 세상에서 살고싶진 않아.
이기적이라서 미안해.
그러니까, 이젠 제발 나를 놔주면 안될까—
타케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