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몬 x 킹스맨 - Roundabout
디지몬 x 킹스맨 - Roundabout
2016년 1월 16일
정장을 입은 타케루 사진은 콩다 (@bean2810) 님의 그림입니다.
다시금 감사드립니다!
***
후-
겉보기에도 값이 꽤 나갈 것 같은 가죽 의자에 앉아 오른다리를 자기 얼굴 앞까지 올려놓고 있는 남성이, 지금 막 자신이 손질을 끝낸 검지 손톱을 엄지로 찬찬히 훑고는, 남아있는 가루를 날려보내려는 듯 조용히 입김을 불었다.
자신의 사파이어빛 눈을 연상시키는 청색 줄무늬 정장을 입고, 검은 넥타이를 맨 이 남자는 쓰고 있던 네모난 안경을 치켜올리곤 의자 옆, 쟁반에 놓여져 있는 집게로 얼음 몇 개를 잔에다 하나 하나 떨어뜨렸다. 얼핏 보면 칙칙할 수도 있는 그의 정장은, 오른쪽 가슴에 차고 있던 밝은 노란색 뱃지 덕분에 한층 화사해 보였다- 곧이어 각양각색의 무늬가 새겨져 있는 유리 위스키 병을 집어든 그는, 자신의 뱃지처럼 빛나는 금빛 머리를 한번 더 쓸어넘기며 잔에 위스키를 따랐다.
손가락으로 잔의 끝부분을 조심스레 잡고 자신의 얼굴 앞에서 천천히 흔들어보이는 그의 몸짓에, 하얀 셔츠를 고정시키기 위해 착용한 검은 멜빵이 조심스럽게 외투 아래로 모습을 드러냈지만, 그러든 말든 이 푸른 정장의 신사는 조용히 위스키를 음미했다.
다른 손의 검지만을 뺨으로 올리고, 나머지 손가락은 턱 밑으로 하여 턱을 괴고 있던 그는, 자신이 바라보고 있던 양복점 안 탈의실의 문이 마침내 열리자 눈썹을 치켜올렸다.
"기다리다 지치는 줄 알았다고, 야마토 형."
그의 투덜거리는 말투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파란빛 넥타이를 고쳐매며 자신의 검은 외투 단추를 잠군 남자는, 자신을 웃으며 바라보는 동생과 같은 금발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동생과 다르게, 그의 머리는 무언가라도 바른 듯 하늘을 향해 솟아있었다.
"임무 중에는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을텐데, 갤러해드 (Galahad)."
새로이 입은 정장이 어떤 느낌인지 보려는 듯 전신 거울 앞에서 천천히 자기 자신을 훑어보던 야마토가,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하여간, 깐깐하다니깐. 알겠어요, 시정하겠습니다, 퍼시벌 (Percival)."
놀리는 듯한 말투로 야마토의 코드네임을 부른 그의 동생, 타케루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자신의 형을 바라보았다. 늘 들고 다니는 검은 우산을 향해 손을 뻗으려던 순간, 타케루는 야마토의 구두에 눈을 고정시켰다.
"촌스럽게, 그게 뭡니까? 풀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쿼터 브로그라도 신던지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은 야마토는, 주인장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타케루에게 가자는 손짓을 하며 말했다.
"브로그 없는 옥스포드가 가장 신사다운 법이야."
***
양복집 비밀통로를 통해 본부로 내려가는 엘레베이터 안에서, 휘파람을 불며 자신의 우산을 빙빙 돌리던 타케루는, 입을 굳게 다물고 팔짱을 끼고 있는 형을 잠깐 쳐다보더니, 곧이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번엔 뭐랍니까?"
"암살."
"우리가 언제부터 맘에 안드는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쏴죽이고 다니는 집단이 됐습니까?"
"아서(Arthur)의 지령이야.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
"하."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을 굴린 타케루는, 자신의 은빛 롤렉스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오후 5시 55분- 아슬아슬하게 회의 시간을 맞출 수 있을 터였다.
"그럼 오늘 회의 주제는 그 타겟에 대한겁니까?"
"그렇겠지."
"아니 근데, 왜 퍼시벌은 이걸 다 알고 있는데 난 모르고 있던건지가 이해가 안되는데요."
"아서가 날 통해 너한테 얘기하라고 했으니까."
"아니 근데 왜 이제까지 기다린겁니까? 거 참, 미리 얘기해주면 되지. 그래서, 타겟이 누굽니까?"
투덜거리는 타케루를 돌아본 야마토는, 무언가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연민의 감정인지, 아니면 단순히 형으로써의 눈빛인지. 타케루는 전에도 몇번 야마토가 아서와 대화 후 저런 표정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때 야마토가 왜 그랬는지를 떠올려보기도 전에, 야마토의 단말마가 그의 생각의 허리를 베어냈다.
"야가미 타이치."
계속해서 빙글빙글 돌아가던 타케루의 우산이, 우뚝 멈춰섰다.
"동명이인이지?"
임무 중이고 무엇이고 상관없이, 제발 그렇다고, 그저 동명이인일 뿐이라고 말해달라고 반말로 자신의 형을 캐묻는 타케루의 눈빛은 절박 그 자체였다. 냉혈한이라고 불리던 이시다 야마토마저도, 동생의 그 눈빛은 차마 감당하기 힘든 듯 고개를 돌렸다.
묵묵부답이었다- 그리고 타케루는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
"아서!!!"
문을 부수다시피 박차고 회의실에 들어온 타카이시 타케루는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씩씩 거친 숨을 내쉬는 그 뒤에 서있는 야마토는, 원탁을 훑어보았다- 그는, 아서를 제외하면, 자수정 빛깔의 단발 머리를 깔끔하게 뒤로 넘기고, 몇백미터 밖에서도 빛날만한 분홍색 반지를 낀 손으로 턱을 괴고 있던 란슬롯 (Lancelot)- 이치죠우지 켄만이 있음을 알아차렸다. 물론, 붉은 머리와 잘 어울리는 보랏빛 커프스를 만지작 거리며 홀로그램으로 참석할 요원들을 정리하고 있는 멀린 (Merlin)- 이즈미 코시로를 포함해서.
그 뜻은 회의가 곧 시작될 것이라는 얘기였다- 아직 회의가 시작하기 전에 타케루가 문을 박차고 들어온 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야마토는 가늠할 수 없었다. 특히, 동생이 지금부터 무슨 짓을 할지 아주 잘 알고 있었기에.
"갤러해-"
타케루의 얼굴을 보고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푹 숙인 란슬롯이나, 일부러 모른 척 홀로그램에 열중하는 멀린과 달리, 묘하게 야마토를 닮은 송곳같은 갈색 머리를 한, 검붉은 정장의 아서는 타케루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곧이어 그가 무미건조한 말투로 입을 열었지만, 타케루의 외침에 곧 묻혀버리고 말았다.
"야가미라니!!"
"갤러해드. 회의가 곧 시작된다. 일단 앉-"
"빌어먹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야가미 타이치라니!"
끓어넘치는 듯한 분노로 아서를 몰아붙인 타케루였지만, 아서는 눈 한번 깜빡이지 않았다.
"우리가-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흥분한 상태로 자신에게 손가락질을 하는 타케루의 몸짓에, 문을 닫고 가만히 서있던 야마토는 순간 움찔했다.
"당신의 가장 친한 친구라고 야가미 스스무 상을 소개시켜준건 바로 당신이었잖아!"
"갤러해드-"
"스스무 상이 죽고 기울어가던 가문을 타이치 상이 어떻게 간신히 살려놨는데, 그렇게 얘기해도 도움 하나 주지 않았으면서, 이제와서 방해된다고 죽여버리겠다고?!"
"..."
"친구의 아들을 그렇게 막 죽여버린다고 말하고도 아무 죄책감도 들지 않습니까? 예? 아, 그렇지, 그 빌어먹을 임무 때문에 어머니도 버리셨었죠? 안그래요, 아버지?!"
쾅-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던 타케루는, 말을 끝맺음과 동시에 책상을 있는 힘껏 내려쳤다. 야마토는 그저 뒤에 서서 동생을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아서라는 이름으로 이 조직을 이끌고 있는 자신들의 아버지, 이시다 히로아키에게 난생 처음으로 반기를 드는 동생을.
그들은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에게 킹스맨 요원이 되는 훈련을 받은 존재였다. 그때만 해도, 가정은 행복했고, 아서라는 중책에도 불구하고 히로아키는 늘 웃고 장난끼 넘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는 변하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웃음이 끊이지 않던 가정은 비가 내리는 어두운 길거리처럼 어둠에 젖어갔고, 히로아키는 아이들에게 엄격하게 변했다. 결국 더 이상 그의 행동을 인내할 수 없었던 그들의 어머니 나츠코는 타케루를 데리고 집을 떠나버렸다- 야마토가 타케루를 다시 본 것은, 많은 시간이 흘러 타케루가 자신의 의지로 다시 킹스맨에 돌아왔을 때였다.
생각해보면, 어렸을 때에도, 그리고 커서 거의 무례하기까지 할만큼 엄격해진 아버지에게 훈련을 받을 때도, 늘 그에게 반발했던 건 다름아닌 야마토 자신이었다. 타케루는 묵묵히- 때로는 웃으며, 때로는 농담을 건네며 맡은 바를 수행했고, 그 덕에 얼마 안가 갤러해드라는 이름을 받고 정식 요원이 될 수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런 타케루가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었다. 히로아키는 야가미 스스무와 친했다- 그 둘은 뗄레야 뗄 수 없는 친구 관계였으니까. 그리고 그렇기에 자연스레, 야마토는 자신과 동갑내기인 스스무의 아들, 타이치와 깊은 유대관계를 쌓았다. 그것은 그의 동생인 타케루와 타이치의 여동생 히카리도 마찬가지였을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너무 어렸고, 제대로 된 친구가 되기도 전에 타케루는 어머니 손에 끌려 자취를 감췄었다.
히로아키도 타이치를 아꼈지만, 스스무가 죽고 나서 그들의 관계는 소원해져만 갔다. 생각해보면, 히로아키가 지금의 성격이 된 것도 스스무가 죽고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타케루와 야마토는 타이치와의 관계를 계속해서 이어갔다- 아니, 애초에, 저번주만 해도 야마토와 타케루는 타이치네 집에서 저녁식사를 하지 않았던가. 당연하게도, 그렇기에 이 지령은 야마토에게도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이번 회의에서 아버지가 정확히 무슨 의도를 갖고 이런 말을 한건지 캐물으려고 했는데-
타케루가 이렇게 반응할 줄은.
"그 계집애 때문이냐?"
자신만의 생각에서 빠져나온 야마토는, 숨을 고르고 있는 타케루를 향해 아서가 말을 하는 것을 보았고,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타케루가 두 주먹을 뼈가 부서질 만큼 부들부들 떨며 쥐고 있음을 깨달았다.
"계집이라고, 하지 말란-"
"야가미 가문의 동태를 알아보라고 보냈더니, 한심하게 사랑에나 빠져 오고는. 쯧."
그제서야 야마토는 아서가 타이치의 동생, 히카리를 얘기함을 알아차렸다. 분명히 몇달 전, 타케루가 그들의 새 사업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히카리에게 접근하는 임무를 받았긴 했었다- 야마토 자신에게는 타이치와 가까운 사람들을 미행하라는 임무가 떨어졌고 말이다. 그때만 해도 두 형제는 야가미 가문을 굳이 감시하는 아서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임무를 어찌 되었든 수행해냈던걸로 기억했는데-
"... 그럼 한가지만 물어봅시다, 아서."
타케루의 떨리는 목소리는, 그가 한계점에 다다르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임무에, 친한 사람을 암살하라는 지시, 게다가 그의 짝사랑까지... 야마토는 지금이라도 당장 타케루를 토닥여주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야가미 가문이랑 그렇게 친했으면서 왜-"
타케루의 질문은, 안경을 벗은 아서가- 아니, 히로아키가 나즈막하게 말한 한마디에 길을 잃고 말았다.
"내가 스스무를 죽였으니까."
***
보시다시피 여기서 끝날 이야기는 아닙니다- 실은 콘티도 구상도 더 있습니다만은, 후편이 언젠가 나올지, 나오지 않을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