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 좀 하자."


입이 찢어질 듯 하품을 하며 강의실을 나선 이시다 야마토는 무슨 일이냐고 물을 새도 없이 남자친구에 손에 이끌려 학교를 떠났다. 늘 웃는 모습을 보이던 천하의 야가미 타이치가 저렇게 심각한 표정으로 자신을 데리고 가고 있으니, 무슨 일이 나도 단단히 난 모양이었다. 설마-


"우리, 애칭이 필요해."


는 개뿔, 이게 뭔 개소리야?



***



"그러니까, 꽁냥거리고 싶으신데 내가 성격이 더러워서 못했었으니 이 기회에 좀 해보자?"


"어우, 돌직구 너무 묵직한 거 아니냐?"


그럼 그렇지.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타이치는 동생들의 연애가 부러운 모양이었다. 케루 군이니, 나의 천사라느니, 듣기만 해도 괜히 소름이 끼치는 호칭들로 서로를 부르는 걸 보고 있자니 자기도 그런 연애를 내심 해보고 싶었던 건지 뭔지. 한 때는 자기네들도 손만 잡아도 얼굴이 벌개지는 시절이 있었더랜다-- 그런데 이제 연애한지 5년이 다 되어가는데, 이제 와서 무슨 애칭이란 말인가.


그렇지만 사귄 시간이 긴 만큼 야마토는 타이치가 어떤 녀석인지 잘 알았다. 매사에 진지한 구석이라고는 없어 보이지만 속은 깊고, 진중할 때는 진중한 놈. 한 번 꽂힌 것은 어떻게든 해내고자 하는 놈. 그러니까 문제였다. 그나마 애칭에 꽂힌 게 다행이지-- 동생들이 하는 다른 짓에라도 꽂혔으면 어쩔 뻔 했나.


"하... 그래, 그래서, 뭐, 무슨 애칭을 원하는데? 자기야 라고 불러주랴?"


"에이, 그런 건 너무 식상하잖아. 뭔가 우리끼리만의 그런 게 없을까? 그래, 히카리가 타케루를 줄여서 케루라고 부르고 막 그랬잖아, 그럼 너는 야마 어때?"


"너 때문에 야마 돈다 진짜..."


"그럼 네가 뭐라도 좀 생각해봐!"

"아니 네가 다짜고짜 시험 공부때문에 밤을 샌 사람을 끌고 나와서는 헛소리를 했는데, 왜 내가 그걸 생각해내야 하는건데?"


"야마토니까, 음, 야.. 마토... 매튜는 어때? 바다 건너에서도 잘 먹히던데."


"네타 발언 하지 마라..."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지났다-- 시간 없다고 나중에 얘기하자고 그 자리를 뜬지 나흘. 하지만
타이치는 굴하지 않았다. 일본이 한 때 해가 뜬다는 뜻의 야마토라는 이름의 왕국이기도 했으니, 나의 세계는 어떻겠냐는 소리를 했다가 두들겨 맞았는데도, 저 놈의 고집은 굽히질 않았다.


게다가 이 빌어먹을 고집은 더 이상 자신들만의 이야기로 끝나질 않았다. 이틀 전에는 새벽에 미미가 갑자기 "생각났다! 야'가미'() 니까 나의 신님이라고 부르는거지" 라고 오질 않나, 어제는 타케루와의 저녁 약속에서 타케루가 도통 말을 하지 않고 있길래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더니, 형의 애칭을 히카리랑 함께 계속 고민하고 있었다고 말하지 않던가.


"아예 한 글자로 줄여서, 타이치 형은 타고, 형은 얌이면 어때? 커플링 표기도 그렇게 하잖아."


"나만 빼고 무슨 단체로 네타 발언 약속이라도 잡았니 너넨?"


대체 타이치가 누구한테까지 다 얘기를 하고 다닌건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니 원. 둘이서 이러고 있어도 쪽팔려 죽겠는데, 모두의 힘을 합쳐 이딴 건 다크 마스터즈랑 싸울 때로 족하다고, 진짜.


그래서 오늘. 야마토는 기필코 오늘 어떻게든 승부를 볼 생각이었다.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점심데이트였지만, 분명 타이치는 이 주제를 어떻게든 끌고 올 테니까.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 볼 심산이었다.


"오래 기다렸어, 다이와 군?"


하?


멋쩍은 듯 뒷머리를 긁은 타이치는, 한자로 적은 야마토 (大和)를 음독으로 읽으면 다이와 라고 발음을 하지 않느냐며, 새벽 내내 네 심기를 건드리지 않을 애칭을 생각해 왔다고 했다. 그래, 장하다 장해. 근데 있지...


"내 이름은 가타카나라고 (ヤマト)----!!!!"


"아악 그랬지!!!!!!"


방금 얻어맞은 머리를 쓰다듬은 타이치는 결국 데이트 내내 축 처진 기분을 유지하고야 말았고, 야마토는 괜히 죄책감이 드는 자신을 막을 수 없었다. 그래도 남자친구랑 투닥이는 거 말고도 좀 연인같이 행동해 보겠다고 하는 건데, 너무 화만 낸 게 아닐까? 그래, 이런 게 다 싫은 건 아니니까. 내가 뭐라도 애칭을 하나 생각해보면, 타이치도 기분이 좀 풀리지 않을까.


"그럼 있잖아, 타이치. 그... 우리 문장이 있으니까. 나의 우정, 나의 용기 이런 건 어떠냐?"


"와, 존나 구리다."


아 씨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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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토 - Space Oddity

2018년 6월 1일


노래랑 같이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lton John - Rocket Man



--



She packed my bags last night, pre-flight
그녀는 비행 전날인 어젯밤, 내 짐을 꾸렸어


출발하는 우주선은 늘 바쁜 법이다- 몇 번째 비행이니 익숙해질 법만 한데도 다른 우주 비행사들은 모든 것이 제대로 작동하도록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다양한 버튼을 누르고 있었고, 같이 떠나는 파트너인 가부몬마저도 다른 사람들을 도와 능숙하게 제 할 일을 해내고 있었다.


Zero hour, 9 A.M. and I'm gonna be high as a kite by then
아침 9시가 되면, 난 연처럼 높이 떠 있을거야


이제 어느덧 30대 중반에 접어든 이시다 야마토 또한 첫 비행은 아니었고, 화성에 도착할 때까지 할 일은 너무나도 많았다. 그렇지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동료 비행사에게 다가가기 전에, 야마토는 창문 너머를 흘겨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저 밑에 자신의 배우자가, 친구들이, 아이들이 있을 것이리라. 보이지도 않을, 어쩌면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르는 자신에게 열심히 손을 흔들며.


I miss the Earth so much, I miss my wife
난 지구가 몹시 그립고, 내 아내가 보고 싶어


우주는 경이로운 곳이었다. 대기권을 지나 순조로이 올라가는 로켓 속에서, 야마토는 다시금 그 위대함에 숨을 죽일 수 밖에 없었다. 가만히 옆에 다가와준 가부몬의 손을 잡고, 창문 밖을 내려다 보면 보석처럼 희고 파랗게 빛나는 창백한 별이 보였다. 그들이 반 년동안 돌아가지 못할 고향- 지구.


It's lonely out in space on such a timeless flight
시간을 알 수 없는 비행 속에서의 우주는 외로워


지금쯤 다들 무엇을 하고 있을까? 검은 바다에 수놓아진 밝은 별들을 바라보며 야마토는 사색에 잠겨, 손에 쥔 디지바이스를 계속 만지작 거리고만 있었다. 처음 우주로 떠날 때는 이 공허한 마음을 달래려 기타를 쳐보려도 했지만, 무중력 속에서는 손이 기억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더라. 


And I think it's gonna be a long, long time
내 생각엔 오랜, 오랜 시간이 될 것 같아


부모님이 어릴 적 이혼한 이후로, 야마토는 어린 나이에 어른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디지털 세계에서 모험을 겪으며 성장하고 홀로 설 필요가 없다는 것을 배웠으나, 동생처럼 가족에 대한 열망과 공포를 동시에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시간은 흘렀고, 야마토는 자신의 가정을 꾸렸다. 같이 모험을 겪은 친구와 연인이 되고, 배우자가 되어 이제는 어엿한 아빠가 되었으니.


Til touchdown brings me 'round again to find
다시 집으로 돌아와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제는 추억이 된 고등학교 졸업 시절에는 우주 비행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펼쳐 모두를 놀라게 했었다. 뼈를 깎는 노력을 해야 했지만, 디지몬과 함께 우주로 떠나 새로운 세상을 꾸리고, 그 길을 개척하려 했다. 인류가 천천히 걷고 있던 우주로의 여행에 선두로 서서. 


I'm not the man they think I am at home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때까진 말야


영웅이 되고 싶었냐고 묻는다면, 어쩌면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디지털 세계에서 배운대로 혼자일 필요는 없으니까. 이번에는 자신의 불안함, 외로움을 숨기기 위해 모두를 이끄는 척 하는 것이 아닌, 진정으로 모두를 이끄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Oh, no, no, no, I'm a Rocket Man
절대 아니지, 나는 로켓맨이야


우주는 그런 그에게 무한한 개척지가 되어주었다. 디지몬을 토대로 하는 엄청난 기술력으로 인류는 빠른 발전을 이루었고, 지금 로켓을 타고 화성을 향하는 야마토는 다른 몇 명의 사람들과 함께 화성에 인류의 첫 기지를 세울 예정이었다. 아이들은 아빠가 화성에 간다는 것에 신나했고, 야마토 또한 친구들에게 술잔을 기울이며 자랑스러워 해도 좋다고 너스레를 떨곤 했다. 


Rocket Man, burning out his fuse up here alone
이 위에서 홀로 휴즈를 다 태워 없애는, 로켓맨이야


참 이상하지, 몸을 기대고 꾸벅이는 가부몬을 바라보며, 야마토는 가부몬한테 말하는 것인지, 자신한테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는 듯 중얼거렸다. 지구에 있을 때는 우주에 나오고 싶었는데, 우주에 나오면 지구에 돌아가고 싶으니까 말이야. 입술을 씰룩거려 보지만 코를 통해 내쉬는 숨은 한숨에 가까웠다.


Mars ain't the kind of place to raise your kids

In fact, it's cold as hell
화성은 애들을 키울만한 곳은 아니지- 

사실, 엄청나게 춥기만 해


두려움도, 외로움도 모두 극복해서 가족을 꾸리고 그 가족을 위해 자랑스런 직업을 가지고 하늘 너머로 떠났다 모두 믿겠지만, 점점 멀어만 가는 푸른 별을 바라보는 야마토는 복잡한 심정을 점심과 함께 꾸역꾸역 집어 삼켰다. 외롭기 싫어서 가족을 꾸리지만, 자신의 야망을 위해 선택한 진로로 가족들을 위하려면 다시 외로워져야만 한다. 


And there's no one there to raise them if you did

그렇게 하고 싶어도 아이들을 키워줄 사람도 하나 없어


그래도 가부몬이 있어 다행이었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모든 일을, 모든 행동을 모두 따르겠다고 파트너는 말했다. 그런 그와 함께라면 어떤 임무도 마냥 외롭지만은 않았다. 그렇지만, 가끔, 아주 가끔, 자신을 바라보는 가부몬의 눈동자에서 거울을 보는 듯 쓸쓸함을 읽어낼 때면, 야마토는 가만히 가부몬을 안아주고는 했다.


And all this science, I don't understand
그리고 이 과학들은 다 전혀 모르겠어


우주 비행사란, 경험하지 못한 곳으로 떠나는 존재이다. 삶이 어디로 자신을 데려갈지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인생처럼, 우주 비행사는 반짝이는 도형들과 숫자들을 믿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으로 깊숙히 날아간다. 남들에겐 어쩌면 대단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우주 비행사도, 정치인도, 가수도, 아이들도, 디지몬도 다 같은 존재일 뿐이니까.


It's just my job, five days a week
난 그저 일주일에 5일만 일하면 되지


새로운 별, 새로운 행성. 디지몬들의 도움을 받아 화성 표면에 천천히 기지를 세우며, 야마토는 저 멀리서 파랗게 빛나는 지구를 향해 또다시 눈을 흘렸다. 로켓이 출발할 때처럼, 집을 찾아 돌아가는 철새처럼 그는 계속 그쪽을 향할 뿐이었다. 우주복 신발 밑에서 바스라지는 붉은 토양은 야속할 만큼 빛나기만 했다.


A Rocket Man, a Rocket Man
로켓맨, 로켓맨


따뜻하지만 슬프고, 안락하면서도 우울함이 묻어나는 나날. 외로움이란 술잔을 같이 기울이지만 혼자 앉아 들이키는 것보다는 낫다는 노래 구절을 속으로 읊으며 야마토는 가부몬을 데리고 오늘도 하모니카를 부른다. 이 아름답지만 한없이 두려운 세상에 너와 함께 있어서 그래도 다행이야, 가부몬.


And I think it's gonna be a long, long time

내 생각엔 오랜, 오랜 시간이 될 것 같아


Til touchdown brings me 'round again to find
다시 집으로 돌아와 사람들이 생각하는


I'm not the man they think I am at home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때까진 말야


Oh, no, no, no, I'm a Rocket Man
절대 아니지, 나는 로켓맨이야


Rocket Man, burning out his fuse up here alone

이 위에서 홀로 휴즈를 다 태워 없애는, 로켓맨이야


야마토.
응?

난 야마토와 함께라서 행복해.

나도.

그치만 가끔 모두가 그리울 때가 있지 않아?

응, 가부몬.


And I think it's gonna be a long, long time...
내 생각엔 오랜, 오랜 시간이 될 것 같아...


어서 집에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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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케히카 - 지금 여기서
2017년 8월 3일


*19금 주의*


"음..."


적막이 무겁게 내려앉은 호텔 방 안에서, 대충 걸치고 있는 수건 아래 젖은 래쉬가드를 입은 두 남녀가 어색한 듯 서로의 눈빛을 피했다. 그리고 그런 그들 앞에는, 침대에서 세네 걸음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떡하니 놓여있는 핫터브 느낌의 욕조가 있었다. 침대 옆 욕조라니, 도대체 누가 설계한 거야?


끈질긴 노력 덕에 마침내 타이치에게서 OK를 받아낸 타케루와 히카리의 첫 여행은 역시 바닷가였다. 따가운 햇빛이 내리쬐는 7월, 해수욕장은 비록 더위를 피하려 놀러온 사람들로 붐볐지만, 그마저도 그들에겐 신선하고 좋은 경험일 뿐이었다. 


그래도 성수기는 성수기였을까. 맘에 드는 호텔을 찾으면 방이 없고, 방이 있으면 맘에 들질 않고... 결국 중간에 누군가 취소한 듯한 호텔 방을 불과 여행 하루 전에 부랴부랴 잡았지만, 이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아 예, 죄송하지만 바꿔드릴 수 있는 방이 없어서... 성수기인지라."


참으로 좋은 호텔인데, 도대체 왜 욕조가 침대에서 별로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걸까? 목욕을 하고 나면 침대 및 방 자체가 습해질테고, 왜 애초에 화장실에 있지 않고 방 안에 있는거고, 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타케루는 이만한 방을 잡은게 어디냐는 히카리의 말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에어컨도 있고, 넓기도 하고, 냉장고도 있고, 게다가 무엇보다 바닷가 바로 앞이고. 


그래, 뭐, 신나게 놀다가 히카리 쨩이 먼저 씻게끔 하면 되겠지, 내가 화장실이나 어디 다른 데 가 있던지 하는 동안. 괜찮을거야.


그래서 괜찮을거라고, 괜찮겠거니 했는데-


바다에서 서로 신나게 놀다가 호텔에 들어온 시간은 그새 저녁. 바닷바람 때문인지, 젖은 수영복 때문인지, 수건을 둘러도 한명이 씻는 동안 화장실에 들어가 있던 복도에 나가 있던 하기에는 너무나도 추워져버린 날씨였다. 그렇다고 해서 씻지 않고 잘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아니, 아니지. 무슨 소리람. 차라리 내가 아픈게 낫지. 침묵을 먼저 깬 건 그런 생각에 다다라 굳게 결심한 타케루였지만, 히카리의 이름을 부르려던 그의 말은 고개를 푹 숙이고 카펫만을 바라보던 히카리가 불쑥 말해버린 한 마디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씻을래?"


아- 그래, 히카리 쨩이 먼저 씻고 싶어한다면 내가 기다려야... 히카리에게 알겠다는 듯 고개를 조용히 끄덕이고 돌아선 타케루는, 침대를 향해 두어 발자국을 내딛은 후에야 히카리의 말이 의문문이었음을, 그리고 그녀가 얘기한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깨달았다.


"잠, 잠깐만, 히카리 쨩-"


수건이 땅에 떨어지는 것도 잊은 채 몸을 돌린 타케루는, 이미 수건을 벗고 욕조에 물을 받기 시작하는 히카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남은 말을 삼켰다. 물론, 히카리와 사귄지는 벌써 1년을 웃돌고 있었고, 그들이 사랑을 나눈 적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그렇지만 모든 것은 어두운 방 안에서, 이불 속에서였지 않는가. 비록 저녁이라고는 하지만 불빛이 눈부시게 빛나는 방 한가운데에 떡하니 놓여져 있는 욕조 안에서 히카리와 모두 벗고 목욕을 같이 한다니...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띵해지는 걸 간신히 참으며 타케루는 다시 입을 열었지만, 조용히 말을 꺼낸 히카리에게 또다시 막히고 말았다. 이 짧은 시간 안에, 벌써 세 번째였다. 


"이렇게 하면 거품도 막 올라오네! 거품 목욕을 늘 해보고 싶었는데-" 


나즈막하지만 뭔가 신나는 듯한 목소리. 그렇지만 타케루는 히카리가 욕조의 가장자리를 비정상적으로 쎄게 쥐고 있음을, 그리고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떨리는 것을 알아차렸다. 다른 사람이라면 그냥 넘어갔을지도 모를 사소한 변화였지만, 타케루는 다른 사람이 아니었다.


말을 먼저 꺼낸 건 히카리였지만, 그녀도 떨리는 게 분명했다.


--


따뜻한 물이 다 차오르고, 넘쳐 흐를것만 같은 거품이 욕조를 뒤덮는데 걸린 시간은 고작 5분이었지만, 두 사람이 걱정 반 기대 반으로 기다리던 시간은 마치 반나절이라도 되는 듯 했다. 


"타케루 군."


아. 나즈막한 히카리의 목소리에 타케루는 이해했다는 듯한 목소리로 몸을 돌렸다. 히카리가 지퍼에 손을 대고 있는걸 봤으니까- 먼저 들어가고 싶은 거겠지. 그러면 나도 일단-


"이것... 좀 도와줄래?"


우뚝. 상의의 지퍼를 내리고 있던 타케루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히카리를 바라보았다. 자신을 돌아본 히카리는 어색한 표정으로 내려가지 않는 지퍼를 가리켰고, 타케루는 그녀를 향해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조심스럽게 힘을 두어번 주자 수월하게 내려가기 시작하는 지퍼. 떨리는 손으로 내리는 지퍼 너머로 히카리의 브라가 보였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보이는 그녀의 얼굴. 자신의 눈을 마주치는 히카리의 반짝이는 눈을 바라보던 타케루는 그녀가 천천히 손을 뻗어 자신의 지퍼를 내려주는 것을 거의 눈치채지 못할 뻔 했다.


거의. 


지퍼를 내려주기 위한 그녀의 몸짓은 히카리의 얼굴을 타케루에게 더 가까이 다가오게 했고, 서로의 숨소리를, 숨결을 느낄 수 있을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타케루는 히카리의, 그리고 히카리는 타케루의 래쉬가드를 조심스럽게 벗겨주었다. 조용한 적막, 하지만 더 이상 어색하지 않은 적막. 조금씩 가빠지는 듯한 숨소리 속에서, 둘은 서로의 눈동자만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적막을 깬건 다름 아닌 수도꼭지에서 떨어진 물방울 소리. 조그마한 소리에도 허겁지겁 놀란 둘은 옷을 마저 벗겠다고 횡설수설해댔고, 재채기를 한 타케루는 그제서야 지금이 추운 저녁임을 깨달았다. 


어서 들어가야지- 라고 생각하며 바지와 속옷을 한꺼번에 내린 타케루는, 히카리가 멍하니 자신의 뒷모습을 보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눈이 마주치고 서로 부끄러운 듯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린 둘. 마치 막 사귀기 시작했던 때로 돌아간 것만 같달까. 


"들, 들어갈께, 히카리 쨩."


부끄러운듯 다시 등을 돌린 히카리에게서 나즈막한 응. 을 들은 타케루는 기다렸다는 듯 바지와 속옷을 옆으로 치우고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거품 아래로 숨겨져 있던 뜨거운 물에 얼굴이 찡그려졌지만, 발부터 천천히- 허벅지를 지나, 배, 가슴, 목까지- 그 뜨거움은 곧 따뜻함이 되어 추위에 떨고 있던 그의 몸 전체로 퍼져나갔다. 


미끄러지듯 기울어지는 몸. 코 바로 밑을 간지럽히는 거품을 느끼며 저도 모르게 깊은 숨을 내쉰 타케루는, 천천히 눈을 뜨다 이내 팬티를 천천히 벗는 히카리의 모습을 보고 막힌 수로가 뚫리듯 날카롭게 숨을 들이마쉬었다.


코와 입을 따라 들어온 뜨거운 물 떄문에 재채기를 하며 기울어진 몸을 벌떡 일으킨 타케루는 히카리를 깜짝 놀라게 하기 충분했고, 후다닥 달려와 기침을 하는 자신에게 손을 뻗으며 괜찮냐고 묻는 히카리를 향해 타케루는 괜찮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자신에게 달려오느라 부끄러움도 순간 잊은 듯한 히카리는, 말문이 막힌듯 자신을 쳐다보는 타케루의 눈빛에서야 자신이 알몸이라는 것을 깨달은 듯 했다. 허겁지겁 타케루에게서 멀어진 히카리는 조심스레 그의 반대쪽으로 몸을 담구기 시작했고, 그녀를 위해 다리를 접은 타케루는 히카리를 가만히 바라만 보았다.


가만히 서로를 들여다보는 눈동자. 따뜻한 물에 몸을 녹이고 있자니, 부끄러움도, 어색함도 같이 녹아내린걸까. 누가 먼저랄 새도 없이 천천히 서로를 향해 다가간 그들은 어느샌가 물 속에서 서로를 깊게 껴안고 있었다.


--


풀어진 듯 편안한 물 속에서, 히카리는 타케루에게 조용히 머리를 기댔다. 다리를 쭉 펴고 있는 타케루의 사이에 앉아, 등을 그의 배와 가슴쪽에 대고 있던 그녀는 반쯤 기울어진 몸을 타케루만으로 의지하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 위에 턱을 조심스레 기대고 있는 타케루의 팔은 그녀의 허리에 휘감겨져 있었고, 목욕을 즐기는 동안 무언가라도 보자는 생각에 틀어놓은 티비는 무언가 시끄러운 예능으로 어두워진 방을 밝히고 있었지만 둘 중 어느 누구도 관심을 주진 않는 듯 했다.


가끔 서로를 바라보며 짧은 키스를 나누는 것 말고는 조용히 서로에게 기대어 노곤해진 몸을 조용히 풀고 있던 둘. 이렇게 피로를 풀고 씻으면 다 되겠지, 라고 타케루는 생각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그의 계획을 완전히 엇나가게 한 장본인은 바로 그였다.


자신을 조심스레 올려다보는 히카리를 보며 미소지은 타케루가 고개를 숙여 서로의 입술을 맞추려는 순간, 아무생각 없이 올라온 그의 손이 향한 곳은 다름아닌- 히카리의 가슴. 움찔- 하는 히카리의 몸짓에 화들짝 놀라 손도, 입술도 떼어버렸지만, 히카리는 그의 뒷통수를 붙잡고 타케루의 입술을 다시 끌어당겼다.


마침내 둘의 입술이, 그리고 얽히고 섥히던 혀가 떨어졌을때, 그녀는 천천히 몸을 돌려 타케루를 마주보았다. 타케루를 욕조 벽으로 더욱 더 밀어붙이며 다시 그의 입술을 탐한 그녀의 손은 가슴에서부터 미끄러져 자신이 기대고 있던 덕에 오므라지지 않은 그의 다리 사이로 향했고, 이미 단단해진 그의 물건을 조심스럽게 쥐었다.


입술을 떼고, 다시 히카리와 타케루는 서로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이미 티비에서 들리는 소리는 저 멀리 있는 듯 희미하게 들릴 뿐이었고,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지만 둘은 이미 서로가 서로를 원함을 알고 있었다.


히카리의 손이 천천히 위아래로 움직이고, 타케루의 손 또한 그녀의 가슴을 지나 엉덩이로, 그리고 그녀의 다리 사이로 훑어내려가는 동안, 그들은 무언의 욕망을 눈빛으로 교환했다.


지금 여기서?

지금 여기서.


묶여있던 사슬이 풀리듯, 서로를 탐하는 듯한 손길이 온몸을 훑었고, 거칠어진 숨은 더 거칠게 타케루 위에서 움직이는 히카리와 그런 그녀를 어루만지는 타케루의 신음소리가 되어 울려퍼졌다. 첨벙, 첨벙하며 흘러넘치는 목욕물처럼, 그들의 사랑도 계속 흘러넘치는 것만 같았다.


어쩌면 당연하게도, 예상보다 오래, 그리고 격렬해진 목욕은 피로를 풀어주기는 커녕 두 연인을 더 피곤하게만 만들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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