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야마 - 눈치게임
2017년 6월 25일


"아- 아- 아프다니까!"


"가만히 좀 있어, 임마, 약을 못 바르겠잖아!"


시퍼렇게 들은 멍부터, 여기저기 찢긴 듯한 상처에,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는 듯 남아있는 흉터들까지- 오늘밤도 야가미 타이치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도대체 어디서 뭘 하길래 이렇게 싸움을 하고 다니는건지. 타이치의 상처에 약을 발라주고 있던 이시다 야마토는, 자신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실실 웃고만 있는 타이치를 향해 차가운 눈빛만을 보냈다.


"뽀뽀라도 해주면 나을 거 같은데."


"헛소리 하지마라, 야가미."


히잉- 하며 얼굴을 찡그리는 타이치를 보며 한숨을 내쉰 야마토는, 약 뚜껑을 닫고 천천히 일어나며 짧게, 하지만 분명하게 타이치에게 입을 맞췄다. 이래야 내 남자친구지! 라고 하는듯한 타이치의 의기양양한 표정을 애써 무시하며 일어난 야마토는, 돌연 허벅지에 찌를듯한 통증을 느끼고는 그만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야마토! 라며 달려온 타이치에게 야마토는 애써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으나, 타이치는 이미 야마토를 반쯤 눕히고 바지를 걷어올리고 있었다. 무언가에 깊게 찔린듯한 상처- 대충 감은 듯한 붕대가 이미 새빨갛게 변해있을만큼 깊은 상처였다. 


이 상처는 도대체 또 어디서 난거야? 라고 묻는 타이치의 낮은 목소리. 그의 추궁하는 듯한 눈빛을 회피한 야마토는 학교에서 의자가 부서지는 바람에 나뭇조각에 찔려버렸다고 웅얼댔다. 그럼 양호실은 왜 안 갔어? 갔었어, 붕대 안 보이냐. 세상 어떤 의사가 붕대를 이렇게 그지같이 감냐? 그건...


"그러는 너는 도대체 그딴 상처를 어디서 얻어 온건데?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화제를 돌린 야마토의 말이 정곡을 찔렀는지, 조금 전까지 야마토를 노려보던 타이치의 눈빛은 갑자기 당황과 초조함으로 가득찼다. 아무리 다른 대학이라고 하지만 말야, 내가 없다고 이상한 애들이랑 어울리는 거 아냐? 그런 거 아냐. 누구랑 주먹다짐하는 게 아니라면 왜 이렇게 다치는데? 아니 그게, 주차장에서 차에 치였는데... 


말도 안되는 변명들. 헛소리도 작작 해야지 이 녀석을 그만 걱정할텐데. 타이치가 분명히 질이 안 좋은 녀석들과 계속 엮이고 있음을 야마토는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매일 저렇게 상처를 얻어올리가 없지. 매번 계단에서 미끄러졌다느니, 차에 치였다느니, 돌에 걸려 넘어졌다느니- 웃기고 자빠졌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야마토 자신도 자신이 타이치에게 변명이랍시고 하는 말들이 타이치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고 있음은 뻔한 일이었다. 하지만 타이치, 그 녀석에게 자신의 본업을 알려줄 수는 없었다. 이 도시를 활보하는 슈퍼 빌런, 가루루맨! 설령 타이치가 그 지명수배범 가루루맨의 남자친구인게 알려지기라도 했다간, 히어로 녀석들이 무슨 짓을 벌일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특히 그 녀석. 이 상처도 다 그 녀석 때문인데...


빌어먹을 워그레이맨.



***



타이치는 더 이상 야마토를 믿을 수 없었다.


타이치 자신도 자신의 바보같은 변명이 누구나 꿰뚫어 볼만한 거짓말임을 뻔히 알고 있었지만,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남자친구에게 자신이 맨날 자는 척 하며 창문을 통해 빠져나가 이 도시를 지키는 정의의 용사 워그레이맨임을 알려줄 순 없지 않는가!


그렇지만 야마토 녀석은 달랐다. 분명히 야마토는 무언가 말할 수 없는 비밀을 숨기고 있는게 분명했다. 그렇기 때문에, 타이치는 오늘 야마토의 대학에 놀러온 척 하며 남자친구를 피해 숨었다. 오늘이야말로 그 녀석이 뭘 하느라 그렇게 상처를 얻어대는지 알아낼 참이었다.


"그래서 내가 거짓말을-"


저기 있다. 이시다 야마토. 자신의 밴드부원들과 뭔가 신나게 떠드는 것을 들은 타이치는, 거짓말이라는 말에 자신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아하, 내 얘기를 하고 있는게 분명했-


"빌런이다!"


쾅! 하는 굉음과 함께 연기에 휩싸인 학교 앞. 눈 뜨기도 힘든 연기와 사람들의 비명 소리를 피해 타이치는 야마토가 조금 전까지 있던 곳에 도달했지만, 보이는 건 그의 밴드부원들 뿐이었다. 야마토가 혹시 잡혀간 건 아닐까? 불안해진 타이치는, 멀리 보이는 공중화장실을 향해 달렸다. 변신해야만 해-


"너는?!"


멈칫. 공중화장실 문 앞에서 마주친 것은 다름 아닌 타이치의 적수, 가루루맨이었다. 펄럭이는 푸른 망토, 어설프게 머리를 구겨넣은 듯, 금색 머리가 삐죽빼죽 튀어나와 있는 마스크. 게다가, 손에 들고 있는 익숙한 기타 케이스까지... 


설마...


"너 이 새끼, 야마토에게 무슨 짓을 한거야!"


자신의 앞에 있는 것이 빌런이라는 것도 잊은 채 타이치는 소리를 바락바락 지르기 시작했다. 당황한 듯, 가루루맨은 기타 케이스를 던지-려다 조심스럽게 옆에 두고는, 학교에 나타났다는 빌런이 자신이 아님을 열심히 어필하기 시작했다.


"나는 데블맨이랑 관련 없어! 그저 너희같은 선량한 시민이 다치게 하지 않기 위해 온 것 뿐이다!"


그런 말을 믿을쏘냐. 가루루맨 자신도 타이치가 그런 말을 믿을 사람이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이렇게 정의감 넘치는 남자친구였기에 말을 할 수 없었던 건데- 그렇지만 야마토가 생각을 끝내기도 전에, 타이치는 그를 밀치고 이미 화장실 안으로 뛰어 들어가고 있었다. 아차-


쾅. 또다시 들려오는 굉음에 잠시 몸을 숙인 야마토는, 자욱한 안개 속에서 닫혀버린 문을 더듬어 열었다. 그 때, 갑자기 변기 문을 박차고 뛰쳐나온 것은...


워그레이맨?


"방금까지 여기 있던 학생에게는 무슨 짓을 했지, 워그레이맨?"


워그레이맨이 뭐라고 말했지만, 야마토는 듣고 있지 않았다. 타이치를 찾아야 했다. 순간 워그레이맨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본 가루루맨은, 당장 변기 쪽을 향했다. 쾅. 쾅. 문을, 벽을 하나하나 부숴봐도 보이지 않는 사람- 대신, 그가 본 것은 조금 전 워그레이맨이 나온 곳에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는 교복이었다.


"하, 하하! 그 학생이라면 내가 이미 너에게서 멀리 피신시켜 놓았지!"


"그렇다면 왜 여기 그 녀석의 옷가지가 버려져 있는거지?"


"옷- 옷이 젖었다고 하길래 벗는 걸 도와줬- 아니, 이게 아닌데, 그, 아니,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냐, 빌런! 오늘이야말로 끝장을 내자!"


무작정 달려오는 워그레이맨의 공격을 막을 새도 없이, 야마토는 그의 발길질을 허벅지로 간신히 막는 데에 그쳤다. 하지만 바로 어제 타이치가 붕대를 감아줬던 그 허벅지의 상처- 그 상처가 다시 터진 듯, 가루루맨의 파란 바지가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걸 워그레이맨이 알아채지 못할리가 없었다. 자신이 아직 타이치로써 가루루맨을 마주보았을 때 그의 눈동자에서 봤던 당황스러움- 어쩌면 가루루맨은 정말 학생들을 도와주러 온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다면 야마토는? 야마토... 그러고 보니, 야마토도 오른쪽 허벅지에 상처가 있었는데...


가루루맨에게도 야마토와 정확히 같은 곳에 상처라니. 

이것은 필히...


"약점이다!!!"



***



타이치의 방. 타이치와 야마토는 가만히 앉아 서로를 노려만 보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걷어 차여진 듯 더 깊어진 야마토의 허벅지 상처와 분명히 무언가 날카로운 것에 찢기기 직전이었던 듯 긁혀있는 타이치의 눈가. 양쪽 다 서로의 상처에 대해 한창 말싸움을 끝낸 참이었다.


히어로가 되는 게 꿈이어서 빌런과 일 대 일로 맞붙었다는 야마토나, 지각을 해서 철조망을 넘다가 360도 굴러 얼굴을 찔렸다는 타이치나. 헛소리 경연대회도 아니고, 무슨.


"그... 래서, 히어로가 꿈이라고? 그런 말은 한번도 안해줬잖아."


침묵을 먼저 깬 타이치의 말에 야마토는 순간 몸을 움찔했다. 마른 침을 삼키며 입술을 핥는 야마토의 얼굴을 바라보던 타이치는, 그가 뭐가 숨기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바른 대로 말해. 라는 타이치의 나즈막한 목소리에 야마토는 다시금 몸을 움찔하고야 말았다.


이럴 때만 눈치가 좋아요, 빌어먹을.


"실은 내가 위험했을 때 날 구해준 게 빌런이었거든. 가루루맨. 그렇게 나쁜 녀석은 아닌가 봐. 솔직히, 그 흘러내리듯 매끄러운 금발에 탄탄한 몸매도 그렇고, 마스크를 끼고 있지만 꽤 잘생기지 않았어?"


이왕 거짓말을 할 거면 끝까지, 하지만 조금의 진실을 섞어서. 늘 속내를 알 수 없이 웃기만 하는 동생 타케루가 알려준 방법이었다. 물론 자기 자신을 저렇게 칭찬하는 건 좀 부끄러웠지만...


"뭐? 야, 다른 빌런도 아니고, 그 후줄근한 코스튬에 덜떨어지게 생긴 눈매에 바보같이 웃어대는 그 가루루맨?"


...이게 정말- 아니, 아니다. 이 녀석은 지금 그냥 질투하고 있는거야. 진정하고-


"빌런은 아니지만 잘생긴 걸 논하려면 역시 잇몸 미소로 모두를 빠지게 만드는 워그레이맨 아니겠냐."


-와 씨 아주 지랄을 하네 진짜!


"야, 어떻게 보는 눈이 없어도 그렇게 없냐? 그 잘난체하는 태도에 몸서리치게 만드는 피부에..."

"언제는 나같은 구릿빛 피부가 너무 좋다며?! 그리고, 그렇게 치면 가루루맨 놈은 너무 허얘서..."

"그놈 피부는 너랑 다르게 다 말라 비틀어졌다고! 애초에, 가루루맨의 쿨함에 비해서는 말야..."

"찌질함이겠지! 그놈이 그 개같은 하모니카로 야밤에 모두의 귓청만 테러해대는데도 걔가 좋아?!"


"아 됐어 그만해!"


씨익- 씨익. 왠지 진 기분. 타이치도, 야마토도 서로 자신의 남자친구가 자기 자신에 대해 저렇게 말하는 걸 듣고 있자니 열불이 올라 미칠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알려줄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내가 바로 그 가루루맨워그레이맨이라고! 눈치 좀 채라, 이 멍청한 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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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octor B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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