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케히카 - 너무 커버린 너

2015년 3월 20일


특별한 사건은, 늘 가장 평범한 날에 찾아오는 법이라 했던가.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어느날- 쨍쨍하게 내리쬐는 햇빛 아래, 한 때 자신의 형제남매가 입었던 것 같은 녹색 교복을 입은 두 아이가 왁자지껄 떠들며 길을 따라가고 있었다. 


그림자 밑에서 울어대는 매미가 알려주듯, 덥디 더운 이 한여름날에 고개를 끄덕이며 키득이던 금발의 아이는, 뜨거운 날씨와 대조되는 그의 사파이어빛 눈을 그의 옆에 있던 학우에게서 떼지 않고 있었다.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던 밝은 갈색 머리를 핀으로 고정한 여자아이 또한, 그녀의 붉은 빛이 감도는 마호가니 색의 눈동자를 그에게서 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여느날과 다를 바 없는 하굣길이었다.

아니,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말이야, 타케루 군—“ 


보랏빛 단발머리를 지닌 아이와 꼭 누군가를 연상시키듯 고글을 쓴 아이의 평범할 듯 평범하지 못했던 축구 경기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던 히카리가, 마침내 키득거림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자연스레 키가 더 큰 타케루의 눈을 마주하려 고개를 위로 들었을 때에는, 늘 그녀를 내려봐주던 강아지처럼 처진 눈 대신, 붉은 벽돌만이 히카리를 마주하고 있을 뿐이었다. 


갑작스레 사라진 그녀의 하굣길 동무의 행방에 당황한 히카리는 그가 어디 숨어있는게 아닐까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골목길 하나 없이 일자로 이어지는 뻥 뚫린 길가에, 사람이— 하물며, 그처럼 키 크고 눈에 잘 띄는 아이가— 숨을 곳은 없어 보였다.


머리를 긁적이며 그의 이름을 외치려던 히카리는, 그제서야 누군가 자신의 옷을 잡아당기고 있음을 깨달았다.


“죄송합니다. 여기가 어디에요?”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고개를 내린 히카리는, 믿을 수 없는 광경과 마주했다.


뒤집어 쓴 초록색 모자. 매치되는 색의 긴팔 셔츠. 그녀가 잘 아는 옷차림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어렸을 때에도 변함없이 빛나는 금발 머리와 호수같은 파란 눈동자.


이건 의심의 여지 없이 그녀가 아는 타케루였다.


“어— 어... 타케루 군?”


“절 아세요?”


몇년 전, 디지털 세계에서 보았던 그 표정을 지으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타케루를 말없이 바라보던 히카리는, 이것이 어쩌면 또다른 나쁜 디지몬의 소행이 아닐까 생각했고, 이게 진짜 타케루인지 시험해보기로 했다. 


“너... 타카이시 타케루 맞지?”


“그런데요?”


“이시다 야마토가 형이고?”


“형아를 아세요?”


“... 파타몬은 어디있니?”


그 질문에 순간 놀란 듯한 표정을 지은 타케루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는 듯, 

끙. 하는 소리와 함께 머리를 긁적이더니, 히카리를 다시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디지털 세계에 있어요. 못 만난지 꽤 된걸요.”


옛날 같았으면 그런 얘기를 하면서 울었을 텐데. 히카리가 생각했다.


“그렇구나.”


“누나도 디지몬에 대해서 알아요?”


“...”


이번엔, 히카리가 적당한 대답을 찾지 못하고 헤맬 차례였다. 이 상황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할지 당황스러웠던 히카리였지만, 곧 현재의 타케루가 여기 없다는 것은, 타케루가 무슨 연유에선지 어려져 버렸다는 뜻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자신이 누구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얘기해야 할까 잠시 고민했지만, 곧이어 솔직한게 좋은 것이라고 얘기하던 어떤 핑크빛 머리의 언니가 생각난 그녀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꼬마 타케루에게 사실을 털어놓기로 결정했다.


“실은 말야 타케루 군, 타케루 군이 어려져 버린 것 같아.”


“에?”


“내가 누군지, 여기가 어딘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


“누나가 누군데요?”


“내가 히카리야. 중학생이 된 야가미 히카리.”


“에에엣? 히— 히카리? ... 누나?”


어정쩡하게 뒤에 존칭을 붙이는 타케루를 보며 히카리가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그러면, 히카리... 누나, 파타몬은 잘 지내?”


“그럼, 잘 지내지.”


“테이르몬도?”


“물론.”


“누나도?”


“그럼, 잘 지내지.”


“누난 나 없이도 잘 지내?”


“응? 무슨 소리야, 타케—“


“난 아니야.”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끊은 타케루를 바라보던 히카리는, 그제서야 그들의 첫번째 여행이 끝났을 때를 기억해냈다. 그래, 타케루는 첫 모험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아 오다이바에서 떨어진 곳으로 이사를 갔었다— 초등학교 5학년이 되어 다시 만나 그들의 두번째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 그들은 다시 만나지 못했었었으니.


“난 안 괜찮아.”


타케루가 뾰루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렇게나 솔직하고 귀여울 때도 있었나, 히카리가 새삼스레 기억을 되짚어보며 생각했다. 확실히, 늘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는 지금 그녀의 동갑내기 소꿉친구보다 훨씬 더 순수한 그의 어린 시절이라...


“아냐, 나도 타케루 군을 못 봤었을 때 슬펐었는걸! 그래도 괜찮아, 우리, 곧 다시 만날테니까.”


“정말?”


“그럼. 5학년 때 모두 모여서 디지털 세계에 다시 갔었는 걸.”


“파타몬도 다시 볼 수 있는거야?”


“물론이지.”


“헤에... 그때도 나쁜 디지몬이랑 싸웠어?”


“응, 그랬지.”


“혹시— 혹시 파타몬은...”


타케루가 말끝을 흐렸지만, 히카리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곧 알아차렸다.


“아냐, 아무 일 없었어. 걱정하지 마.”


“다행이다... 누나는 나쁜 일 없었어?”


“음— 5학년 때 어둠의 바다라는 곳으로 끌려갔었지.”


“무서웠어?”


“응, 오빠도, 테이르몬도 없었는걸.”


“혼자는 무서워. “


“그 때 타케루 군이 구하러 와줬었어.”


“헤에—”


“멋지지? 3년 후의 너는.”


조금 전의 찡그린 표정은 어디 갔는지, 3년 후의 자신을 생각하며 싱글벙글 웃고 있는 타케루를 바라보고 있던 히카리가 엄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타케루 군이 이렇게 작아지니까 귀엽다.”


“에에— 누나, 그런 말은—”


“응? 왜, 싫어?”


“당연하지! 이제 다 컸다구!”


“귀여워...”


“아냐... 누나가— 누나가 더 귀여워... 요!”


“귀여워...”


히카리가 키득거리며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진 타케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부끄러운지 고개를 푹 숙이고 꼼지락거리는 자신의 발을 바라보고 있던 타케루가, 화제를 전환하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누나, 중학생의 타케루는 어때?”


“글쎄. 어떨 것 같아?”


“음— 키도 크구! 공부도 잘 하구! 멋있구!”


“하핫. 그래—”


“그리고!”


“그리고?”


“히카리 누나를 좋아하고 있을 거야!”


갑작스런 말에 할말을 잃은 히카리는 타케루를 쳐다만 볼 뿐이었지만, 그렇게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히카리를 올려다본 타케루는, 그러던지 말던지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누나는?”


“으— 응?”


“누나는 내가 제일 좋지?”


타케루의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터져나오는 실소를 참을 수 없었던 히카리는, 대답을 기대하고 있는 타케루를 쳐다보며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 오빠가 좋아.”


자신이 원하는 대답이 아닌 듯, 타케루는 벌떡 일어나더니, “타이치 혀어어어엉아—!” 라고 한참 공부하고 있을 (아니, 어쩌면 야마토 오빠와 놀러갔을지도, 히카리는 생각했다.) 타이치의 이름을 허공에 대고 불렀다.


“왜 그래, 어디 가?”


“타이치 형아한테 갈거야! 누나 미워!”


“푸핫—”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는 타케루였지만, 히카리는 웃음이 터져나오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에이, 장난이야, 타케루 군. 가지 마.”


그리고, 그렇게 중학생 히카리는 어린 일곱 살 타케루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비록 늘 얘기를 나누곤 하지만, 이렇게 마음을 터놓고 얘기한 것이 얼마만일까— 히카리는 생각했다.


“타케루 군.”


“응?”


“타케루 군이 원래대로 돌아오면 조금 섭섭할 것 같은데.”


“왜?”


“글쎄— 귀엽고, 솔직하잖아. 날 좋아해주고.”


“중학생의 나는 아니야?”


히카리는 그 질문에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타케루에겐 뭐랄까, 마음의 장벽이 있는 것만 같았다. 가장 마음 고생이 심할테면서도, 안에서 가장 힘들어할 때에도, 늘 겉으로는 웃고 다른 사람들을 대해주는 그. 그를 그렇게 잘 알았기에 오히려 그의 마음을 가늠할 수 없었던 걸지도 모른다. 타케루의 '진심'을.


“... 잘 모르겠어.”


히카리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


“그렇지 않다니?”


“난 그대로야.”


“타케루 군—”


“중학생이 되서도, 난 그대로일거야.”


“헤에. 하지만 중학생이 된 타케루 군은 예전처럼 자신의 마음을 말해주지 않는 걸.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게 아닐까?”


“아니야!”


“그래?”


“난 언제나 히카리에게 솔직한 걸!”


“에—”


“히카리 누나에겐 마음을 숨기지 않을꺼야!”


히카리는, 아무 말 하지 않고 얼굴에 호선을 그리며 타케루의 머리를 쓰담을 뿐이었다.


“그럼, 약속해줄래?”


“뭘?”


“다시 돌아와서도, 지금 말했던 것처럼, 솔직해지겠다고.”


하늘을 올려다본 히카리가, 갑작스레 부는 바람을 느끼며 말했다. 어려진 타케루와 대화를 나누고 있자니, 더위도, 시간도 모두 망각해버린 것 같았다. 눈쌀을 찡그리게 내려쬐는 햇빛 너머로, 누군가의 푸른 눈을 연상케 하는 하늘을 바라보던 그녀에 귓가에, 마치 멀어져가는 옛 연인의 작별인사같은 흐릿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물론이지, 약속할게! 남아일언중천금인걸.”


“핫. 타케루 군, 그런 말도 알—”


하지만 히카리가 다시 고개를 내렸을 때, 타케루는 자취를 감춰 버린 것 같았다. 데자뷰일까, 마치 이 모든 일의 시작처럼,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 처진 눈 대신, 익숙한 붉은 벽돌만이 그녀를 마주하고 있을 뿐.


“꿈이었을까.”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는 히카리 앞에, 다시, 중학생의 타케루가 나타났다.


“히카리 쨩! 찾고 있었잖아. 갑자기 어디로 사라졌던 거야?”


“다시 돌아왔네.”


“에? 무슨 소리야?”


“... 약속은?”


“무슨 약속?”


“... 아무것도 아냐. 걱정하게 해서 미안. 어서 가자.”


히카리가 쓴웃음을 짓고는, 무릎을 탈탈 털고 가방을 집어들며 말했다.


아무일 없다는 듯이 길을 따라 걸어가는 히카리를, 타케루는 그저 쳐다만 볼 뿐이었다. 원래 같으면 그녀를 따라가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모든게 괜찮은 것인지 물어볼 그였지만, 그녀를 찾아 헤매이느라 흘린듯한 땀에 젖은 금발 머리를 지닌 그 아이는, 왜인지 그 자리에 그저 가만히 서있을 뿐이었다.


입술을 깨물며 멀어져 가는 그녀를 바라보던 타케루가, 입을 열었다.


“잊지 않았어—”


우뚝 멈춰선 히카리의 뒷모습에 대고, 그가 조용히 덧붙였다.


“... 남아일언중천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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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octor B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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