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성/장편'에 해당되는 글 11건

  1. 2017.07.22 23.5 - 한여름, 그대는. by Doctor Box
  2. 2016.02.18 타케히카 - Falling For You by Doctor Box 4
  3. 2016.02.07 타케히카 - Lovemental Up! by Doctor Box
  4. 2016.01.16 디지몬 x 킹스맨 - Roundabout by Doctor Box
  5. 2015.12.30 다이켄카이저 - Psychosis by Doctor Box
  6. 2015.12.03 타케히카 - The Persistence of Memory by Doctor Box 1
  7. 2015.11.15 다이타케 - Lather, Rinse, Repeat by Doctor Box
  8. 2015.11.15 타케히카 - 운명 by Doctor Box
  9. 2015.11.15 켄다이 - 가깝고도 먼 by Doctor Box
  10. 2015.11.15 타케히카 - 너무 커버린 너 by Doctor Box











한여름, 그대는


어느 화창한 여름날— 봄이 언제 왔었냐는 듯, 어느샌가 뙤약볕은 뜨거운 열기를 가득 내리쬐고 있었다. 마치 쑥을 연상시키는 녹색의 교복을 입고 하굣길을 걸어가는 두 남녀는 눈부신 태양 빛에 눈을 찡그렸지만, 쉬지 않고 움직이는 그들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날 줄을 몰랐다.


“그래서 결국 씩씩대는 다이스케 군을 풀어주느라 수학 시간을 다 날려버렸다니깐.”


오뚝한 이목구비의 남자아이가 이마를 간지럽히는 금빛머리를 쓸어 넘기며 오늘의 무용담을 늘어놓자, 색소 옅은 부드러운 갈색 머리를 머리핀으로 고정한 여자아이는 키득거리는 웃음으로 화답했다.


타카이시 타케루와 야가미 히카리— 아주 어렸을 때부터 친한 친구 사이인 이 둘은, 일상 같은 지루한 수업을 마치고 여느 때처럼 같이 집으로 걸어가는 길이었다. 비록 2학년이 되면서 반이 갈렸고, 타케루는 농구부에, 히카리는 신문부에 들어가 시간이 많이 엇갈렸지만, 그런데도 그 둘은 서로와 함께 하교하는 게 너무나도 당연했고, 늘 그래왔듯 서로를 기다리곤 했다.


그리고 오늘도 그렇게 별반 다를 것 없는 하루가 저물어 가고 있는 줄 알았다. 가까이 붙어 걸어가며 흔들리는 타케루의 긴 손가락이, 옆에서 같이 흔들리던 히카리의 손가락과 무심한 듯 닿기 전까진.


갑자기 등줄기를 타고 올라오는 찌릿한 느낌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팔을 확 뺐다. 덩달아 깜짝 놀라 그녀를 쳐다보는 타케루의 눈빛에, 히카리는 그제야 자신이 한 행동을 이해하고 얼굴을 붉혔다.


“히카리 쨩, 왜 그래? 괜찮아?”

“아— 아무것도 아니야. 갑자기 정전기가 일어나서.”


타케루는 히카리의 행동이 무언가 이상함을 눈치 챘지만, 곧이어 어깨를 으쓱하고는 가방에서 하얀 스냅백을 꺼냈다. 옆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모자를 쓰려던 타케루는, 히카리가 또 모자를 쓰냐며 핀잔을 줄 것이라는 생각에 다다랐는지, 움직임을 멈췄다.


히카리는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느라 타케루를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고,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던 타케루는 좋은 생각이라도 난 듯, 장난꾸러기 같은 웃음을 지었다.


푹— 하고 히카리의 머리에 갑자기 씌워진 모자. 깜짝 놀라 자신을 올려다보는 히카리를 보며 타케루는 다정하게 미소 지었다.


“예쁘다.”


그 말에 히카리는 말문이 턱 막혀버린 듯, 어쩔 줄 모르다 곧이어 모자를 더 깊게 눌러썼다. 
그 때문에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없어 히카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던 타케루는, 그녀의 앞에 서서 허리를 숙였다. 모자의 챙을 들어 올리며 그녀의 눈을 마주치려 한 타케루는 입을 열었지만—


“히카리 쨩? 혹시—”


—결국 말을 끝내지 못했다. 눈앞에 갑자기 나타난 타케루를 보고 놀라버린 히카리가, 저도 모르게 그의 옆구리를 꼬집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정말, 오늘 미야코 상 만나러 가는 거 알면서, 내 머리 어쩌려구.”

“아야야야야야— 하하, 미안해, 히카리 쨩.”


울음과 웃음이 섞인 듯한 목소리로 사과하며 크게 웃는 타케루를 보며,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모자는 내가 압수할 거야.”

“엣? 그런 게 어디 있어—?”


눈썹을 치켜세우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히카리. 모자를 머리 위에 살짝 걸친 그녀는, 그의 원망스런 눈길을 재밌다는 듯 쳐다보았다. 아무 일 없다는 듯, 여느 때와 다름없는 장난을 치고 있었지만, 내심 히카리는 왜 자신이 그렇게 깜짝 놀랐는지 고민하고 있었다.


오늘 무언가 자신을 예민하게 한 일이라도 있었는지 곱씹어봐도, 생각나는 것이 없는데— 결국 해답을 찾지 못한 채, 히카리는 옆구리를 쓰다듬는 타케루와 함께 계속 걸었다. 그가 혹시라도 고민하는 자신의 기분을 읽을까, 걸쳐 쓰고 있던 모자 밑으로 자신의 눈을 숨기며.




:::




뜨거운 햇살이 창문을 타고 모두를 환하게 비추는 도서관에서, 야가미 히카리는 책을 꺼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꽤 구석진 곳에 있어 누구한테 도움을 요청하기가 모호한 것도 있었지만, 닿을락 말락 하는 자신의 손가락이 책을 툭툭 건드리기만 하는 것에 오기가 생겼기 때문이기도 했었을 터였다.


그때, 어디선가 불쑥 다른 손이 나타나 책을 잡았다. 결국, 자신이 꺼내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고맙다는 말을 하려 고개를 돌린 순간, 그녀는 익숙한 얼굴을 마주했다. 자신을 웃으며 내려다보고 있는 높은 코와 푸른 눈동자—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파도처럼 하얗게 빛나는 머리— 타카이시 타케루.


“부르지 그랬어.”


웃으며 오래전 졸업한 선배가 남긴 신문부 스크랩북에 쌓인 먼지를 털어낸 타케루는, 히카리에게 책을 건넸다.


“아— 그냥, 혼자 꺼내볼까 해서. 고마워.”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마움을 표시한 그녀는, 얼굴에 큰 호선을 그린 타케루를 올려다보았다— 잠깐, 올려다보았다고?


여태까지 왜 자각하지 못했을까? 어느샌가, 히카리는 타케루를 올려다보고 있었음을. 남자아이들이 원래 더 키가 크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왜인지 히카리는 자신이 타케루와 키가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타케루 군, 언제 그렇게 키가 컸어?”

“응? 무슨 소리야, 난 늘 히카리 쨩보다 컸다구?”

“초등학교 때도 기억 못 하나 보네.”

“물론 기억하지. 5학년 때도 내가 더 컸었잖아.”


웃으며 히카리가 말을 꺼내자, 지지 않겠다는 듯 타케루 또한 얼굴에 호선을 그리는 것으로 화답하며 맞받아쳤다. 히카리는 그때를 말하는 게 아니라며 졌다는 듯 웃어 보였고 타케루 또한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를 지었다. 이윽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타케루의 손은 그녀의 머리를 향했고, 곧이어 그녀의 갈색 머리카락이 그의 손바닥을 간지럽혔다.


“타— 타케루 군?”


자신을 쓰다듬는 손에 당황한 듯 말을 더듬는 히카리와, 그런 그녀를 보고 되려 본인이 놀랐다는 듯 손을 멈칫했지만 이내 다시 웃는 타케루. 타케루가 히카리의 머리를 쓰다듬는 일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히카리는 타케루에게서 자신의 오빠인 타이치를 보곤 했었다. 마치 타이치가 그녀를 쓰다듬어줄 때처럼.


그렇지만 지금은 아냐. 자신을 마주 보며 쓰다듬어주는 타케루에게는 그 누구도 겹쳐 보이지 않았다.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환한 미소를 짓는 그의 바다 같은 푸른 눈동자가, 자기주장을 그녀에게 강력하게 펼치고 있었다— 타카이시 타케루라는 존재를. 그리고 그런 그에게 반응하듯, 무언가 찌릿한 감각이 그의 손으로부터 그녀를 감싸 내려갔다.


“그래도 지금은 내가 크니까—”

“타케루 군!”


타케루가 웃으며 말을 이어가려던 그 순간, 책장 뒤에서 검은 머리의 여자아이가 쑥 튀어나왔다. 그녀는 친한 듯 타케루의 팔을 아무렇지도 않게 잡았지만, 타케루는 재빠르게 그 팔을 빼내고는 무슨 용건이냐는 듯 눈썹을 치켜세웠다.


“모모가 빨리 오라고 부르는 걸!”


타케루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쉬이 발길을 돌릴 생각은 하지 않고 있는 듯했다. 이만 가볼게, 라는 한 마디와 함께 책장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도, 그의 눈길은 계속 히카리를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한 듯, 히카리는 그저 조심스레 그가 흩트려 놓은 머리카락을 다듬을 뿐이었다. 아무리 머리를 만져보아도 아까 같은 찌릿함은 느낄 수 없었다— 정전기라도 되었는지, 뭐였는지 알 순 없었지만, 곧 히카리는 그런 생각을 떨쳐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시계를 쳐다보고는 깜짝 놀란 히카리는, 그제야 빠르게 도서관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바로 두 명의 여자아이와 앉아 웃으며 떠들고 있는 타케루였다. 이상할 것은 없었다— 그는 늘 친절한 아이였다. 그 외모와 친절한 성품으로, 모두에게 인기 있는 아이— 그런데도, 그 누구 하나 소홀히 대하지 않는 아이. 하지만, 저 둘과 대화를 나누는 타케루가 오늘따라 왜 이리 행복해 보이는지.


‘무척 친한 아이들인가 보네.’


저도 모르게 씁쓸한 미소가 지어지는 것을 히카리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저, 무의식적으로 머리를 계속 어루만지며,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떴을 뿐.




:::




“쪄 죽겠다니깐, 정말.”


방과 후, 뜨겁게 내리쬐는 햇볕을 피해 학교 뒤쪽 벤치에 걸터앉은 타케루가 자신에게 부채질을 해주는 히카리를 보며 기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운동하다 나오니 더 그렇지, 라며 타케루에게 물을 건넨 히카리는 그가 그 자리에서 한 병을 모두 마셔버리는 것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늘 운동을 하곤 덥다며 집을 박차고 들어와 반쯤 풀어진 교복으로 물을 들이켜던 또 한 사람이 문득 떠오른 히카리는, 희미한 미소로 자신 쪽을 쳐다보던 타케루를 보며 입을 열었다.


“타케루 군, 이렇게 보니 정말 우리 오빠 같네.”


히카리는 순간 타케루의 얼굴에서 미소가 장맛비에 씻겨나가듯 사라지는 걸 본 것 같았지만, 눈을 깜빡였을 때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웃고 있었다.


“내가 타이치 상을 닮았어?”


머리를 긁적이며 자신에게 묻는 타케루의 눈빛에는, 진지함이 언뜻 숨겨져 있는 것 같았다. 그냥, 운동하는 거나 물 마시는 거나 여러모로 오빠가 생각나서— 라는 웅얼거리는 듯한 대답. 돌아온 건 가족 같고? 라고 무심한 듯 덧붙이는 타케루의 한 마디였다.


뭐, 그런 걸려나. 어깨를 으쓱인 히카리의 대답에 만족하지 못했는지, 고개를 꺾고 고민하는 표정을 짓던 타케루는 곧이어 다시 얼굴에 호선을 그렸다. 타케루의 그 표정,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기도—


“왜 그래, 타케루 군?”


타케루가 내심 대답을 해주길 바랐지만, 역시 그는 별 일 아니라는 듯 손사래를 칠 뿐이었다. 곧 그들의 대화는 다른 화제를 향해 달렸지만, 히카리는 그제야 그들이 어렸을 적 타케루가 자신에게 화를 냈던 것을 기억해냈다.


‘언제까지 타이치 상 타령만 할 거야?'


이번에도 비슷한 맥락이었을까? 그렇지만 그녀는 아직도 타케루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처음엔 자신이 타이치에게 너무 의존한다고 생각한 것이겠거니 했지만, 그렇다면 그는 왜 오늘도 굳은 표정을 지은 것인가?


히카리가 다시 시선을 돌렸을 때,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당연하게도 타케루였다. 하지만 당연하지 않아— 마치 도서관에서 있었던 일이 머릿속에서 재생되는 것처럼, 자신을 다시 바라보는 그의 모습에게서 히카리는 타이치가 아닌 타케루만을 보았다. 어쩌면, 이제야 말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그래, 넌 타이치 오빠와는 달라, 타케루 군.




:::




학교가 끝나가는 것을 암시하듯, 붉게 타오르는 태양은 높이 솟은 산 뒤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나무의 그림자 밑에 자리를 잡고, 흔들리는 나뭇잎들 사이로 비추는 햇빛을 바라보고 있던 야가미 히카리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다름 아닌 그녀의 친구 타카이시 타케루였다.


“자, 히카리 쨩.”


입에는 푸른 소다 맛 하드를 물고, 그녀가 좋아하는 편의점 아이스크림을 건넨 그는 곧이어 그녀의 옆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하아, 오늘 진짜 덥네.”


능숙하게 아이스크림을 뜯고, 숟가락으로 크게 푼 한 입을 입에 털어 넣은 히카리는 타케루의 말에 공감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를 찡하고 울리는 차가운 단맛이 혀에서 살살 녹는 그 느낌. 뜨겁다고 아우성치는 몸에 퍼지는 냉기에 히카리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고마워, 타케루 군. 타케루 군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 했네.”

“대신 나중에 나도 사주는 거다?”


하드를 베어 먹으며 자신의 말을 맞받아치는 타케루를 보며, 히카리는 미소를 지었다. 땀 때문인지, 습기 때문인지, 살짝 촉촉하게 젖은 그의 머리는 저번 주의 농구 경기를 연상케 했다.


늘 타케루를 응원하기 위해 농구 경기를 참관하던 히카리였지만, 저번 주만큼은 달랐다. 다름 아닌 다른 학교와의 결승전— 이번에는 친구로써가 아닌, 신문부의 기자로서 방청석에 앉아있던 그녀는, 타케루의 이름을 외칠 새도 없이 경기 장면을 사진으로 남기기에 급급했었다.


치열한 접전. 비록 아주 간발의 차였지만, 경기 종료 직전 타케루와 다른 팀원들의 훌륭한 연계 덕에 오다이바 중학교는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다ㅡ 그리고, 쉴 새 없이 셔터를 누르던 히카리의 입가에도 환한 미소가 번졌다.


늘 그랬듯 다른 친구들과 함께 타케루를 축하해주고, 방송실로 돌아간 그녀는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마주했다— 100장이 넘는 사진 중에 무려 80장 가까이가 타케루의 사진이라니. 공을 드리블하는 사진, 패스하는 사진, 슛하는 사진……. 심지어 마지막 연계마저, 슛을 넣은 팀원이 아닌 공을 패스하는 타케루가 찍혀있었다.


히카리는 그 사진들을 걸러내며 간신히 편집을 해내는 데 성공했지만, 그래도 학교 신문의 1면에 실린 것은 결국 타케루의 사진이었다. 그래도 여전히 그녀에게 남아있는 한 가지 의문. 80장에 다다르는 타케루의 사진들. 결국, 신문 1면에 실린 그의 사진. 왜 그랬던 것일까? 혹시—


찌잉—


그때를 곰곰이 생각하던 히카리는, 생각에 빠져 자신이 얼마나 많은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지를 자각하지 못한 듯했다. 파도처럼 몰려오는 차가운 두통에 그녀는 얼굴을 찡그렸고, 밀려온 파도가 빠져나가듯 그녀의 생각 또한 빠르게 머릿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 이후로, 히카리는 그저 타케루와 소소한 얘기를 나누며 아이스크림만을 먹었다.


컵에 든 아이스크림이 점점 줄어들수록 가장 밑에 보이는 브라우니. 히카리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었다.


마침내 녹아내리는 차가운 아이스크림들이 다 없어지고 마지막 남은 달달한 브라우니를 퍼 올렸을 때, 그녀는 왜인지 다시 농구 경기를— 타케루를— 생각하고 있었다. 왜 생각난 것일까?

가장 깊은 곳에 깔린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려면 그 위에 쌓여있는 다른 것들을 걷어내야 하는 법. 친구로서의 그들의 관계와 그들이 나눈 추억들을 모두 밀어놓고 나면, 히카리는 타케루에게 과연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이 아이스크림처럼, 위에 쌓여있는 것들이 모두 녹아 사라지면, 남는 것은 결국 한 조각 브라우니.


히카리가 가장 좋아하는 브라우니처럼 가장 단순한 감정.

히카리가 가장 좋아하는—?


“그럼 어머니 오시기 전에 그만 가봐야겠다, 히카리 쨩.”


먼저 천천히 일어나는 타케루를 보며, 히카리의 생각은 다시금 결론에 다다르지 못했다. 작별 인사를 하고, 자신에게 손을 흔드는 타케루가 골목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다, 히카리는 들고 있던 아이스크림 컵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직도 컵에는 브라우니가 남아있었다— 그녀가 브라우니를 남긴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평소 같으면 스스럼없이 먹었을 그것을, 퍼 올리다 말고 멈춰버린 채였다.


땅거미가 가라앉는 하늘을 바라보며, 히카리는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다른 모든 것을 걷어내고 보면, 과연 자신에게 타케루는 어떤 존재인지를 고민하며.




:::




따뜻한 토요일 아침, 야가미 히카리는 침대에 멍하니 누워있었다. 약속 시각은 3시였다— 조금은 늦잠을 자도 괜찮을 그런 주말이었지만, 히카리는 왜인지 새벽부터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고 있었다. 알람이 울리기만을 기다리며, 그녀는 그렇게 천장만을 바라보았다.


“히카리, 언제까지 누워만 있을 거야?”


자신의 허벅지를 쿡쿡 찌르며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을 때, 히카리는 자신의 파트너인 테이르몬을 발견했다. 부모님도 약속이 있어 나가시고, 오빠와 아구몬은 축구를 하러 가버린 만큼, 히카리 없인 놀 상대가 기껏해야 실 뭉치밖에 없던 테이르몬이 심심해하는 것도 당연하였을지도.


“빨리 타케루랑 파타몬 만나러 가자—”


테이르몬의 애교 아닌 애교에 미소를 지으며 일어난 히카리는, 테이르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빌려줬던 책도 돌려받고, 밥도 먹고, 시험공부도 같이 할 겸 타케루와 약속을 잡은 것이 엊그제— 늘 같은 일상이지만, 많은 생각 속에 히카리는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샤워를 하며, 이를 닦으며, 옷을 입으며 생각해봐도 쉽사리 결론지어지지 않는 생각. 히카리는 뚱한 표정으로 시리얼이 담긴 그릇을 휘적였다.


“히카리, 무슨 일 있어?”

“아무것도 아냐, 테이르몬.”


테이르몬에게 웃어 보이며 먹은 그릇을 설거지하는 히카리.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긴 했지만, 그녀에게는 확실히 고민이 있었다— 다름 아닌, 타카이시 타케루에 대한.


그는 확실히 그녀의 친구였다. 둘은 남들이 하지 못할 경험을 함께 공유해왔고, 그만큼 많은 시간을 함께했다. 그런 타케루는 과연 히카리에게 있어서 그저 친구인 걸까? 아니면 그 이상인 걸까?


그 이상이란 건 무슨 감정일까? 늘 특별한 사람이 없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히카리는 자신의 오빠인 타이치를 언급하곤 했었다. 물론 그 질문의 특별한 사람이란 그런 의미가 아니겠지, 히카리는 생각했다. 미야코가 좋아하는 사람 있냐고 물어본 건데 타이치 얘기 좀 그만 하라며 핀잔을 준 적도 있었으니 말이다.


타케루를 좋아하냐는 질문도 많이 받았었다. 그래, 히카리는 확실히 타케루를 좋아했다— 어쩌면 단순한 친구 이상으로써. 그렇지만 그가 남자로 보이냐 묻는다면— 글쎄. 둘이 사귀냐며 사람들이 장난기 섞인 말을 할 때마다, 히카리는 손사래를 치곤했었다. 둘은 친구였으니까. 그 이상은 아니라고 다른 사람에게 말하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에게도 얘기해왔었으니까.


철퍽—


“앗!”


생각에 푹 빠져 싱크대에서 물이 흘러넘치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히카리는, 허겁지겁 물을 잠그고 바닥을 닦았다. 걱정되는 듯한 눈빛의 테이르몬에게 괜찮다는 손짓을 하고, 그녀는 타케루를 만날 준비를 했다.


집을 나서며, 히카리는 타케루에 대한 생각을 떨쳐내려 애썼다. 설사 그를 좋아하더라도, 관계를 더 발전시키려다가 잘 풀리지 않아 깨지기라도 한다면? 그녀는 타케루가 없는 일상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위험한 외줄 타기를 하는 것보다, 튼튼한 친구로써의 관계가 훨씬 더 나았다. 최소한, 이 상태로는 그를 잃지 않을 테니까.


“타케루다!”


테이르몬의 말에 고개를 든 히카리는, 저 멀리서 비니를 쓰고 있는 타케루를 발견했다. 쓱 주위를 둘러보자, 아니나 다를까, 타케루 옆의 나무 위에서 주황색의 포동포동한 무언가가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그의 이름을 부르려 하는 순간, 히카리는 건물에 가려 보이지 않던 또 다른 사람을 발견했다. 타케루와 꽤 친한 듯이 보였던 여자아이. 얼핏 기억날 듯 말 듯한 이름— 아, 그래, 모모.


달려가려는 테이르몬의 입을 막고, 히카리는 둘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엿듣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왜인지 그녀는 타케루와 모모의 이야기가 너무나도 궁금했다.


“… 그래서 걔가 오기 전까진 혼자라는 거네?”


충분히 가까이 가자 들리는 모모의 목소리. 히카리는 그녀가 자신을 지칭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응, 뭐. 곧 올 거지만. 그래서 꼭 하고 싶다는 말이 뭐야?”


상냥한 미소로 그녀에게 답하는 타케루. 히카리는 나무 뒤에서 그런 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행복해 보이고, 친절해 보이는 그의 목소리에, 히카리는 저도 모르게 얼굴에 호선을—


“오랫동안 좋아해 왔어, 타카이시— 아니, 타케루 군. 사귀지 않을래?”


그 순간, 히카리의 미소도, 이 세상 다른 모든 것도, 순간 얼음이 된 듯 멈춰버렸다. 많은 것들이 머릿속에서 스쳐 지나가는 그 순간, 얼음을 산산이 부숴버린 것은 타케루의 대답이었다.


“그래, 그러자.”


환하게 웃는 타케루를 보며, 히카리는 온 세상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탸케루에 대한 자신의 감정도, 친구 사이가 더 나을 것이라는 생각도 마치 이젠 모두 소용이 없는 듯 소용돌이 속에서 잊혀졌다.


타케루가 마냥 그녀의 친구에 불과했다면, 이런 기분이 될 리가 없었다. 그렇지만— 히카리가 자신의 감정을 알아차렸다 한들, 이미 기회는 오래전에 놓친 후였다.


“앗— 히카리 쨩!”


히카리가 고민하는 사이에 모모와 행복한 표정으로 무언가 이야기를 하던 타케루는, 곧이어 히카리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지만, 고개를 푹 숙인 히카리는 곧이어 반대쪽으로 열심히 달리기 시작했다.


“히카리 쨩?”


타케루가 외쳤지만, 그의 목소리는 그녀에게 닿지 않았다. 히카리가 뛰는 방향은 그녀의 집도 아니었다. 당황한 테이르몬을 품 안에 꽉 안고, 히카리는 무작정 달렸다. 자신의 죄책감에게서, 후회에게서, 질투에게서—


타케루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




그 후로, 히카리는 타케루를 피해 다녔다. 시험공부도 혼자 하고, 타케루와 마주치지 않기 위해 학교도 다른 길로 돌아갔다. 가끔 마주칠 때면, 타케루는 걱정스러운 말투로 히카리에게 뭐라 말하려 입을 열었지만 히카리는 그저 미안, 타케루 군. 이라는 짧은 말만 남기고 그에게서 멀어져갈 뿐이었다.


그때 도망쳐 버렸던 사건이 있고 난 뒤 타케루와 편히 대화하는 것 자체가 왜인지 불편해진 히카리였지만,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바로 그에게 딱 붙어있는 모모의 존재였다. 늘 팔짱을 끼거나, 타케루에게 기대고 있는 모모를 볼 때마다, 히카리는 씁쓸함만을 느꼈으니까.


솔직히, 아직도 히카리는 자신이 타케루를 좋아하는 것이 맞는지 알지 못했다. 어쩌면 그저 모모가 타케루와 더 많이 시간을 보내는 것에 질투를 느끼는 것일지도 몰랐다. 아이러니하게도, 결국 마음의 정리도, 관계의 발전도 하지 못했음에도 히카리 자신의 걱정대로 그녀는 타케루와 예전 같은 친구 사이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건 그녀 자신의 탓이지, 타케루의 탓은 아니었다. 소꿉친구가 처음으로 애인을 사귀었는데, 축하는 해주지 못할망정 자신의 아니꼬운 감정에 휘말려서 그를 차갑게 대하는 꼴이라니. 이 얼마나 한심한가?


그런 서먹서먹한 관계가 된 지 몇 주가 지났을까. 쨍하게 내리쬐던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저녁, 부 활동을 마치고 집으로 걸어가던 히카리는 얼핏 타케루의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골목 너머에서, 모모가 타케루에게 뭐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타케루는 그런 그녀에게 소리치거나 하진 않았지만, 확실히 딱딱한 얼굴로 맞받아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싸우는 것일까? 무슨 연유로 다투는 것인지 호기심이 동했지만, 히카리는 곧이어 그냥 발길을 돌렸다. 무슨 일인지 내일 타케루 군에게 물어보면 되겠지— 라는 생각이 얼핏 들었지만, 히카리는 타케루와 제대로 된 아침 인사도 한 지 너무나 오래되었다는 차가운 벽에 다시금 부딪혔다.


그와 행복도, 고민도 모두 나누던 것이 너무 당연한 일이었었던 그 시절이 그리웠던 것이었을까. 그저 씁쓸한 미소를 지은 히카리는, 하늘을 붉게 물들이면서 산 뒤로 사라지는 태양을 바라보았다.


사라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따뜻함을 건네주는 태양. 그런 태양에서, 묘하게 히카리는 타케루의 미소를 겹쳐 보았다. 그 눈부신 태양과 늘 엮었던 타이치 대신 보이는 타케루의 빛. 그제야, 히카리는 그가 알게 모르게 은은히 자신을 비춰주고 있었음을, 늘 자신을 밝혀주고 있었음을, 그가 있었기에 이렇게 자신이 빛날 수 있었음을— 자신이 그의 태양 같은 빛을, 타케루를 얼마나 좋아했는지를 보았다.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는데 왜 이렇게 오래 걸린 걸까? 난 우리 사이가 변할까 봐 두려웠나 봐, 히카리는 뉘엿뉘엿한 태양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네가 변할까 봐, 내가 변할까 봐— 아냐. 그래. 난 우리가 변하지 않을까 두려운 거였어.


그 결론에 다다르자, 히카리는 푹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자신의 감정을 감추고 있었던 것에는 그런 두려움이 있었나 보다— 매일매일, 하루하루, 그들이 커가고 바뀌어 가도, 자신들의 관계는 더는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 그랬기에 꽁꽁 싸매고 있었는가 보다. 좋아한다는 것을. 오래전부터 타케루를 이성으로 보고 있었다는 것을.


다시 고개를 든 히카리 앞에는, 태양이 마지막 빛을 내뿜으며 산 너머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 붉은빛이 사라진 하늘에는 적막이 가득한 어둠만이 깔렸고, 그녀는 그런 밤하늘처럼 자신이 이미 늦었음을 알았다.




:::




“자, 마지막으로. 방학이랍시고 끝나자마자 삼삼오오 놀러 가지 말고, 폭우주의보가 내렸으니까 다들 바로 집으로 돌아가도록. 알겠지? 그럼, 좋은 방학 보내라!”


드르륵—


아이들이 모두 빠져나간 텅 빈 교실을 마지막으로 한 번 돌아본 히카리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 마지막 날이니만큼, 늘 그랬듯 이 교실 밖에 타케루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하는 욕심을 품었지만, 그곳에는 텅 빈 복도만이 그녀를 마주할 뿐이었다.


그럼 그렇지, 히카리는 생각했다. 타케루는 모모와 먼저 간 것이 분명했으랴. 그녀가 일방적으로 그를 피한지도 벌써 한 달— 지쳤으면 지쳤지, 이제 와서 타케루가 다시 히카리를 찾아올 리가 만무했다.


교문을 나선 히카리는, 가방에서 조그마한 우산 하나를 꺼냈다.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치고 있었지만, 그녀의 텅 빈 마음만 했을까? 눈조차 제대로 뜰 수 없을 폭우였음에도, 히카리는 씩씩하게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폭풍우에 휩싸인 그녀의 우산은 그 힘을 버틸 수 없다는 듯, 얼마 안 가 뒤집혀 버리고 말았다. 어떻게든 해보려고 용을 썼지만, 부서질 대로 부서져 버린 우산은 회생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젖는 교복을 뒤로하고 집까지 뛰어가기 위해 골목을 도는 그 순간, 그녀는 예상치 못하던 한 사람을 골목 끝에서 보았다.


불투명한 우산 밑으로 보이는 흐릿한 금빛 머리. 걱정된다는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푸른 눈동자. 그녀의 소꿉친구였던 그 사람, 타카이시—


“히카리 쨩?!”


—타케루.


“우산은 어디에다 두고 그러고 있어!”


자신이 젖는 것은 상관하지 않고 히카리에게 달려오는 그 아이. 그녀에 대한 걱정이 묻어나는 그의 낮은 목소리가 골목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런 타케루를 바라보며, 히카리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타케루 군은 바뀐 게 하나도 없구나.


한 달이 넘도록 그를 피해 다녔음에도, 제대로 된 인사조차 하지 않았음에도, 그는 여전히 자기보다 히카리 자신을 더 걱정하고 있었다. 너무나도 타케루 다운 행동— 왜인지 홀가분한 마음에, 히카리는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자신에게 다가와 뭐라고 하는 타케루의 얼굴을 바라보았지만,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비 때문이었을까? 하지만 그녀의 입이 조용히 속삭인 한 마디는, 그 어떤 폭우도 뚫고 타케루의 귀에 꽂혀버렸다.


“좋아해, 타케루 군.”


놀란 듯 커진 타케루의 눈은 많은 감정을 담고 있었다. 역시 변한 게 없는 듯, 히카리는 타케루의 복잡한 감정 변화를 읽어낼 수 있었다. 분명 그중에는 모모도 있겠지.


자신들이 변해도 관계가 변하지 않는다는 게 두려운 거였다면, 자신들이 변하지 않으면 역으로 관계는 변할 수 있는 걸까? 히카리는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떨리는 타케루의 눈동자를 보며 생각했다.


그러나 그러기엔 히카리 자신은 너무나도 변한 것 같았다. 이 철없는 고백으로, 그들의 관계 또한 영원히 바뀌리라는 것을 알았음에도.


미소 다음엔… 슬픔이었다. 뭐라고 말하려, 자신을 붙잡으려 하는 타케루를 뿌리치고 히카리는 그렇게 빗속을 달렸다. 그가 자신이 흘리는 후회의 눈물을 빗방울로 착각하길 바라며— 그녀가 방금 그들의 모든 관계를 한 줌 재로 만들어버린 것을, 빗물이 씻겨내 주길 바라며.




:::




공원의 나뭇가지 밑에서 비를 피한 히카리는, 집에 들어갈 생각은 추호도 하고 있지 않았다. 나뭇잎 사이로 빗방울이 떨어져 내렸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 곳에 있었다.


여태까지 그를 피해 니다가, 만나서 한 말이 고작 한심한 고백이라니, 이 얼마나 최악의 결정인지. 이제 그녀는 다시 그의 얼굴을 볼 수 없겠지, 그저 한때 알았던 사람처럼 데면데면한 채로 학교생활을 보내면서. 그는 그대로 모모와, 그녀는 그녀대로—


차가움이 느껴지지 않는 어깨. 언제부터 비가 그친 것일까?


고개를 들었을 때, 히카리는 비를 막아주는 하늘빛 우산 하나가 자신의 머리 위에서 흔들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곧이어 옆으로 돌아간 시선은, 그녀 옆에 무심한 듯 앉아 우산을 씌워주는 금발의 남자아이를 보았다.


히카리가 비를 맞지 않게 하려고 하느라 자신의 왼쪽 어깨가 다 젖어버린 것을 알기나 하는지, 타케루는 얼굴에 호선을 그리며 히카리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놀란 표정을 짓는 그녀를 바라보며, 그는 입을 열었다.


“감기 걸린다구.”

“타케루 군—”


히카리는 뭐라 말하려 입을 열었지만, 타케루는 다 알겠다는 듯 그녀의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뉘었다. 그런 그녀의 머리 위에 그는 자신의 머리를 조심스레 기댔고, 투둑투둑, 하고 쏟아지는 빗줄기를 들으며, 그들은 그렇게 한참을 있었다.


“미안해.”


적막을 깬 히카리의 사과. 타케루는 천천히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아니야, 미안해할 필요 없어.”

“하지만 한 달 동안이나 타케루 군을—”

“그리고 난 한 달 동안이나 히카리 쨩한테 상처를 줬는걸.”


고개를 돌려서 본 타케루는, 싱긋 웃고 있었다. 오랜만에 이렇게 가까이 보는 타케루의 푸르른 눈동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함을 담고 있는 것 같았다. 혹시라도 그가 자신의 바보 같은 고백을 받아들여 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에게는 모모가 있지 않았던가.


눈빛을 읽을 수 있는 건 그녀 뿐만이 아니었는 듯, 타케루는 깊은 한숨과 함께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모모랑은 헤어졌어— 그런 그의 씁쓸한 말투에 놀란 히카리였지만, 그녀는 그가 얘기를 계속하도록 입을 다물었다.


“나는 히카리 쨩이 나를 싫어하는 줄 알았으니까.”


“닿을 때마다 놀라고, 가끔 안절부절 못 해하고, 나랑 있을 때도 뭔가 다른 생각에 잠긴 것처럼 보일 때가 많다고 느껴서, 혹시 내가 불편한 걸까 라는 생각도 했었어. 그래서 모모의 고백을 받아줬던 거야. 기회가 없었다고 생각했었으니까.”


미안해— 히카리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지만, 타케루는 싱긋 미소 지으며 그녀를 토닥여 주었다. 히카리 쨩이 좋아한다고 해 줬으니까, 라고 말하며 윙크를 날리는 그의 장난스러운 모습에, 히카리는 마침내 그들이 옛날로 돌아갔다는 기분을 느꼈다.


“좋아해, 히카리 쨩. 먼저 말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괜찮아.”


미안하다는 듯 찌푸려진 타케루의 미간을 펴주듯 쓸어주고, 곧이어 그의 뺨을 어루만진 히카리는, 웃으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나도 좋아해, 타케루 군.”


옛날과 같아졌지만 동시에 옛날과 같지 않은. 가까이서 서로를 바라보며 웃는 그들의 감정이 마침내 서로를 향한 것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어두운 먹구름은 사라지고, 밝은 여름 태양이 그들을 비추고 있었다—


그런 따사로운 태양처럼 영원히 빛나라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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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케히카 - Falling For You
2016년 2월 18일


글을 시작하기 전에:

이 연성은 천사 타케루 x 인간 히카리 AU 삼부작의 첫번째 이야기입니다.

두번째 이야기 : Flying For Us

세번째 이야기 : Freeing For Me



***



"육품 능천사 (六品 能天使), 타카이시 타케루. 제 2 선봉대대의 부지휘관으로써 맡은 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하얗도록 눈부신 빛에 가려, 세 쌍의 날개 말고는 그 형체마저도 가늠할 수 없는 존재는 손으로 무언의 신호를 보냈다. 그 앞에 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금발의 남자는, 다시 화려한 무늬와 두 개의 별이 새겨져 있는 검은 제복모를 깊게 눌러썼다.


금빛으로 형형색색의 문양이 수놓아져 있는 거대한 문이 닫히고, 어깨와 팔등지에 숫자 6이 적혀있는 큰 별 문양이 달린 검은 제복을 입은 남자는 아무 말 없이 그 곳을 빠져나왔다. 풀려있던 단추를 조용히 잠구고, 소매를 만지작거리는 그의 손목에는, 금색 손목시계가 있었다. 하지만 그 시계에는 아무 숫자도 적혀있지 않았고, 그저 흔들리는 붉은 초침만이 어딘가를 불길하게 가리키고 있을 뿐이었다. 


"축하하네, 타카이시."


자신을 보며 싱긋 웃는 흑발의 남자에게, 그는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그의 제복은 타케루의 것과 비슷해 보였으나, 제복모에는 대대의 지휘관임을 암시하는 세 개의 작은 별이 추가로 매달려 있었다.


"감사합니다, 지휘관님."


"그럼, 전장에서 보지."


그 순간, 한 쌍의 하얀 날개가 지휘관의 등 뒤에서 솟아올랐고, 그는 빠른 속도로 날아올라, 구름 밑으로 사라졌다. 


타카이시 타케루는 조용하고 평화롭기 그지없는 이 궁전 아래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셀 수도 없는 시간이 흘렀어도 변하는 것은 없었다. 그는 이 모든 것이 지겨울 뿐이었지만, 천사들의 군대인 능천사로써 그가 해야할 일은 자명했다. 


곧이어 그의 등에서 펼쳐진 새하얀 날개.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는 금발을 가린 제복모를 더 푹 눌러쓰고, 붉은 넥타이를 고쳐맨 그는, 허리춤에 차고 있는 두 자루의 산탄총을 조심히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깊은 한숨과 함께, 그 또한 날아올라 구름 너머로- 그 영원의 전쟁터로- 향했다.



***



그곳은 지옥도, 천국도 아니었다. 


천공이 붉게 물들고 대지가 검게 타오르는 이 전쟁터에서, 그들은 영겁의 시간을 싸워왔다- 누가 먼저 싸움을 시작했는지, 왜 싸워야 하는지조차도 잊어버릴만큼. 하지만 하늘에선 날개를 단 천사들이 끊임없이 내려와 정의의 심판을 내렸고, 땅에선 뒤틀린 모습을 한 악마들이 계속해서 기어올라와 지상과 천상을 모두 불태우려 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 그가 있었다.


막 다림질한 듯 빳빳하던 제복도, 눈부실만큼 새하얗던 날개도 지금은 붉은색으로 얼룩져 있었다. 그의 지휘관이 뒤에서 지시를 내리는 동안, 타케루는 돌격대장처럼 악마들에게 가장 먼저 달려들곤 했다. 허리춤에 찬, 빛나는 자수가 놓여진 소드 오프 샷건 두 자루를 들고 전장을 누비는 그에게는 많은 별명이 붙었었다- 하지만 역시 그 중 단연 으뜸을 꼽자면, 붉은 눈의 타카이시.


가차없이 적들의 숨통을 끊어버리고, 빛과 같은 속도로 전장을 종횡무진하는 그에게 그런 별명이 붙은 것은 바로 다름아닌 그의 무자비함 때문이었으니. 자신보다 몇 배는 더 거대한 악마의 공격을 손쉽게 피하고, 그 무기를 잽싸게 타고 올라가 에어로빅을 하듯 매끈한 동작으로 적의 머리를 날려버리는 그의 눈에는, 연민도, 죄책감도, 희열도, 승리감도-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시원한 바다를 연상시키는 푸르른 두 눈동자를 가진 타케루였지만, 그의 죽은듯한 무표정한 눈길에 모든 악마들이 지레 겁을 먹었기에 그들은 그를 활활 타오르는 붉은 눈이라고 부르는 것이었으리랴.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시체의 산 위에 살포시 안착한 타케루는, 조용히 뺨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그런 그에게, 고통스런 목소리가 들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으어어..."


시선을 내려보니, 발 밑에는 고통스런 표정을 하고 있는 형체가 살려달라는 듯 손을 뻗고 있었다. 악마도 아니고, 그렇다고 천사도 아닌 존재.


인간.


대부분의 인간은 멸종한지 오래였다. 남아있는 존재들은 대부분 서로 치고박고 싸우다가 알아서 자멸하거나, 아니면 악마의 꾐에 넘어가 그들의 종으로 부려먹힐 뿐. 천상과 지옥의 싸움에서, 그들은 그저 소모품에 불과했다.


자신을 향해 알 수 없는 외침을 하는 인간을 파랗지만 붉게 타오르는 그 눈으로 내려다본 타케루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그녀를 발견했다.


이 전쟁에서, 악착같이 살아남은 한 명의 인간. 악마의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은 듯, 순수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는 그녀는, 붉은 대지 구석에 허름하게 지어진 집에 혼자 살고 있는 듯 했다. 다가오는 악마들을 위협하거나 가끔은 쏴죽이기까지 하며, 그렇게 어떻게든 살고 있는... 인간.


천사들의 규율에 따라, 악마의 꾀임에 쉽게 넘어갈 수 있는 인간은 발견하는 즉시 보고하거나 제거하는 것이 옳은 일이었지만, 그는 그녀를 지켜보기로 했다.


처음에는 호기심으로써... 그 다음에는 연민의 감정으로써.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녀의 수호천사로써.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그녀를 더 많이 지켜보게 되었고, 계속해서 알게 모르게 그녀를 도와주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자신은 악마도 천사도 믿지 않는다며 그를 쫓아내려 했지만, 환한 미소를 지은 그는 그저 그녀에게 계속해서 되도않는 말을 건네며 (악마랑은 다르게, 난 아무리 쏴도 맞출 수가 없다구, 인간?) 그녀 주위에서 시간을 때우곤 했다.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결국 그녀가 그에게 마음을 연 것은 어느날, 악마들을 처치하며 인간을 만나러 오는 타케루가, 집 밖에 서있는 그녀를 총을 들고 있는 악마들이 둘러싸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였다.


모든 것을 체념한 듯 눈을 감은 그녀, 그리고 방아쇠를 당기는 악마들.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녀를 향해 날아든 타케루는, 자신의 날개로 그녀를 감쌌다.


실로 오랫만에 느껴보는 고통. 마지막으로 자신의 날개가 다른 존재의 피가 아닌 자신의 피로 얼룩진게 얼마만일까? 하지만, 지금은 고통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며 놀란 표정을 한 그녀가 무사함을 확인한 그는, 짧게 그녀의 뺨을 쓰다듬고는,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까지 그녀를 바라보던 푸른 눈은, 다시 붉게 타오르고 있었고- 붉은 눈의 타카이시의 등장에 악마들은 줄행랑을 쳤지만, 그의 분노 앞에 그들은 곧 목숨을 내놓았다.


"괜찮아, 인간?"


"당신이야말로 괜찮아요? 그... 그 날개. 나 때문에-"


"걱정하지 마."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제서야 몰려오는 고통에 그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렸다. 그것을 알아차린 듯, 그녀는 그의 손을 잡아끌어 집 안으로 데려왔고, 자신이 직접 만든듯한 약초와 붕대를 꺼내들어 그를 치료해주었다.


"이렇게까지 안해줘도 되는데, 인간."


"히카리."


"뭐?"


"히카리. 내 이름이에요."


이해하지 못한 듯 자신을 쳐다보는 천사의 눈을 마주본 그녀는, 잊지 말라는 듯 또박또박 자신의 이름을 읊었다.


피식 웃은 타케루는, 다시 자신의 상처를 돌보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반가워. 나는 타카이시 타케루. 제 2 대대 부지휘관이다."


"이름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어요. 붉은 눈의 타카이시."


"그냥 타케루라고 불러줬으면 하는데."


다시 타케루와 눈을 마주친 히카리는, 그의 눈동자를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보이지 않는 그 붉은 눈. 어쩌면 그가 이런 자신의 진실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히카리 자신 앞에서 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녀의 생각은 곧 그의 질문에 잊혀져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히카리 쨩. 넌 여기서 혼자 사는거야?"


"네." 


"다른 사람은 없고? 친구라던지, 부모라던지."


"제 부모님은 이 싸움 속에서도 저를 낳고 악착같이 키워주셨지만, 제가 어른이 되기도 전에, 천사들을 만나 끌려가셨어요- 그 와중에도, 용케 저를 숨기시면서요. 그 이후로는 혼자 여기서 살고 있죠."


"거, 미안하구만."


"당신 탓은 아니니까요. 날 도와주기도 했고."


"음."


그 이후로 둘은 특별한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치료에 대해 감사의 표시를 전한 타케루는 다시 전쟁 속으로 발걸음을 내딛었고, 히카리는 흰 날개를 펄럭이며 사라지는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또 오라는, 따뜻한 말 한마디와 함께.



***



그들은 그렇게 점점 더 가까워졌고, 타케루가 히카리와 보내는 시간 또한 자연스레 늘어만 갔다. 가끔은 그녀의 일을 도와주기도 하고, 장난도 치면서, 타케루는 점점 더 삶의 의지를 되찾았다. 더 이상 붉은 눈의 타카이시는 없었다- 악마와의 싸움에서마저, 그의 눈에는 생기가 넘쳤다.


"자네, 요즘 눈에 띄게 활발해진 것 같은데."


"아, 그렇습니까, 지휘관 님."


"천하의 붉은 눈이 그런 미소를 띄고 있는 게 얼마나 큰 가십거리인지 자네는 모를게야."


"저에 대해서 그렇게 많은 얘기가 오고가는 줄은 몰랐는데요."


상관의 말을 웃어넘긴 타케루였지만, 정작 지휘관의 얼굴은 심각했다- 마치 구겨져 펴질 줄을 모르는 종이처럼.


"설마, 숨기고 있는게 있거나 하진 않겠지."


"예?"

"인간이라던지, 악마라던지. 그들과 교감 이상을 나누는 것은 천계의 법에 어긋나는 짓임을 잘 알텐데."


"... 설마 그럴리가 있겠습니까."


"역시 그렇겠지, 타카이시. 자네는 우리의 붉은 눈이니까."



***



쾅-


약초를 빻고 있던 히카리는, 집의 문이 거칠게 열리자 저도 모르게 총을 집었다. 하지만 눈부신 빛 앞에 익숙한 천사가 모습을 드러내자, 안심하고 총을 내려놓은 그녀는, 그를 향해 미소를 지어보였다.


"무슨 일이에요, 타케루?"


"널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겠어."


"그게 무슨 소리에요?"

"천사도, 악마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



히카리는 빛조차 잘 들어오지 않는 어딘가에 있었다. 축축하고 어두컴컴한 이 곳은 그녀가 살 곳이 못되었지만, 그녀는 그를 믿었다. 


"내가 어떻게든 너를 천상으로 데려갈테니까, 조금만 여기서 버텨줘."


그의 약속을 믿고, 히카리는 그곳에 머물렀다. 가끔씩 모습을 드러내며 자신을 사랑해주고, 또 먹을 것도 가져다주는 타케루를 하염없이 기다리며.


그 동안 타케루는 어떻게든 인간을 천계로 데려오기 위한 방법을 모색했다. 인간이란 본디 쉽게 악이 될 수 있지만, 동시에 선이 될 수도 있는 존재니까. 그리고, 히카리는 그가 본 그 어떤 천사보다도 선에 어울리는 그런 존재였다.


그리고 몇 달만에 마침내 고대 서적에서 찾아낸 천사가 된 인간의 이야기- 타케루는 그 책을 집어들고 행복한 표정으로 궁전을 나섰다. 모든 것이 잘 풀릴 것이라는, 히카리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채로.


지휘관이 그의 앞에 소름끼치는 미소를 지으며 나타난 것은 바로 그 때였다.



***



"인간이라고요?"


"그래. 우리쪽 천사 한 명이, 어느 조그마한 굴에서 나와 약초를 찾는 여자 인간을 보았다고 하더군. 악마에게 넘어가지 않은 순수한 인간은 정말 오랫만인 것 같아서, 내가 직접 가려고 했지."


히카리. 타케루는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그렇게 나오지 말라고 했는데도-


"직접 가신다니, 차라리 제가-"

"아, 그래, 자네도 따라오는게 어때? 착한 인간이라면, 천계로 데려올 수도 있지 않겠나?"


"그- 그렇다면야-"


"그래, 그래, 우리끼리 가 보자구."


상관에게 이끌려 지상으로 내려가는 타케루는 히카리에 대한 걱정과, 천계로 그녀를 데려올 수도 있다는 기대감이 섞인 채로, 하늘을 날았다. 그녀가 있는, 익숙한 동굴을 향해.



***



"나는 육품 능천사의 지휘관, 니시타니 신이치다. 인간이여, 모습을 드러내라."


뿜어져 나오는 빛, 낮게 깔리는 목소리. 그 장엄함에 조심스럽게 모습을 드러낸 히카리는, 불안에 휩싸여 있었다. 결국 자신의 부모님과 같이 알 수 없는 곳으로 끌려가는 것이 아닐까 했지만, 뒤에 서있는 타케루를 보고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실소를 지으며 권총을 꺼내든 신이치 지휘관은, 총구를 그녀에게 겨눴다.


"그럼, 천계의 법에 따라, 너를 말소하겠다. 잘 자라, 인간."


"이게 무슨 짓입니까, 지휘관 님!"

"본보기로 삼으려는 것 뿐이다, 타카이시. 네가 이 하등한 인간과 놀아나는 것을 모를 줄 알았나?"


그 말에, 지휘관을 말리려던 타케루의 손이 우뚝 멈춰섰다.


"인간에 대해 알아보고, 미소를 짓고, 그 붉은 눈이 행복하다는 듯 궁전 내를 쏘다니고... 내가 그렇게 바보로 보였나보지, 타카이시?"


대승을 거두기라도 한 듯, 뒤틀린 미소를 지은 그는 제복모 아래로 타케루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타케루는 그곳에 묵묵히 서있기만 할 뿐이었다. 이 모든 것은 결국 그의 탓이었다. 괜히 자신이 그녀를 안전하게 해주겠다고 했기에, 자신이 그녀에게 희망을 주었기에, 부주의했기에- 이제 그녀는-


하지만 타케루가 자신을 원망의 눈빛으로 바라볼 히카리의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으면서도, 마지막으로 한번 더 그녀를 보고 싶다는 생각에 얼굴을 들었을 때 본 것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지만 다 이해한다는 듯, 괜찮다는 듯 따뜻하게 웃고 있는 그녀였다.


"그럼, 마지막으로 할 말은, 인간?"


"... 타케루 군, 나-"


철컥.


히카리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타케루는 신이치 지휘관의 관자놀이에 산탄총을 겨눴다.


"그 총, 내려놓으시죠, 지휘관 님."


"인간 하나 때문에 이럴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총을 내려놓으라고 말했을텐데요, 니시타니."


"... 이게 무슨 뜻인지는 네가 더 잘 알겠지? 같은 천사에게 총을 겨눈다는 것?"


자신의 목숨이 달린 일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는 듯, 몸을 돌려 타케루를 바라본 신이치가 냉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는 타카이시 타케루가 자신을 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와 몇백년을 같이 싸워온 사람이 아니던가?


"... 우리 모두, 선택을 할 때가 오는 법이니까요."


"하. 악마와 계약을 했구나, 타카이시!"


"아니요."


조심스럽게, 하지만 재빠르게 방아쇠는 당겨졌고, 놀란 표정도 잠시, 니시타니 신이치의 제복은 피로 붉게 물들었다. 땅으로 힘없이 쓰러진 그의 시체와, 손에서 떨어진 권총을 바라본 타케루는, 히카리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자신 또한, 눈물을 흘리면서.


"... 인간과 사랑을, 했습니다."


뭐라고 입을 열려는 히카리에게 쉿- 이라고 말한 타케루는, 자신의 제복모를 그녀에게 푹 씌워주었다. 


"울지 마, 괜찮아."


"하지만- 나 때문에- 날개가!"


처음 통성명 할때도 그런 말을 들었었지. 얼굴에 호선을 그린 타케루의 한때 눈부시게 빛나던 날개는, 검게 타들어가며 떨어져 나갔다. 떨어져 나간 깃털들은 땅에 닿기도 전에 산화해버렸고, 흉측하게 부서지는 날개는 그의 흰자와 함께 짙은 검은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괜찮대도."


"타케루-"


"끝까지 살아남아야 해?"


울먹임 때문에 더 이상 말을 하기도 벅찬 듯, 히카리는 떨리는 숨만을 내뱉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그녀와 이마를 맞댄 타케루는, 마지막으로 미소를 지었다.


"내 눈을 기억해 줘, 히카리 쨩. 너 덕분에, 마침내 되찾을 수 있었던- 나의, 푸른 눈동자를."


그 말과 함께, 부서지는 대지는 타케루를 잡아 끌었고, 한없이 나락으로, 지옥으로 떨어지는 그는 마지막으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천천히 손을 흔들었다. 


잘 있어, 내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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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케히카 - Lovemental Up!

2016. 2. 7. 16:48 by Doctor B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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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몬 x 킹스맨 - Roundabout

2016년 1월 16일

정장을 입은 타케루 사진은 콩다 (@bean2810) 님의 그림입니다.

다시금 감사드립니다!



***



후-


겉보기에도 값이 꽤 나갈 것 같은 가죽 의자에 앉아 오른다리를 자기 얼굴 앞까지 올려놓고 있는 남성이, 지금 막 자신이 손질을 끝낸 검지 손톱을 엄지로 찬찬히 훑고는, 남아있는 가루를 날려보내려는 듯 조용히 입김을 불었다. 


자신의 사파이어빛 눈을 연상시키는 청색 줄무늬 정장을 입고, 검은 넥타이를 맨 이 남자는 쓰고 있던 네모난 안경을 치켜올리곤 의자 옆, 쟁반에 놓여져 있는 집게로 얼음 몇 개를 잔에다 하나 하나 떨어뜨렸다. 얼핏 보면 칙칙할 수도 있는 그의 정장은, 오른쪽 가슴에 차고 있던 밝은 노란색 뱃지 덕분에 한층 화사해 보였다- 곧이어 각양각색의 무늬가 새겨져 있는 유리 위스키 병을 집어든 그는, 자신의 뱃지처럼 빛나는 금빛 머리를 한번 더 쓸어넘기며 잔에 위스키를 따랐다.


손가락으로 잔의 끝부분을 조심스레 잡고 자신의 얼굴 앞에서 천천히 흔들어보이는 그의 몸짓에, 하얀 셔츠를 고정시키기 위해 착용한 검은 멜빵이 조심스럽게 외투 아래로 모습을 드러냈지만, 그러든 말든 이 푸른 정장의 신사는 조용히 위스키를 음미했다.


다른 손의 검지만을 뺨으로 올리고, 나머지 손가락은 턱 밑으로 하여 턱을 괴고 있던 그는, 자신이 바라보고 있던 양복점 안 탈의실의 문이 마침내 열리자 눈썹을 치켜올렸다.


"기다리다 지치는 줄 알았다고, 야마토 형."


그의 투덜거리는 말투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파란빛 넥타이를 고쳐매며 자신의 검은 외투 단추를 잠군 남자는, 자신을 웃으며 바라보는 동생과 같은 금발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동생과 다르게, 그의 머리는 무언가라도 바른 듯 하늘을 향해 솟아있었다.


"임무 중에는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을텐데, 갤러해드 (Galahad)."


새로이 입은 정장이 어떤 느낌인지 보려는 듯 전신 거울 앞에서 천천히 자기 자신을 훑어보던 야마토가,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하여간, 깐깐하다니깐. 알겠어요, 시정하겠습니다, 퍼시벌 (Percival)."


놀리는 듯한 말투로 야마토의 코드네임을 부른 그의 동생, 타케루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자신의 형을 바라보았다. 늘 들고 다니는 검은 우산을 향해 손을 뻗으려던 순간, 타케루는 야마토의 구두에 눈을 고정시켰다.


"촌스럽게, 그게 뭡니까? 풀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쿼터 브로그라도 신던지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은 야마토는, 주인장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타케루에게 가자는 손짓을 하며 말했다.


"브로그 없는 옥스포드가 가장 신사다운 법이야."



***



양복집 비밀통로를 통해 본부로 내려가는 엘레베이터 안에서, 휘파람을 불며 자신의 우산을 빙빙 돌리던 타케루는, 입을 굳게 다물고 팔짱을 끼고 있는 형을 잠깐 쳐다보더니, 곧이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번엔 뭐랍니까?"


"암살."


"우리가 언제부터 맘에 안드는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쏴죽이고 다니는 집단이 됐습니까?"

"아서(Arthur)의 지령이야.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


"하."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을 굴린 타케루는, 자신의 은빛 롤렉스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오후 5시 55분- 아슬아슬하게 회의 시간을 맞출 수 있을 터였다.


"그럼 오늘 회의 주제는 그 타겟에 대한겁니까?"


"그렇겠지."


"아니 근데, 왜 퍼시벌은 이걸 다 알고 있는데 난 모르고 있던건지가 이해가 안되는데요."


"아서가 날 통해 너한테 얘기하라고 했으니까."


"아니 근데 왜 이제까지 기다린겁니까? 거 참, 미리 얘기해주면 되지. 그래서, 타겟이 누굽니까?"


투덜거리는 타케루를 돌아본 야마토는, 무언가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연민의 감정인지, 아니면 단순히 형으로써의 눈빛인지. 타케루는 전에도 몇번 야마토가 아서와 대화 후 저런 표정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때 야마토가 왜 그랬는지를 떠올려보기도 전에, 야마토의 단말마가 그의 생각의 허리를 베어냈다.


"야가미 타이치."


계속해서 빙글빙글 돌아가던 타케루의 우산이, 우뚝 멈춰섰다.


"동명이인이지?"


임무 중이고 무엇이고 상관없이, 제발 그렇다고, 그저 동명이인일 뿐이라고 말해달라고 반말로 자신의 형을 캐묻는 타케루의 눈빛은 절박 그 자체였다. 냉혈한이라고 불리던 이시다 야마토마저도, 동생의 그 눈빛은 차마 감당하기 힘든 듯 고개를 돌렸다.


묵묵부답이었다- 그리고 타케루는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



"아서!!!"


문을 부수다시피 박차고 회의실에 들어온 타카이시 타케루는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씩씩 거친 숨을 내쉬는 그 뒤에 서있는 야마토는, 원탁을 훑어보았다- 그는, 아서를 제외하면, 자수정 빛깔의 단발 머리를 깔끔하게 뒤로 넘기고, 몇백미터 밖에서도 빛날만한 분홍색 반지를 낀 손으로 턱을 괴고 있던 란슬롯 (Lancelot)- 이치죠우지 켄만이 있음을 알아차렸다. 물론, 붉은 머리와 잘 어울리는 보랏빛 커프스를 만지작 거리며 홀로그램으로 참석할 요원들을 정리하고 있는 멀린 (Merlin)- 이즈미 코시로를 포함해서.


그 뜻은 회의가 곧 시작될 것이라는 얘기였다- 아직 회의가 시작하기 전에 타케루가 문을 박차고 들어온 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야마토는 가늠할 수 없었다. 특히, 동생이 지금부터 무슨 짓을 할지 아주 잘 알고 있었기에.


"갤러해-"


타케루의 얼굴을 보고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푹 숙인 란슬롯이나, 일부러 모른 척 홀로그램에 열중하는 멀린과 달리, 묘하게 야마토를 닮은 송곳같은 갈색 머리를 한, 검붉은 정장의 아서는 타케루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곧이어 그가 무미건조한 말투로 입을 열었지만, 타케루의 외침에 곧 묻혀버리고 말았다. 


"야가미라니!!"


"갤러해드. 회의가 곧 시작된다. 일단 앉-"


"빌어먹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야가미 타이치라니!"


끓어넘치는 듯한 분노로 아서를 몰아붙인 타케루였지만, 아서는 눈 한번 깜빡이지 않았다. 


"우리가-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흥분한 상태로 자신에게 손가락질을 하는 타케루의 몸짓에, 문을 닫고 가만히 서있던 야마토는 순간 움찔했다.


"당신의 가장 친한 친구라고 야가미 스스무 상을 소개시켜준건 바로 당신이었잖아!"


"갤러해드-"


"스스무 상이 죽고 기울어가던 가문을 타이치 상이 어떻게 간신히 살려놨는데, 그렇게 얘기해도 도움 하나 주지 않았으면서, 이제와서 방해된다고 죽여버리겠다고?!"


"..."


"친구의 아들을 그렇게 막 죽여버린다고 말하고도 아무 죄책감도 들지 않습니까? 예? 아, 그렇지, 그 빌어먹을 임무 때문에 어머니도 버리셨었죠? 안그래요, 아버지?!"


쾅-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던 타케루는, 말을 끝맺음과 동시에 책상을 있는 힘껏 내려쳤다. 야마토는 그저 뒤에 서서 동생을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아서라는 이름으로 이 조직을 이끌고 있는 자신들의 아버지, 이시다 히로아키에게 난생 처음으로 반기를 드는 동생을.


그들은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에게 킹스맨 요원이 되는 훈련을 받은 존재였다. 그때만 해도, 가정은 행복했고, 아서라는 중책에도 불구하고 히로아키는 늘 웃고 장난끼 넘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는 변하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웃음이 끊이지 않던 가정은 비가 내리는 어두운 길거리처럼 어둠에 젖어갔고, 히로아키는 아이들에게 엄격하게 변했다. 결국 더 이상 그의 행동을 인내할 수 없었던 그들의 어머니 나츠코는 타케루를 데리고 집을 떠나버렸다- 야마토가 타케루를 다시 본 것은, 많은 시간이 흘러 타케루가 자신의 의지로 다시 킹스맨에 돌아왔을 때였다.


생각해보면, 어렸을 때에도, 그리고 커서 거의 무례하기까지 할만큼 엄격해진 아버지에게 훈련을 받을 때도, 늘 그에게 반발했던 건 다름아닌 야마토 자신이었다. 타케루는 묵묵히- 때로는 웃으며, 때로는 농담을 건네며 맡은 바를 수행했고, 그 덕에 얼마 안가 갤러해드라는 이름을 받고 정식 요원이 될 수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런 타케루가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었다. 히로아키는 야가미 스스무와 친했다- 그 둘은 뗄레야 뗄 수 없는 친구 관계였으니까. 그리고 그렇기에 자연스레, 야마토는 자신과 동갑내기인 스스무의 아들, 타이치와 깊은 유대관계를 쌓았다. 그것은 그의 동생인 타케루와 타이치의 여동생 히카리도 마찬가지였을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너무 어렸고, 제대로 된 친구가 되기도 전에 타케루는 어머니 손에 끌려 자취를 감췄었다.


히로아키도 타이치를 아꼈지만, 스스무가 죽고 나서 그들의 관계는 소원해져만 갔다. 생각해보면, 히로아키가 지금의 성격이 된 것도 스스무가 죽고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타케루와 야마토는 타이치와의 관계를 계속해서 이어갔다- 아니, 애초에, 저번주만 해도 야마토와 타케루는 타이치네 집에서 저녁식사를 하지 않았던가. 당연하게도, 그렇기에 이 지령은 야마토에게도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이번 회의에서 아버지가 정확히 무슨 의도를 갖고 이런 말을 한건지 캐물으려고 했는데-


타케루가 이렇게 반응할 줄은.


"그 계집애 때문이냐?"


자신만의 생각에서 빠져나온 야마토는, 숨을 고르고 있는 타케루를 향해 아서가 말을 하는 것을 보았고,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타케루가 두 주먹을 뼈가 부서질 만큼 부들부들 떨며 쥐고 있음을 깨달았다.


"계집이라고, 하지 말란-"


"야가미 가문의 동태를 알아보라고 보냈더니, 한심하게 사랑에나 빠져 오고는. 쯧."


그제서야 야마토는 아서가 타이치의 동생, 히카리를 얘기함을 알아차렸다. 분명히 몇달 전, 타케루가 그들의 새 사업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히카리에게 접근하는 임무를 받았긴 했었다- 야마토 자신에게는 타이치와 가까운 사람들을 미행하라는 임무가 떨어졌고 말이다. 그때만 해도 두 형제는 야가미 가문을 굳이 감시하는 아서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임무를 어찌 되었든 수행해냈던걸로 기억했는데-


"... 그럼 한가지만 물어봅시다, 아서."


타케루의 떨리는 목소리는, 그가 한계점에 다다르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임무에, 친한 사람을 암살하라는 지시, 게다가 그의 짝사랑까지... 야마토는 지금이라도 당장 타케루를 토닥여주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야가미 가문이랑 그렇게 친했으면서 왜-"


타케루의 질문은, 안경을 벗은 아서가- 아니, 히로아키가 나즈막하게 말한 한마디에 길을 잃고 말았다.


"내가 스스무를 죽였으니까."



***



보시다시피 여기서 끝날 이야기는 아닙니다- 실은 콘티도 구상도 더 있습니다만은, 후편이 언젠가 나올지, 나오지 않을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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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켄카이저 - Psychosis

2015년 12월 29일


글을 시작하기 전에:
이 글은 노래를 기반으로 쓰여졌으나, 글이 길어짐에 따라 노래의 페이스와는 맞지 않을 확률이 더 높습니다. 그렇기에 노래를 들으시는 것을 추천하지만 그림 MAD 같은 느낌이 아닌 BGM 정도로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다 읽으시기 전에 노래가 끝날 확률이 더 높습니다마는...)


** 주의: 자학적이고 고어적인 묘사, 캐붕 있음. 읽을 때 주의 또 주의해주세요 ㅜ^ㅜ **




***



방문이 굳게 닫힌지도, 벌써 나흘.


깊게 잠긴 문 안을 가득 메우는 어둠 속에서 나는 내 자신을 저주한다- 학교도, 친구도, 가족도, 디지몬도. 그 아무것도 이젠 나에게 닿지 않는다. 그들이 나에게 닿아 오염될 일은 더이상 없다.


어둠의 바다가 다시 나를 부른지도, 벌써 나흘.


내 과거의 망령을 들먹이며 나를 부르는 소리에 어둠의 씨앗이 있던 상처가 오늘도 아파온다. 고통에 몸부림치며, 고통을 없애주길 바라며 긁어댄 탓에 내 목덜미는 손톱 자국과 말라붙은 핏자국으로 가득했지만, 아무래도 상관 없다.


이 모든 것은 내 짐이니까.



It was just the beginning, but I saw the end

시작에 불과했지만 나는 그 끝을 보았어

of a love lost story

놓쳐버린 사랑 이야기의 끝

It was burned in my head 

내 머릿속에 각인되어버렸지



다시 모두를 내 일에 끌어들이게 하고 싶지 않다 했지만, 어둠의 바다는 혼자 맞서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들은 영원히 감겨진 두 눈으로 나를 보았고, 굳게 꿰매어진 입으로 내게 속삭였다. 고통과 죽음을 속삭이는 입들이 나무를 이뤄 거미줄에 잡힌 파리처럼 날 겁박했고- 절대적인 광기가 핏빛으로 물들은 천공을 군림하는 세상이 끊임없이 그 손길을 내게로 뻗어왔다.


그런 어둠 속에서 날 미치지 않게 해준것은, 내가 초등학생일때에도 나에게 손을 내밀어주었던 바로 그 사람- 다이스케.



And I try to forget it, I try to move on

잊어버리려도 해봤고, 나아가려고도 해봤지만

but I'm trapped and I realize

결국 그 안에 갇혀 깨닫네

I've been dead all along

난 이미 죽어있었다는 것을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그를 끌어들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어둠의 바다는 그 어느 때보다 강렬했고, 그들은 빛의 아이 대신 나를 부르고 있었다. 희망이 다시 그녀를 구해줄 것을 알기라도 하는 듯, 그들은 대신 이미 어둠에 빠졌었던 나에게 달콤함을 속삭였다.


먼저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이 흔들렸고,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흔들렸다. 내 가치관이 흔들렸고, 내 자신이 흔들렸다. 


나는 왜 그들을 거부하고 있지?

모든 것은 결국 네 잘못이야.


나는 왜 속죄하고 있지?

모든 것은 결국 네 잘못이야.


나는 왜 내가 옳다고 생각한 것에 대해 비난받아야 하는거지?

모든 것은 결국...



Black hearts beat under lungs that bleed

칠흑같은 심장이 너의 머릿결을 핥아대는 연기 덕에

From the smoke that licks at your hair

피 흘리는 폐 아래에서 계속해서 두근댄다-



너무 쎄게 주먹을 쥐어 손톱 자국이 남아있는 손바닥 안에는 방금 쥐어뜯은 보랏빛 머리카락들이 한움큼 쥐어져 있었다. 그래- 여기서 끝내야만 했다. 이미 더럽혀져 있는 내 심장마저 그들이 다시 쥐게 할 순 없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책상 위에 널부러져 있는 칼을 집어든다. 이미 몇번 시도했던 듯 칼은 붉게 물들여져 있었다.


어? 내가 언제?


이미 내 왼손은 붉은 직선으로 가득했다. 어쩌면 왼손에 도통 힘이 없던 이유가 그 때문일지도 몰랐다. 쓰라린 상처를 칼을 쥔 채로 천천히 훑는 순간, 누군가가 거칠게 방문을 두들겼다.



Don't save me I am lost

날 구하지 마, 난 이미 늦었어

I'd let you in but the door is locked

들어오라 하고 싶어도 문은 이미 잠겼어

And I am screaming from inside

난 그 안에서 비명 지르고 있으니까-



"켄!"


방문 너머에서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여태까지 느끼지 못했던 오한이 엄습한다. 마치 다이스케가 자신을 찾아올 그 날을 기다리고 있기라도 했었던 듯, 어둠이 소름끼치게 미소를 짓는 것만 같았다.


"그 안에 있는 거 다 알아, 부모님한테 들었다고! 문 안 열어?"


하지만 열어줄 수 없는걸, 다이스케 군. 다이스케 군을 끌어들이고 싶지 않아. 날 내버려둬. 어차피 곧 끝내려고 했던 참이었는데. 이건 내 고민이야, 내 고통이야, 내 벌이야-


쾅.


축구로 단련된 발길질에 잠금쇠가 단박에 떨어져 나가고, 거친 숨을 몰아쉬는 성게 머리의 남자 아이가 기어코 내 방에, 내 어둠 속으로 빛을 들고 헤집어 들어온다.



Don't let me out cause I can't be free

날 꺼내주지 마, 난 자유로워질 수 없어

There's not a lot of life left in me

남아있는 생명의 불씨마저도 얼마 없어

And I got a little surprise for you

널 위해 깜짝 놀랄만할 것을 준비했으니까-



"도대체 무슨 일이야 켄, 꼴이 말이 아니잖-"


씩씩거리며 나를 쏘아붙이던 그가 내 몰골을 보고 말을 멈췄다. 네가 봐도 나는 추악하겠지? 발버둥쳐 보았자 이미 어둠에 물들여질대로 물들여져버린 나는 이미 네가 알던 사람이 아니니까.


"켄, 너 설마-"


"이제 그만 돌아가줘, 다이스케 군."


마른 침을 삼키고 조용히, 하지만 확실하게 말한다. 난 널 지키려는 거야. 나라는 존재를 지워줘.


"무슨 짓을 하고 있었던거야?!"


열린 문 사이로 흘러들어오는 불빛 때문이었을까, 내 등 뒤를 은은하게 빛내고 있는 한 줄기 달빛 때문이었을까. 다이스케는 내 손목을 보았고, 황급히 뒤로 숨기려던 나의 손을 잡아챘다.


"그거 이리 내,"


그가 나머지 한 손으로 거칠게 내 칼을 빼앗으려고 하지만, 나는 손에 힘을 준다. 내 희망을, 내 탈출구를 훔쳐가려 하지 마. 난 널 위해 모든 걸 짊어질 각오가 되어있는데, 너는 왜 나에게서 그 희생마저도 빼앗으려 해?



All the voices in my head (all the voices in my head)

내 머릿속 목소리들 (내 머릿속 목소리들)

They're telling me to do things I regret (you know you want to)

내가 후회할 짓들을 하라고 속삭이고 있어 (너도 이걸 바라고 있잖아)



빼앗으려는 다이스케와 놓지 않으려는 나. 그가 잡고 있던 왼손을 뿌리치고 두 손으로 칼을 뺏기지 않는데 내 온 힘을 집중한다. 


"다 널 위해서란 말야," 라고 악을 쓴다. 다이스케도 지지 않고 뭐라고 외쳤지만 더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가 뭐라고 하던 상관 없었으니까. 나는 악이고, 너는 선이야. 내가 최소한 조금의 자존심이라도 품고 떠날 수 있도록 허락해주는게 그렇게 힘든거야?


난 너를 구하려고 하는건데 왜 넌 날 이해하지 못해? 


나의 심장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며, 나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었었다며.

진정한 용기가, 우정이 뭔지 그 고생을 하고도 겪지 못한거야?


때로는 놔줄수도 있어야 한다는 걸 왜 몰라?



Don't make me I won't do it

부추기지 마, 난 안 할거야

(Yes you will, you're hungry, admit it!)

(할거잖아? 실은 이걸 원했으면서. 인정해!)



머리가 점점 더 세게 울린다. 누군가 내 옆에서 종을 울리듯, 충격이 관자놀이를 타고 머리 전체로 퍼져나간다. 실랑이를 벌이며 우리는 서로 입에 담기 힘든 말을 내뱉지만 그것이 무엇인지조차 나는 알 수 없다.


양손으로 미끄러질듯한 칼 손잡이를 더욱 더 세게 쥔다. 다이스케도 질세라 그의 오른손으로 내게서 칼을 빼앗으려 한다- 손잡이와 이어져 있는 칼날에 그의 엄지가 깊게 베이고, 그의 머리색만큼이나 붉은 피가 칼을 따라 흐른다.


불빛와 달빛은 섞여 춤을 추듯 우리를 조롱했고, 친절했던 그의 얼굴도 어둠에 물들어가듯 비웃음을 띄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다이스케가 아닌 어둠의 바다 그 자체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이제 그만 이성의 끈을 놓으라는듯이 나를 부추기면서.


애정도, 연민도 아닌 증오심이 가슴 가장 깊숙한 곳에서부터 끓어오른다.

내 고통에 대해서, 내가 하려는 것에 대해서- 나에 대해서 아는 것 하나 없으면서.


왜 나를 방해만 하려고 드는거야?



Two hands hold the will of one

두 손이 하나의 의지를 가득 담는다-



모두의 눈을 아프게 하는 불빛은, 꺼뜨려야만-


푸욱.



AND YOU CAN'T UNDO WHAT I'VE DONE

그리고 내가 한 짓을 넌 돌이킬 수 없어



모든 것이 멈출 듯 느려졌다. 내 시선은 충동적으로 튀어나간 내 팔을, 그리고 조금 전까지 손잡이를 잡고 있던 다이스케의 피 흐르는 손을 지나, 그의 복부에 깊숙히 박혀있는 칼에 다다랐다. 



Don't save me I am lost

날 구하지 마, 난 이미 늦었어

I'd let you in but the door is locked

들어오라 하고 싶어도 문은 이미 잠겼어

And I am screaming from inside

난 그 안에서 비명 지르고 있으니까-



마치 보기 싫은 공포 영화의 한 장면을 슬로우 비디오로 보는 듯, 아주 천천히 그의 점퍼가 붉게 물들었다. 나도 모르게 칼을 쥐고 있던 손을 놓자- 이번엔 내 주위 모든 것이 모습을 바꾸었다.


나는 절벽 앞에 서 있었다. 내가 놓은 것은 칼이 아니라 다이스케의 손이 되어있었다. 나를 마지막까지 믿고 있던 그의 얼굴에 알 수 없는 표정이. 놀람일까, 충격일까, 고통일까. 가만히 손을 내밀고 멈춰있는 나를 끝까지 쳐다보던 그의 몸이 절벽 뒤로 천천히 넘어갔다.


그럼에도 그의 얼굴에서, 배신감도, 증오도 찾아볼 수 없는 건 왜일까.


이 절벽 끝으로 널 데려온 것도, 결국 이 절벽에서 널 밀어낸 것도 나인데.

너는 왜 끝까지 나를 혐오하지 않는걸까?


그런 너를 완벽하게 나에게서 지우고자 너를 밀쳐버린 나는- 



Don't let me out cause I can't be free

날 꺼내주지 마, 난 자유로워질 수 없어

There's not a lot of life left in me

남아있는 생명의 불씨마저도 얼마 없어

And I got a little surprise for you

널 위해 깜짝 놀랄만할 것을 준비했으니까-



쿵.

그의 몸이 땅바닥과 거칠게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나는 다시 내 방으로 돌아왔다. 방바닥에 누워 칼을 헤집고 흘러넘치는 붉은 피를 막으려 그의 더듬거리는 두 손이 용을 쓰지만, 댐이 무너지듯 피는 계속 쏟아져 내렸다. 새빨간 피가 땅바닥을 천천히 잠식하고, 그의 찬란한 빛도 천천히 깜빡인다.

그럼에도 마지막까지 너는 나에게 뭐라고 속삭인다. 조금 전까지 듣기 싫어했던 네 목소리가 그리워 허공에 있던 손을 움직여보지만, 네 목소리는 나에게 닿지도 못하고 사라져 버린다. 허겁지겁 무릎을 꿇고 피 묻은 네 손을 부여잡아도, 네 속삭임은 들리지 않는다.

난 내 손으로 도움을 뿌리쳐 버렸어.
넌 네 손으로 네 친구를 찔렀어

난 내 손으로 다이스케를 배신했어.
넌 네 손으로 네 친구를 죽였어

땅바닥에 차갑게 떨어지는 네 손과 함께, 괴로운 비명을 지른다. 끝까지 이기적이게도, 나는 네가 살아있는지 아닌지는 관심 없었다. 난 네가 나에게 하려던 말이, 나에게 할 말이 너무 두려울 뿐이야.


You should leave now, and never look back
넌 이제 그만 떠나는게 좋아, 뒤돌아보지 말고
I should leave now, and never look back
나도 이제 그만 떠나는게 좋아, 뒤돌아보지 말고


눈에서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피눈물이어도 이상할 게 없겠지만, 나는 볼 수 없었다. 달빛도, 불빛도 모두 내 어둠에 먹혀 빛나지 못했다. 그의 빛이 꺼짐으로써 나는 다시는 앞을 볼 수 없는 장님이 되어버렸다.

영원한 어둠 속에서 무릎을 꿇고 머리를 다시 쥐어뜯는다. 어차피 아무리 소리 질러도 이 집엔 더 이상 아무도 없으니까-

그들을 제외하고.

어떻게든 벗어나려 다이스케에서 멀어져 침대로 올라가려 해보지만, 불탈 듯 타오르는 사다리에 금방 손을 놓는다. 남아있는 것은 그의 피로 이루어진 내 손자국. 

가장 밝게 빛나던 태양을 쏴내린 죄인에게 안식 따위는 허용되지 않는거야.


You should leave now, and never look back
넌 이제 그만 떠나는게 좋아, 뒤돌아보지 말고
I should leave now, and never look back
나도 이제 그만 떠나는게 좋아, 뒤돌아보지 말고


또다시 처절한 비명을 지르지만, 이번에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들만이 나를 보며 조소하듯 킥킥댈 뿐. 그들은 이걸 원하고 있었어. 내가 완전한 어둠 속에서 들을 수 없는 어둠 밖 모두를 향해 소리치기를, 처절하게 몸부림치기를.

이것도 결국은 내가 선택한 거야.
불공평해.

난 내가 만든 감옥 속에 있어.
왜 나만 당해야 하지?

이 모든 건 다 내 탓...
이 모든 건 다 그 녀석들 탓.

모든 게 네 손아귀 안에 있었다면, 모두가 너 같았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텐데. 그렇지?
응.

어차피 내가 더 이상 잃을 게 남아있는 것도 아니잖아?


You can't save me I am lost

날 구할 수 없어, 난 이미 늦었어

I'd let you in but the door is locked

들어오라 하고 싶어도 문은 이미 잠겼어

And I am screaming from inside

난 그 안에서 비명 지르고 있으니까-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그들의 목소리가 점점 더 멀어져 간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발소리가 잔잔한 호수에 물수제비가 물결을 일으키듯 울려퍼지고- 내 눈도 차차 다시 선명해져만 간다.


다이스케가 있던 곳을 힐끗 쳐다보지만, 그 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살아있어 이 곳을 빠져나간걸까, 아니면 나는 더이상 그에 대해 상관하지 않게 된 것일까? 어느 쪽이든 상관 없었다-


이미 빛은 없으니까.


피가 덜 묻은 오른손으로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검은 디지바이스를 쥔다. 내 의지에 반응하듯 디지바이스는 불길하게 삑삑댔고- 나는 어머니 품을 찾는 아이처럼 비로소 그들에게 돌아갔다.


터덜터덜 벽에 서있는 전신 거울을 향해 다가간다. 거울에서 비춰보이는 디지몬 카이저의 차가운 미소. 공포에 질려 디지바이스를 쥔 손을 휘두른다- 쩌억 하고 거울이 갈라지는 소리가 들린다.



Don't let me out cause I can't be free

날 꺼내주지 마, 난 자유로워질 수 없어

There's not a lot of life left in me

남아있는 생명의 불씨마저도 얼마 없어

And I got a little surprise for you

널 위해 깜짝 놀랄만할 것을 준비했으니까-



다시 내 머릿속을 가득 메우는 그들의 비명소리.  

다른 손으로 거울에 손을 대고 무릎을 꿇자, 자연스레 내 손을 따라 거울에 핏자국이 묻는다- 마치 천국에서 추락하는 천사처럼, 끝없는 지옥으로 떨어지는 나를 상징하듯.

다시 거울을 올려다보지만, 깨져버린 유리 조각에서는 수많은 카이저들이 나를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내 진실된 모습은 하나도 비춰지지 않은 채, 하나같이 나를 비웃으며.

비웃음을 차마 참지 못하고 떨궜던 고개를 다시 들고 거울을 향해 손을 뻗는다- 그래, 지금 의지할 수 있는 건 한 명 뿐이니까.

오사무 형.


I don't have much time here, so stay here
남은 시간이 별로 없어, 그러니 여기 계속 있어


형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형이라면 나처럼 되진 않았겠지?
형은 왜 죽어서도 내가 원하는 걸 모두 갖고 있는거야?

형의 모습을 하고 나를 바라보는 디지몬 카이저들을 마주보며, 나는 말없이 어둠을 삼킨다.

이 모든 것은-
내 짐이니까.


Everything you have I want, but the truth is...
난 네가 갖고 있는 그 모든 걸 원하지만, 진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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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케히카 - The Persistence of Memory

2015년 12월 3일


연성 키워드 진단메이커
타케히카의 연성 키워드는 시곗바늘셔츠참을 수 없는 입니다.



***



눈부신 햇빛이 그림자를 모두 불태워버릴 기세로 내리쬐는 화사한 여름날, 붉은 셔츠 덕에 더 빛나는 금색 목걸이를 한 여자아이가 자신을 비추는 햇님보다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걷고 있었다. 


이마를 타고 흐르는 한줄기 땀을 닦아내고, 삐쳐나온 마호가니 색의 머리를 천천히, 하지만 신중하게 머리띠 안으로 다시 집어넣은 야가미 히카리는, 아파트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높게 서있는 아파트를 한번 올려다본 그녀는, 할 수 있다고 자신에게 주문이라도 거는 듯 짧은 숨을 내쉬고는 엘레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서로 이런저런 일로 바빴던데다 그녀의 오빠 타이치가 여름 감기까지 걸려버렸던 탓에 만날 날을 쉬이 잡지 못했었지만, 마침내 만날 약속을 잡은 만큼, 히카리는 무척이나 들떠있었다. 정말 며칠만에 남자친구와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된 것인가- 그것도 단둘이서만!


층수를 알리는 낭랑한 목소리와 함꼐 엘레베이터 문이 열리고, 히카리는 천천히 그의 집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2시 5분


손목에 찬 시계를 내려다본 히카리가 중얼거렸다. 


약속한 시간보다 25분이나 일찍 도착했네.


시계를 차지 않은 반대쪽 손을 들어 초인종을 누르려던 그녀는, 예상치 못한 상황과 마주했다-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갑자기 열리더니, 그녀보다 키가 큰 금발 여자 한명이 한쪽 발을 들어 구두를 고쳐신으며 나왔기 때문이었다.


"어머, 히카리 아니니?"


히카리의 앞에 서있는 것은 다름아닌 나츠코 상이었다- 타카이시 타케루의, 히카리의 남자친구의 어머니. 순간 몸이 굳어진 히카리는, 그 자리에 잠시 가만히 있었지만, 곧이어 정신을 차리고 웃으며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타케루를 보러 왔나보구나? 일 때문에 나가려는데 딱 마주쳤네. 타케루는 지금 샤워 중이니까, 잠깐만 안에서 기다리려무나. 먹을 거라도 가져다 주고 싶지만, 빨리 가야해서 말야. 그럼, 재밌게 놀다 가렴!"


히카리가 답을 할 새도 없이, 속사포로 말을 내뱉은 나츠코는 급한 듯,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는 또각또각 거리는 하이힐 소리와 함께 복도 너머로 멀어져갔다- 멍하니 열린 문을 잡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히카리를 뒤로 하고.


현관문을 닫고, 조심스럽게 신발을 벗어 한쪽으로 놔둔 히카리는, 쏴아아아- 하고 들리는 샤워기 소리를 들으며 익숙한 타케루의 방으로 걸어들어갔다. 그의 침대에 걸터앉아 한숨을 내쉰 히카리는, 자신이 왜때문인지 안도하고 있음을 느꼈다.


내가 안도감이 들만한 일이 뭐가 있지?


자신의 감정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고 있던 히카리는, 문이 열리고 타케루의 어머니를 보았을 때 순간 자기도 모르게 멈칫했던 것을 곱씹어 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왜 그랬는지도.


설마, 나 타케루 군이랑 단 둘이 있는게 아니라 어머니도 같이 계시는거라고 생각해서 실망했던거야?


자신만의 결론에 도달하고 얼굴이 확 붉어진 히카리는, 발을 동동 구르다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혹시라도 타케루가 샤워를 끝마치고 나왔을 때, 며칠만에 그가 처음 보는 그녀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새빨개진 게 아니기를 바랐기 때문이었으랴.


또다시 한숨을 내쉬며 마음을 가라앉힌 히카리는 양 손을 다시 침대에 맥없이 내려놓고는, 풀썩- 하고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나도 참, 부끄럽게.


그제서야, 히카리는 무언가 바스락거리며 그녀의 등을 간지럽히고 있음을 깨달았다.


다시 벌떡 일어나 고개를 돌리자, 침대에는 그녀가 조금 전까지 깔고 누워있던, 그가 아무렇게나 벗어둔 것 같은 와이셔츠가 있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그의 옷을 집어드는 히카리의 심장이, 다시금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살짝 떨리는 손으로 셔츠를 돌려보자, 셔츠에는 구김 자국이 있었지만 (그녀가 깔아뭉갰었다는 점을 제외하더라도), 깨끗해 보였다- 오늘 아침에 입었다가, 샤워를 하려고 벗어둔 것이 분명한 듯.  


타케루가 아침에 샤워를 끝마치고 이 하얀 셔츠를 맨 몸 위에 입는 것을 상상하니, 얼굴이 어찌나 또 시뻘겋게 달아오르는 것 같은지. 간신히 그런 생각을 떨쳐냈을 때 다음으로 든 의문점은, 그가 그녀보다 얼마나 체격이 더 클까 하는 점이었다. 


그냥 위에 걸쳐도 입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저도 모르게 와이셔츠에 달린 검은색 버튼을 두 손가락 끝으로 만지작거리던 히카리는, 조심스럽게 셔츠를 이미 입고 있던 옷 위에 걸쳐보았다. 그녀가 예상한 대로, 사이즈가 컸던 셔츠의 소매는 그녀의 팔을 가리고도 남아 끝에 대롱대롱 흔들리고 있었고, 단추를 잠그고 나서도 어린이 한명이 더 들어갈만한 자리가 남을만큼 낙낙했다.


손목을 흔들 때마다 시계추처럼 같이 흔들리는 소매를 쳐다보다, 다시 셔츠를 제자리에 놓아두려 단추를 푸는 그 순간, 예기치 못하게 방문이 덜컥- 하고 열렸다. 


"히- 히카..리 쨩...?!"

"타케- 타케루 구-"


두 남녀는 얼어붙은 듯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츄리닝 바지만 입고, 상의를 벗은채로 젖은 금발 머리를 말리며 아무 생각 없이 방문을 열은 타케루와, 달랑거리는 소매 밖으로 간신히 손을 꺼내 호기심에 입어본 그의 셔츠를 벗으려던 히카리. 쉰 목소리로 서로의 이름을 부르고 서로를 쳐다보는 그 불편한 시간이 어찌나 영원같던지.


떨어지지 않는 입을 어떻게든 열어 변명을 하려던 히카리에 눈에 들어온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궁금해하던 그의 체격이었다. 


처음 보는 그의 상체. 보디빌더처럼 우락부락하진 않았지만 몇년간 농구를 한 덕에 잔근육이 단단하게 발달해 있는 그의 몸. 히카리의 눈이 타케루의 쇄골에서부터 가슴으로, 복근으로 내려갈수록- 그녀의 얼굴은 한없이 더 붉어지고 있었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은 타케루도 마찬가지였다- 여자친구가 집에 이미 와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해서 자신의 맨 몸을 의도치 않게 보여준 것은 둘째치더라도, 그가 아무렇게나 벗어둔 셔츠를 그녀가 입고 있을 줄이야! 


혼란과 부끄러움 속에 거칠어지는 숨소리.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선, 뭐라고 말이라도 해야함을 알았지만, 타케루의 머릿속은 이미 다른 것으로 가득차 있었다- 자신의 셔츠를 입고 있는 히카리가 어찌나도 귀여운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그녀를 향한 사랑이 냄비를 타고 흘러내리는 거품처럼 다른 생각들을 쫓아내기라도 하는 듯.


이미 부끄러움도, 당황스러움도 모두 잊고 서로를 넋 놓고 쳐다보던 두 연인 중에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히카리였다. 


"타- 타케루 군, 미안해, 내가 그러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그게, 그- 지금 당장 돌려줄게-"


그제서야 타케루도 정신을 차린 듯, 버벅거리며 히카리에게 달려갔다.


"아냐, 내가 갑자기 들어와버려서 그래, 미안해 히카리 쨩, 내가 도와줄-"


침대에 앉아서 단추를 풀려고 하는 히카리와, 그녀를 도와주겠답시고 후다닥 손을 뻗은 타케루. 


타케루가 히카리의 손을 단추 대신 잡은 것도, 그녀가 중심을 잃고 침대로 풀썩 쓰러진 것도, 타케루가 얼떨결에 왼손은 침대에, 오른손은 히카리의 손을 잡고 그녀를 내려다보게 된 것도, 다 당연한 수순이었을지도.


또다시, 그렇게 그 둘은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훨씬 더 가깝게, 훨씬 더 위험하게. 


이보다 사람의 얼굴이 더 붉어질 수 있을까? 마치 시간이 멈춘 듯, 터질것 같은 표정을 하고 서로를 바라보는 그들 사이에는 침묵만이 가득했다. 천천히 똑-딱- 거리는 시곗바늘의 소리만이, 두 남녀의 심장소리와 대결이라도 하듯 크게 울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둘은 전혀 눈을 돌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은은하게 빛나는 분홍색이 섞인 히카리의 갈색 눈 속으로 빠져들듯 그녀를 바라보던 타케루는, 원래같았으면 얼굴을 가리거나 고개를 돌렸을 히카리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을 똑바로 마주보고 있음을 느꼈다.


히카리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성은 그녀에게 얼굴을 돌리고 이 상황에서 벗어나라고 충고하고 있었지만, 그의 붉은 얼굴과 대비해 더 밝게 반짝이는 파도빛 눈동자에서 벗어나는게 가능할리가 없었다.


자신을 계속해서 바라보는 히카리의 눈빛에 홀리기라도 한걸까. 이 어색하고 불편해야할 상황에서, 그녀에게 입맞춤을 하고 싶은 욕망은 왜 계속 커지는 것인지. 계속 부정하고 또 부정했지만, 그의 머리 뒷편에선 늘 이런 상황을 바라오지 않았냐는 외침이 끊임없이 메아리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둑이 무너지듯, 타케루의 얼굴이 그녀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히카리의 손은 이미 그가 놓아준지 오래였지만, 그녀는 다가오는 타케루를 보고도 얼굴을 돌리지도, 이 상황에서 빠져나오려 하지도- 그렇다고 그를 밀쳐내지도 않았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그의 새하얀 피부와, 아직 다 마르지 않은 젖은 머리. 아랫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천천히 돌리는 그의 모습에 매료된 듯, 그녀는 떨리는 눈꺼풀을 파르르 감았다.


째깍거리는 시계 소리를 음악 삼아, 두 남녀의 입술이 천천히 맞닿았다. 키스를 해본 적이야 많았다지만, 이만큼 짜릿하고 강렬한 적이 언제 또 있었을까.


째깍-


그렇게 그들의 서로를 향한 사랑 속에 어느샌가 묻혀진 시계 소리. 


째깍-


시곗바늘은, 그런 그들을 시샘이라도 하듯 빠르게 돌고 또 돌았다.


째깍-


해가 질때까지, 멈추지 않고...



***



추신:

단편 The Disintegration of the Persistence of Memory (기억의 지속의 해체)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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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타케 - Lather, Rinse, Repeat

2015년 5월 3일


이야기를 읽기 전에:

이 단편은 애니코믹스 판 디지몬 어드벤처 02에서 타케루와 다이스케가 처음 만나는 장면에, 타케루가 "전에 쓰고 있던 고글은 어디가고, 그런 이상한 걸 차고 있는거야?" 라는 소리를 한 것에서부터 착안한 타임루프물입니다. (사진: http://i.imgur.com/03HRBwl.jpg)



***



익숙한 풍경.


“잘 먹었습니다—“


똑같은 일상.


“미안하구나 타케루, 내가—“


이미 셀 수도 없이 많이 겪은 대화들.


“아니에요.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나를 걱정스런 눈으로 돌아보는 어머니의 눈빛마저도, 이제는 싸늘하게만 느껴진다. 


더 이상 일말의 감정도, 일말의 후회도 느껴지지 않는다. 지금 이 상황은, 중요치 않음을 안다.


가방을 메고 현관문을 나선다. 산뜻하게 불어오는 봄바람.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문다.


평화로운 세상이 내 눈 앞에 펼쳐진다. 다른 세계에 온 것 같은 착각— 아니, 어쩌면, 다른 세계일지도.


더 이상 원래 세계가 어떤지조차 기억할 수 없다. 모든 것이 일말의 파편으로만 남아있다. 산산조각난 거울을 통해 내 얼굴을 들여다보려 해봤자, 흐릿한 단편의 조각만이 나를 돌아볼 뿐.


뚜벅, 뚜벅. 


복도 끝에서 나를 일층으로 데려다 줄 엘레베이터를 기다린다.


문이 열리고, 조그마한 소년 하나와 분홍색 머리의 여자아이가 나를 반긴다. 바로 앞에 있음에도 그들의 목소리는 내게 들리지 않는다. 마치 휘몰아치는 폭풍우 같은 내 마음 속에서, 하염없이 비를 맞으며 그만 포기하라고, 돌아가라고 악이 받치도록 소리를 지르는 이성의 마지막 끈처럼.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 이미 수십번도, 아니, 수백번도 넘게 해본 대화. 억지 웃음을 지으며 내 대사를 읊는다. 거세게 몰아치는 폭풍의 노호 속에 내 목소리도 묻힌 듯 들리지 않았지만, 그들이 나를 보며 웃는다— 적어도, 실수는 하지 않은 것 같군.


엘레베이터를 타고 모자를 푹 눌러쓴다. 깊은 한숨이 내 목구멍을 간지럽히며 타고 올라온다.


내 이름은 타카이시 타케루. 오늘도 난, 초등학생이라는 명목 하에 내 옛 추억을 되짚는다.



***



모든 것은 다이스케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난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아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직 고등학생인데. 아직 해야할 일이 많은데, 아직, 아직—


하루하루를 고통 속에 살아갔다. 죄책감 속에 살아갔다.


내 잘못이 아니라고,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고 사람들은 얘기했지만, 그들이 뭘 안단 말인가. 내 앞에서 그가 죽는 것을 직접 본 내 기분을, 그들이 어찌 감히 상상조차 할수 있긴 할까?


내가 소중한 존재를 잃어버린 것이, 처음이 아니니까, 더 의연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거야? 내가 결국 웃으며 쓰라린 기억을 짚고 다시 일어설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냔 말이야?


나에 대해서 무엇을 안다고...


그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내 자신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난 가면을 썼다. 


웃음이라는 가면. 사람들에게서 내 진정한 마음을 숨길 수 있는 가면. 오직 그만이— 나에게서 벗겨낼 수 있었던 그 가면을, 또다시. 두 겹, 세 겹으로.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내 가면은 나의 일부가 되었다. 떨어질 수 없는 접착제로 붙여놓은 듯, 그 누구에게도 더 이상 내 진심을 보여주지 않았다. 가끔은 무엇이 내 진심인지 헷갈릴 때도 있었지만, 그의 부서진 고글을 내 손에 쥐는 하루하루가 나에게 그 날의 쓰라린 기억을, 그리고 내 진심을 다시 깨닫게 해 주었다.


그들이 뭐라고 하든 상관 없었다. 난 그를 되찾을 방법을 찾을 것이었다. 설령 그러기 위해 그 때의 그 지옥같은 기억을 매일 다시 떠올려야 한다손 쳐도.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 했던가.



***



내가 처음으로 다시 웃었던 것은 코시로 형이 몇십 년도 더 지나,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기계를 마침내 만들었다고 했을 때였다. 우리가 처음 모험을 할 적, 디지털 세계의 시간이 현실 세계와 다르게 돌아갔다는 점에서 착안해, 겐나이 상의 도움으로 디지털 세계를 통해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고 그는 우리에게 얘기했지만, 그 기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알 바 아니었다.


돌아갈 수 있어.


다이스케 군을 살릴 수 있어.


딱히 코시로 형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거나 동의를 구할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그들이 내 의견을 들어줄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기에. 


코시로 형은 타임머신을 보여줄 적 과거를 바꾸는 행동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아예 통째로 근간부터 흔들어 놓을 것이라고 경고했었지만, 새벽에 연구실 안에 잠입해 떨리는 손으로 어쩌면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는 과거의 여행을 시작하려는 나에겐, 그의 경고 따위는 머릿속에서 내 진정한 웃음처럼 희미하게 사라져 버린지 오래였다.


다만 그도, 나도 알지 못했던 것은, 과거로 돌아간다는 것이, 과거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을 역사를 공부하듯이 훑는것이 아닌, 내 자신이 그 시대로 돌아가버린다는 것이었을까.


나는, 다시 10살이 되어있었다. 


어머니는, 오늘이 내가 처음으로 오다이바 초등학교로 다시 입학하는 날이라 나를 흔들어 깨웠고, 난 그제서야 내가 여태까지 겪어왔던 모든 것을 모두 다 다시 겪을 것임을 깨달았다.


그럼에도, 다이스케를 만날 수 있다는 것에, 희망을 가졌다.


처음에는.



***



내게 선명하게 남아있는 우리의 두번째 모험을 모두 다시 겪고, 중학생이, 그리고 고등학생이 되어 다시 그 운명의 날을 맞이했지만—


나는 그를 구할 수 없었다.


왜?


어째서?


내가 너를 구할 방법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는데, 어째서 난 너를 구하지 못한거지?


넌 왜 나에게서 계속 멀어지기만 하는거야?


왜?


돌아와.


돌아오란 말이야...


그 때의 충격은 처음보다 더 심했다. 그를 또다시 잃었다고 생각하니 더 이상 가면도 소용이 없었다. 무너져 내리는 둑처럼, 절망이, 공포가, 파도처럼 나를 덮쳤다.


그래서 나는 다시 시도했다.


타임머신을 타고, 다시 우리가 처음 만난 그 날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나는 또다시 실패했다.


자책.

재시도.

실패.


자책, 재시도, 실패. 자책, 재시도, 실패—


나는 시간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코시로 형의 기계로,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영원한 시간의 아지랑이 속에, 끊임없이 돌아가는 시계바늘 속에 손발이 묶여 인형처럼 다스려지고 있는 것은 나였다. 


째깍째깍대는 시곗소리에 트라우마가 생겼다. 처음 내가 기억하는 우리의 모험과 다른 일도 많이 겪었고, 코시로 형의 경고에 맞게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타임머신은 늘 개발되었고, 나는 늘 돌아갔다.


내 정신이 피폐해지고, 나를 비웃는 시계추가 나를 부숴놓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내 대사 하나하나를 모두 기억할 수 있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늘...


돌아갔다.



***



처음으로 그를 만나는 순간이 매정하게도 또다시 나를 찾아왔다.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 차라리 이 때 그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가 용기와 우정을 이어받는 아이가 아니었더라면 같은 생각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몰랐지만, 그를 만나면 그 모든 것이 사라지곤 했다. 


그리고 난 그런 내가 미웠다—


내 자신을 갉아먹고 있음을 앎에도, 다시 돌아올 수 밖에 없는 나를, 그가 행복할 수 있도록, 우리가 행복할 수 있도록, 그를 처음 본 것처럼 행동해야 하는 나를.


끔찍하게도 증오했다.


툭.


내 앞으로 축구공이 굴러온다.


“여어, 축구공 좀 던져줄래—“


천천히 몸을 숙여 축구공을 집어든다. 차마 앞을 바라볼 자신이 없다. 목이 뻣뻣하게 굳는다. 이 모자로 가려진 시야 앞에, 그가 서있다.


“이봐—“


그의 목소리에 마른 침을 삼키며 고개를 든다. 붉은 머리. 진한 갈색 눈동자. 네모난 고글.


네모난 고글?


아아, 그래. 그랬다. 그는 타이치 형을 동경해서 고글을 쓰고 다녔었다. 우리의 첫 모험에서 브이몬을 만나고, 그에게 동그란 고글을 물려받기 전까지, 그는 저 고글을 썼었다.


“야, 거기, 축구공 줄거야, 말거야?”


그의 짜증나 하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 다시 그를 쳐다본다. 그에게 삐걱거리는 미소를 지어보이고 축구공을 던진다. 이제 내가 해야할 대사를 읊어야 할 차례.


말문이 막힌다.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내가 정작 해야할 말은 내 목구멍에서 나오질 않는다. 감정이 메말랐다고 생각했지만, 이 순간만 되면 모든 것이 터져나올 것만 같았다.


이상하게 나를 쳐다보는 그의 고글에 다시 시선이 쏠린다. 안 어울리는 네모난 고글.


“전에 쓰고 있던 고글은 어디 가고, 그런 이상한 걸 차고 있는거야?”


내 입에서 내 진심이 흘러나온다. 늘 그랬듯이, 그는 존재만으로 내 가면을 벗겨버리고 있었다. 


더욱 더 나를 이상하게 바라보는 그를 마주할 자신이 없다. 분명 미친놈이라고 생각하겠지. 오늘 처음 만났는데, 전에 쓰고 있는 고글이라니. 온 몸이 떨린다, 그가 뭐라고 중얼거린 것 같았지만, 그를 쳐다볼 수도, 그의 목소리를 감히 들을 수도 없다. 


그가 내 이름을 부른 것 같지만, 날 본 적도 없는 녀석이 내 이름을 알리가 없다. 이젠 환청까지 들리는 걸까.


닭똥같이 떨어지는 눈물을 닦으려 하지도 않고, 그를 지나쳐 간다. 


숨을 쉴 수조차 없다.


누가 제발 이 고리를 끊어줘.


이런 생각을 매일 하면서도, 결국 그를 보며 웃고, 그와 대화하고, 그를 구하기 위해 다시 이 세계로 돌아오는 내가...


참 밉다.



***



익숙한 풍경.


똑같은 일상.


이미 셀 수도 없이 많이 겪은 대화들.


오늘도 나는 같은 대사를 읊으며 학교로 나선다. 한숨을 쉬고, 입술을 깨물며 공을 찬다.


이번에도 나는 또 과거로 돌아왔다. 가끔은 그가 밉다. 하지만 그를 보고 있으면 그런 마음이 눈 녹듯 사라져 버린다. 후회하면서도, 그를 저주하고 싶을 때가 있음에도, 모든 것이 그의 눈웃음에 산산조각나 버린다.


그것이 너무 고통스러워.


그러니까... 

그러니까 이제 제발.


...


이제 제발 날 놔줘.


너를 구한 것이 몇번째인지, 네가 내 몫까지 행복한 삶을 살길 바라며, 네가 죽는 것을 볼 바에 차라리 내 목숨을 댓가로 바쳐 널 구한 것이 몇번째인지— 너는 모른다.


난 네가 망가지는 것을 알고 있어.


그러니까 제발 그만.


내가 대신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날 줄 알았다. 하지만 너는 계속 돌아왔다.


운명은 가혹했다. 네가 없는 세상은 지옥같았고, 코시로 형이 만든 타임머신을 타고 난 돌아와 너를 구하기 위해 몇번이고 우리의 모험을 다시 겪었다. 하지만, 하지만— 너를 구할 순 없었다.

단 한가지 방법만을 빼고.


근데 너는 왜 계속 돌아오는거야?


이제는 내가 널 구하더라도 네가 계속 돌아올 것을 안다. 우리의 이야기가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절대 끝나지 않을 것임을 안다. 이야기가 돌고 돌아, 우리 둘 다 완전히 파멸할 때까지 네가 돌아올 것임을 나는 안다.


하지만 미안해.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네가 죽은 세상에서 살고싶진 않아.


이기적이라서 미안해.


그러니까, 이젠 제발 나를 놔주면 안될까—


타케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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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케히카 - 운명

연성/장편 2015. 11. 15. 05:27



타케히카 - 운명

2015년 4월 26일


어두컴컴한 하늘 너머, 반짝이는 별들이 하나같이 미소짓고 있는 어느 겨울밤— 지저귀는 새들마저 잠을 청하러 갔는지, 어둑어둑 땅거미가 지고 있는 공원은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단 하나, 홀로 등을 돌리고 앉아있는 여린 여자아이에게서 흘러나오는, 속삭이듯 조용한 울음소리만을 제외하고.


오늘은, 오늘은 모두에게 행복한 날이었는데. 왜 어째서? 


입술을 깨물고, 터져나오는 울음을 간신히 삼키고 있는 중학생 야가미 히카리가 자신에게 되물었다.



***



결승전. 


그랬다. 오늘은 그녀의 단짝친구 타카이시 타케루가 속한 농구부가, 다른 중학교와 결승전을 치루는 날. 이상할 것 하나 없는 하루였다. 당연하게도 선택받은 아이들이 모두 모여 그를 응원했고, 그녀 또한 그곳에 있었다. 공을 손에서 놓지 않고 코트를 종횡무진하며 팀을 승리로 이끄는 그를, 또 자신들을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드는 타케루를 보며, 히카리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시합이 오다이바 중학교 팀의 압승으로 끝난 후, 히카리는 그녀의 타케루의 모든 농구 시합에서 늘 그랬듯이, 수건과 물통을 집어들고, 타케루를 향해 뛰어내려가는 다른 아이들의 뒤를 따랐다.


“장하다 내 동생!”


“너 이 자식, 정말 타고났는걸!”


팀원들과 친구들에게 둘러쌓여 칭찬과 축하를 받고 있던 타케루에게, 어떤 여자아이가 다가온 것은 바로 그 때였다. 불쑥 나타난 그 아이에게, 자연스레 타케루의 땀을 닦아주려던 히카리를 포함해서,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히카리는 한눈에 그녀를 알아볼 수 있었다. 코토네— 그녀는 타케루와, 그리고 히카리와 같은 반이었다. 사교성 좋고, 인기 많고, 여러모로 다른 학생들의 동경을 받는 아이. 그녀도 타케루를 축하해주러 온 것이었을까—


“정말 멋졌어, 타케루 군! 축하해!”


코토네가 자연스레 물통과 수건을 타케루에게 건네며 말했다. 순간 멈칫한 듯한 타케루는 곧이어 환하게 웃으며 그녀의 호의를 받아들였고, 모두들 다시 왁자지껄 그를 축하하는 데 여념이 없어 보였다— 단 한 명, 야가미 히카리를 제외하고.


왜인지 히카리는 그 곳에 가만히 서 있었다. 무언가 자신의 역할을 빼앗긴 듯이. 하지만, 그래. 생각해 보면, 굳이 그녀가 늘 타케루를 챙겨주라는 법은 없었다. 그녀는 그의 가장 친한 친구였지만— 아니, 그게 다였다. 친구. 그의 어머니도, 그의 애인도 아닌, 그의 친구. 꼭 그녀만이 그를 챙겨줄 필요는 없지 않은가? 


어깨를 으쓱이며 이 상황을 무덤덤하게 넘기려는 히카리였지만, 마음 속에 무언가가 응어리져 있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정확히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가, 그녀를 답답케 하고 있었다.


‘내가 그저 늘 하던 일을 하지 않아서 그런 거겠지 뭐,’


그렇게 애써 생각하려는 히카리는, 누군가가 자신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려놓는 것을 알아차렸다. 내심 타케루의 손길을 기대한 히카리가 고개를 돌렸지만, 그 곳에는 익숙한 금발의 아이 대신 자신을 걱정스레 내려다보고 있는 그녀의 오빠, 야가미 타이치가 있었다.


“괜찮니, 히카리? 거기 멍하니 서서 뭐하는거야?”


“아, 아무것도 아니야, 오빠. 잠깐 딴 생각좀 하고 있었어. 근데, 타케루 군은?”


“씻는다고 들어갔지. 하여간에, 오늘 시합도 이긴 겸, 죠네 집에서 파티를 열기로 했는데-“


“에에?! 내가 언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죠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에이, 내 동생이 우승을 했는데, 그정도는 해줄 수 있지 않아, 죠!”


“아니, 그건 그거고!”


말도 안된다는 표정으로 반박하는 죠와, 그런 그에게 반 협박 및 반 설득을 하는 야마토를 바라보며 얼굴에 호선을 그린 타이치가, 윙크하며 히카리에게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타케루한테 무작정 얘기를 하긴 했지만 말야, 좀 데리고 와주지 않겠어?”


“알았어, 오빠.” 히카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리고, 그렇게 왁자지껄 떠드는 아이들과 죠와 어깨동무를 하며 야마토의 편을 들어주는 타이치를 뒤로 한 채, 히카리는 웃으며 체육관을 떠났다. 


마음 속에 진 응어리는 이미 잊어버린 채로.



***



히카리는, 양손에 음료수를 하나씩 쥐고 헐레벌떡 계단을 뛰어내려오고 있었다.


‘왜 하필이면 이럴 때 자판기가 고장이 난담. 타케루 군이 먼저 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계단 아래에서 노을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는 금발을 발견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곧이어 타케루의 이름을 부르려던 히카리는, 그가 그림자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저게 누구지?


그녀의 궁금증은, 그림자 속의 인물이 입을 염으로써 해결되었다. 


“오늘 시합 정말 대단했어. 다른 선수들이 쫓아오질 못하던 걸.”


코토네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왜인지 떨리고 있었다— 타케루가 뭐라고 대답을 했지만, 히카리는 코토네의 다음 말에 정신이 팔려, 그의 대답을 듣지 못했다.


“그래서 말인데, 있잖아, 타케루 군... 실은, 네가 이번 시합에서 승리하면, 고백하기로 마음 먹었었거든.”


“에—“


“나랑, 사귀어주지 않을래?”


계단 위에 서있던 히카리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가 무너져 내렸다. 그녀의 친구가 방금 고백을 받았는데— 그것도, 저렇게나 인기 많은 여자아이에게. 자리를 비켜주고, 그가 그녀와 사귀기로 결정한다면 그를 축하해주고, 응원해주는 것이 응당 친구로써의 도리가 아닌가? 하지만, 히카리는 그들을 바라볼 수 없었다. 코토네의 다음 말도, 타케루가 뭐라고 하는지도 들을 수 없었다. 마치 멀어져가는 과거의 기억처럼, 그들은 히카리에게서 점점 더 멀리 떠나가고 있는 것 같았다.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는. 디지털 세계보다 먼 저 어딘가로.


애초에, 설레는 순정만화 같은 연애 이야기는, 모든 여자아이가 좋아할 법한 소재가 아니었나? 그 대상이 자신의 친구라면, 더더욱. 하지만, 히카리는 자신의 절친한 친구라고 생각했던 타케루의 연애사를 바라보고 있자니, 재미보단 불안이— 파도처럼 그녀를 덮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왜?


왜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척, 푸른 눈이 잘 어울리는 저 금발의 아이를 부를 수 없는 것일까. 왜 그녀는 코토네와 타케루가 붙어있는 모습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은 것일까. 왜 그녀의 심장이, 누군가 쥐어짜는 것처럼 아픈 것일까.


어째서— 마치 세상의 사활이 걸린 것 마냥 초조함과 불안함이 그녀를 엄습하는 걸까?


차가운 느낌이 그녀를 뱀처럼 감싸올랐고, 알 수 없이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한 채, 히카리는 타케루와 코토네를 뒤로 하고 계단을 뛰어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발자국 소리를 타케루가 들은 것인지, 아니면 그저 코토네에게 대답을 하는 것이었는지는 몰랐지만, 타케루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하지만, 어느 쪽이었던, 마치 지금 바깥 풍경처럼— 겨울 바람 앞에 하늘하늘 떨어져 바스라지는 나뭇잎처럼— 타케루의 목소리는 히카리에게 닿지 못했다.





살을 에는듯한 매서운 바람이 부는 겨울밤, 검은 비니를 쓰고 목도리를 두르고 있는 남자아이 하나가 그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가로등 아래에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언질받은 대로 자신의 선배, 키도 죠의 집으로 찾아간 타카이시 타케루는, 자신의 둘도 없는 친구가 자신과 원래 같이 왔어야 했음을, 그리고 그녀가 그러지 않았음을— 즉, 어딘가로 사라졌음을 깨닫고, 그녀를 찾으러 학교를 샅샅이 뒤지다 뛰쳐나온 참이었다.


거친 숨을 내뱉으며 입술을 깨문 타케루는, 왜인지 코토네가 자신에게 고백할 때 얼핏 들었던 발소리가, 히카리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구심을 떨쳐낼 수 없었다.


어느 쪽이던, 히카리를 찾아야만 했다.



***



결승전.


오늘은 그의 농구부가 그렇게 고대해왔던 결승전이었다. 타케루가 오다이바 중학교에, 그리고 나아가 농구부에 입부한 이후로, 그들은 연전연승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 시합에서 승리함으로써, 무패의 전설에 쐐기를 박을 참이었다.


상대의 전략을 분석하고 끊임없이 연습한 만큼, 타케루와 그의 팀원들은 시합을 승리로 이끌었고, 타케루는 골을 넣을 때마다 그의 친구들을 향해 엄지를 치켜세우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그의 가장 친한 친구, 야가미 히카리를 향해서.


시합이 끝난 후, 이슬처럼 맺힌 땀을 닦아낸 타케루는, 자신을 향해 환호하는 친구들을 향해 다가갔다. 짧게 친 머리를 쓸어넘기는 형도, 성게같은 머리와 단발머리를 한 동갑내기 친구들도, 그리고 모험을 같이 하며 동고동락한 다른 선택받은 아이들도 그를 보며 축하해주고 있었지만, 그의 시선은 그의 단 한명만을 향하고 있었다.


자신을 향해 언제나같이 따스한 미소를 짓고 있는 히카리를 바라보고 있자니, 그 어떤 건강식보다 빠르게 시합의 고된 피로가 사라져가는 듯 했다. 그렇게 그녀에게 손을 뻗으려는 순간—


“정말 멋졌어, 타케루 군! 축하해!”


누군가가 그에게 다가오며 외쳤다. 순간 움찔한 타케루는 옆을 바라보았고, 같은 반의 코토네가 자신을 보며 싱긋 웃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잠시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던 타케루는, 곧이어 웃음으로 그녀에게 답하며 물통과 수건을 받아들였다.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닦고, 물로 메마른 목을 축였지만, 그의 심장은 무언가를 더 원하고 있었다. 익숙한 손길이, 익숙한 목소리가, 익숙한 미소가 필요했다. 


하지만 왜?


‘히카리 쨩이 늘 날 챙겨줬으니까, 그냥 익숙하지 않아서였을까.’ 타케루가 물을 마시며 곰곰히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그녀에게 무언가를 더 바라고 있었다. 친구로써의 친근함이 아닌 무언가를.


히카리 쨩은 나에게 정확히 뭐지?


하지만, 타케루가 자신의 물음에 답하기도 전에, 히카리의 오빠, 야가미 타이치가 말썽꾸러기 같은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기에, 타케루는 자신만의 망상에서 빠져나와야만 했다.


“있잖아 타케루, 너 우승 기념으로, 죠네 집에서 파티를 열려고 하는데.”


“네? 하지만 죠 상은 그런 말을—“


“쉿. 죠네 집에 그냥 쳐들어 갈거야. 다들 가 있을테니까, 씻고 정리하고 와, 알았지?”


“푸하, 네.”


터지려는 웃음을 애써 참으며 대답하는 타케루를 보며 미소지은 타이치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더니 곧이어 똑같은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를 지으며, 야마토에게로 다가갔다.


피식— 실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은 타케루는, 고개를 들어 히카리를 바라보았다. 자신에게 등을 돌리고 무언가에 집중하듯이 가만히 서 있는 그녀를 본 그는, 그녀에게 다가가 말을 걸어볼까 생각했지만, 곧이어 타이치가 그녀의 어깨를 잡는 것을 보고, 마음을 돌렸다.


다시 자신의 질문을 곰곰히 되짚어보며, 타케루는 샤워실로 향했다.


우리는 친구일까?


아니면 그 이상일까?



***



아직도 자신의 질문에 해답을 찾지 못한 타케루가, 머리를 긁적이며 가방을 들고 락커룸을 빠져나왔다. 밖이 춥다는 것도 잊어버렸는지, 외투도 제대로 걸치지 않은 그는, 죠의 집까지 걸어가며 혼자 생각할 시간도 가질 겸, 복도를 돌아 학교를 벗어나려고 했으나, 예상치 못한 사람과 마주치고 말았다.


“안녕, 타케루 군.”


“어, 어어, 코토네 쨩. 안녕.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어, 응.”


자신의 눈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는 코토네를 바라보며, 타케루는 그녀가 자신에게 무언가 할 말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곧이어, 그 할말이 무엇인지도.


“오늘 시합 정말 대단했어. 다른 선수들이 쫓아오질 못하던 걸.”


“아— 하하. 고마워. 아, 수건이랑 물도.”


타케루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생각은 다시 히카리를 향하고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어물쩡 말하는 코토네의 목소리가 그를 다시 수면 위로 끌어올렸고, 그는 다시 고개를 들어 그녀를 마주보았다.


“실은, 네가 이번 시합에서 승리하면, 고백하기로 마음 먹었었거든.”


“에—“


“나랑, 사귀어주지 않을래?”


타케루는 대답을 망설였다. 어찌보면 차가울 수도 있지만, 이미 그가 그녀의 의중을 알아차렸을 때부터,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코토네는 그의 친한 친구일 뿐이었다. 


하지만, 히카리는? 히카리는 과연 그의 그저 또다른 친한 친구일 뿐일까? 아니면 자신도 모르게 그녀와의 대화에, 그녀와의 접촉에 너무 익숙해져, 자신이 마음 속에서 키우고 있는 감정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게 아니라고, 그녀도 그저 친구일 뿐이라고 생각하려고 하고 있지만, 코토네가 자신에게 고백한 상황에서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히카리라면, 사랑을 논하려는 상황에서 가장 먼저 자신의 머릿속에 그려진 것이 히카리라면—


그렇게, 그의 머릿속은 이미 다른 종착점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무언가 해답이 보이는 듯하달까— 마치 그의 정신이 이 곳에서 빠져나와 다른 곳을 떠돌고 있는 느낌. 어둠 속에서 자신을 비추는 무한한 빛(光)에, 히카리(光)에 이끌려.


그 순간, 어디선가 들려온 우당탕 거리는 발자국 소리가 말없이 서있던 그의 환상을 깨뜨렸고, 그는 저도 모르게 “히카리?” 라고 조용히 혼잣말을 내뱉었다.


“타케루 군?”


“아— 아? 아... 미안, 코토네 쨩. 넌 좋은 친구지만, 난 널 그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아.”


타케루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고, 코토네는 씁쓸한 미소로 화답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네... 역시, 히카리 쨩 때문인거지?”


“엣—?”


하지만, 타케루가 차마 대답할 새도 없이, 그녀는 우승을 축하한다고, 대답해줘서 고맙다고, 그리고 내일 학교에서 보자는 말과 함께 복도를 돌아 그림자 너머로 사라져버렸다.


자신이 저도 모르게 몇 년 전부터 꾸준히 묻고 있던 질문에 대해 마침내 답을 얻은 타케루를 뒤로 하고.



***



조용한 밤. 어둠이 내려앉은 공원 한가운데에서, 타케루는 히카리를 마침내 찾아내고야 말았다. 이 추운 날, 외투 하나 제대로 껴입지 않고 벤치에 앉아 훌쩍이고 있는 그녀를.


아무 말 없이, 그는 자신의 외투를 벗었다. 천천히 다가가 그녀의 어깨에 자신의 옷을 덮어준 타케루는, 깜짝 놀라 자신을 돌아보는 히카리를 향해 멋쩍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어디 갔었어. 다들 한참 찾고 있었다구.”


“... 미안.”


히카리가 타케루의 질문에 대답하는 데에는 한참이 걸렸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추궁하지 않겠다는 듯, 타케루는 조용히 그녀 옆에 앉아 그녀의 어깨를 감싸주고 있을 뿐이었다.


“... 왜 울고 있었어?”


“아무것도 아니야...”


“그런데 왜 여기 혼자 있었던거야, 감기 걸리게.”


타케루가 왼손을 천천히 들어 그녀의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살포시 닦아주며 얘기했지만, 그녀는 아무 답이 없었다.


“... 실은, 코토네랑 있는 거 봤어.”


그 상태로 미동도 않고 몇 분이 지났을까. 딸꾹질 비슷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마침내 히카리가 입을 열었다.


‘그 때 내가 들었던 발자국 소리가 히카리가 맞았구나,’ 타케루가 생각했지만, 그가 코토네의 고백을 거절했다고 말하기도 전에, 히카리가 다시금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실은, 그 때 고백하는 걸 봤었어. 그런데— 그, 그런데— 왜인지 모르게, 나도 모르게 그만— 그만 도망쳐 버렸어. 나도— 나도 왜 이러는지, 내가— 왜 울고 있는지—“


벌벌 떨면서, 버벅대면서 말하는 히카리의 변명 아닌 변명은, 타케루의 손이 그녀의 어깨와 머리를 감싸안고 자신에게 끌어당겨 그녀를 꽉 안아줌으로써, 뚝 끊기고 말았다.


자신의 어깨에 말없이 울고 있는 히카리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던 그는, 조용히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고백, 거절했어.”


그의 품에 얼굴을 묻고 있던 히카리의 울음이 뚝 그쳤다.


그녀의 어깨를 조심스레 잡고 자신의 어깨에서 그녀를 떼어놓은 타케루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히카리의 마호가니 색 눈을 바라보았다. 붉은 빛이 감도는, 마치 보석같은 그녀의 눈동자. 사람을 끌어당기는 듯한 느낌의 눈동자— 마치, 마법에 홀려버린 듯, 그는 왼손을 들어 그녀의 젖은 뺨을 어루만지며, 히카리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히카리 또한, 바다처럼 넓은 타케루의 사파이어 빛의 두 눈동자에서 눈을 뗄 생각이 없어보였다. 자기도 모르게, 파르르 눈꺼풀을 감은 그녀는, 고개를 천천히 돌리며 그의 허리를 휘어잡았다.

그들은 늘 서로와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했지만, 지금은, 무언가 사뭇 달랐다.


점점 더 서로에게 다가가며, 희망의 문장의 소유자와 빛의 문장의 소유자는 서로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서로 연결된 듯한 느낌. 처음 모험을 하며 만났을 때에도, 두번째로 ‘선택’받아 또다시 디지털 세계를 구할 때에도 느꼈던 그 소름돋는 감정이— 둘을 고리처럼 휘감았다. 


시간마저도 그들의 입술이 닿는 순간을 숨죽여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캄캄한 공원 한가운데에서, 따뜻한 달빛에 흠뻑 젖은 두 아이는, 말 없이 영원같았던 그 순간을 음미했다.


헉— 하고 들이마쉬는 숨과 함께, 희망의 빛으로 이어진 입맞춤이 끝을 맺었을 때, 두 아이는 아무 서로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았으면서도 너무 순식간에 끝나버린 그 순간.


다시 서로를 향해 고개를 움직이는 그들은, 그 어떤 조명 없이도, 충분히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 순간만큼은,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그들을 방해할 수 없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운명이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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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다이 - 가깝고도 먼

2015년 4월 6일


푸욱—


살이 찢기는 소리. 온몸이 흥건하게 붉은 액체로 젖어오는 느낌. 터질듯한 머리가 더 빙빙 돌아갔다. 두 눈을 꼭 감은채로 팽 하고 온 몸에 퍼질 고통을 기다렸지만, 그 어떤 느낌도 찾아오지 않았다. 이런 게 죽는다는 걸까. 정녕 그렇다면, 의외로 편안한 저승길이 될지도.


하지만 주위의 시끄러운 소리는 잦아들지 않았다. 창공을 가르는 아군들의 울부짖음도, 손가락 끝에서부터 양껏 죽음의 악취를 풍기는 적의 웃음소리도, 모두 다 그대로였다. 자신이 죽었다면, 죽고 있다면— 이 모든 것이 사라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전장의 한가운데에 서 있던 이치죠우지 켄은 두 눈을 게슴츠레 떴고, 자신 앞에 서있는 흐릿한 형체를, 그리고 그 형체가 자신을 돌아보며 땅으로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그 순간 모든 소리가 잦아들었고, 세상이 무너졌다. 


이런 게 죽음이라면, 죽고 싶지 않아—


하지만 신은, 자신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지 않은 그에게 죽음보다 더 가혹한 처벌을 내렸다.



***



무릎을 꿇은 켄은, 자신의 밑에 쓰러져 있는 형체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자신의 손에 흥건하게 묻은 붉은 피. 하지만 그 피는 켄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눈물로 흐릿해진 눈 앞의 형체를 그는 계속 더듬거렸다. 눈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지만, 자신 앞에 누워있는 존재의 배를 뚫고 나온 날카로운 무언가를 그는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치 카메라가 초점을 잡듯이, 쓰러져있는 아이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온 몸으로, 그리고 이젠 바닥에 웅덩이처럼 퍼지고 있는 붉은 피처럼 붉디 붉은 머릿결, 그리고 반쯤 부서져버린 고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켄은 그의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대려 했지만, 미소지은 그 아이의 손이 먼저 켄의 뺨에 닿았다.


“다행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원망하듯, 켄의 몸이 벌벌 떨리고 있었다. 말을 하려 입을 열었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자신을 지키려 목숨까지 내다버린 이 사람을 보면서 그는 입을 뻥긋거렸지만, 그가 하려던 말은 목에 걸린 생선 가시마냥 나오질 않았다. 


출혈이 심할때는—


이성을 되찾으려 노력했지만, 이미 놓쳐버린 열차였다. 홍수처럼 닥쳐오는 감정이 눈물이 되어 피 묻은 켄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부들거리는 손으로 자신의 뺨을 어루만지는 아이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그의 손이 천천히 움직이더니 흐르는 눈물을 피 묻은 엄지로 닦았다.


“왜 울어, 울기는.”


무기력한 미소를 지은 그 아이의 손이 힘없이 땅으로 떨어졌다.


안돼.


안 돼.


안된다고.


죽지 마. 안돼. 여기서 이렇게.


안된단 말이야—


마치 울어도 된다는 큐를 받은듯, 켄은 피칠갑이 된 아이의 몸을 붙잡고 목놓아 울었다. 위험하다고, 몸을 피하라고 외치는 황제드라몬의 목소리도, 지고있는 그들의 싸움을 돕기 위해 나타난 페가수스몬과 네페르몬도, 그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이미 세상은 끝났는데, 왜 저들은 아직도 반항하고 있는걸까.

이미 모든 것이...


그 생각에 반응하듯 눈 앞이 다시금 흐릿해진 그는, 미동도 하지 않고 누워있는 그 아이의 몸 위로 쓰러졌다.


한 때 푸른색이었던 그 아이의— 다이스케의— 붉은색으로 점칠된 디지바이스를 손에 쥔 채로. 



***



모든 것은 평화롭기만 하던 어느 여름날에 시작되었다. 


처음 히카리를 데려갔을 때만큼 갑작스럽게 어둠의 바다는 다시금 아이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고, 드라고몬의 부대를 진두지휘하는 마왕몬과 함께, 또다른 위협이 두 세계를 덮쳤다.


아이들은 용감하게 싸웠지만, 바퀴벌레처럼 쏟아져 나오는 이 디지몬인지도 확실하지 않은 존재들과 맞서 싸우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나마 칭롱몬의 도움으로 궁극체로 진화할 수 있게된 아이들이었지만, 수적으로나 전략적으로나, 아이들은 열세에 몰려있었다.


코시로의 의견에 따르면, 이 지고 있는 싸움을 타파할 방법은 단 하나였다— 이 전쟁을 모두 내려다보고 있는 적의 수장을, 마왕몬을, 쓰러뜨리는 것.


킹이 쓰러지면 다른 말들은 자연스레 무릎을 꿇는다— 

체크메이트. 그랬다. 


이미 지칠대로 지치고 다칠대로 다친 아이들은 이 모든 것을 하나의 체스판으로 생각하는 듯한 코시로의 말을 탐탁지 않게 여겼지만, 다이스케만은 달랐다.


“그러니까, 누군가 적진 한가운데에 들어가서 그 녀석을 혼쭐내버리면 된다는 거 아냐?”


무식하리만치 단순한 얘기였지만, 다른 방도가 없었다. 늘 타케루나 코시로와 체스를 즐겨두던 켄은 상대를 꾀어내어 승리를 쟁취하는 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코시로가 얘기한 것이, 다이스케가 자처한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도.


미끼.


살을 주고 뼈를 취한다 했던가. 게임에서도, 전쟁에서도, 늘 있는 일이었다. 상대가 혹할만한 먹잇감을 던진 다음, 그들이 그것에 정신이 팔렸을 때 공격하는 것. 


하지만, 미끼의 운명은—


적에게 비하면, 다이스케는 힘 없는 폰이었다. 퀸으로, 나이트로, 비숍으로 진을 치고 있는 적진 한가운데에 무식하게 뛰어드는 폰. 성과없이 잡아먹히겠지만, 상대의 헛점을 찌를 수 있는 빈틈을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는 폰.


“다이스케—“


무거운 침묵이 깔린 가운데, 타이치가 조용히 다이스케의 어깨를 잡았지만, 그는 모든 걸 안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선배를 돌아보았다. 자신이 자처하고 있는 이 역할이 무엇인지 가장 잘 깨닫고 있는 것은 다이스케 그 자신이었다. 앉아서 이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지 탁상공론이나 펼치고 있는 켄과 다르게, 다이스케는 행동으로 옮기고 있었다.


왜일까, 웃음이 나왔다. 

상황과 전혀 맞지 않았지만, 전형적인 다이스케같은 저 행동에 켄은 미소를 머금지 않을 수 없었다.


“나도 가겠어.”


결심이 선 켄이 나지막이 말했고, 아이들은 일제히 그를 돌아봤다.


“켄, 너 미쳤어?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기나—“


자신의 옆에 앉아있던 다이스케가 목이 부러질 듯이 빠르게 고개를 돌려 외쳤지만, 곧이어 자신의 손을 꾹 잡는 켄의 행동에 말문이 막힌 듯, 뚝 하고 중간에 말을 끊었다.


“나도 잘 알아. 하지만 다이스케 군, 설마 황제드라몬 없이, 혼자서 마왕몬을 상대할 셈이야?”


웃으며 켄이 대답했고, 다이스케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


그 때.

그 때 그를 말렸더라면.


다이스케에게 이게 무슨 미친 짓이냐며 그의 어깨를 잡고 흔들어댔더라면.

주먹을 쓰는 한이 있더라도 그 녀석을 붙잡아둘 수 있었더라면.

멍청하게 거기서 그의 바보같은 작전에 굴복하지 않았었더라면.


마왕몬의 함정에 보기좋게 빠져 적들에게 포위당할리도 없었을 것이고, 그의 부하들에게 공격당할리도,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공격을 피하지 않고 무책임하게 그저 죽음을 받아들이려 했을리도—


그리고, 그 녀석이 대신 자신 앞에 뛰어드는 일도—

모두 없었을텐데.


내 탓.


그랬다.

이 모든 것은 자신의 탓이었다.


나 때문에.


멍청한 나 때문에...



허억—


날카롭게 들이마쉬는 숨과 함께, 켄은 두 눈을 떴다.


눈부신 흰 색으로 도배된 흐릿한 두 눈 앞의 세상에, 다이스케의 얼굴이 아련거렸다. 닿을 듯 닿지 못할 거리에서 웃고 있는 그 녀석을 향해 손을 휘저었지만, 닿을 수 없었다. 


같이 가. 


하고 싶은 말이 잔뜩인데, 어디 가는거야.

아직 내 말 끝나지 않았단 말이야.


가지마.


고마워.


미안해.


... 사—


그 순간, 누군가 허공을 휘젓고 있던 그의 손을 잡았고, 흐릿해지던 눈의 초점이 갑자기 돌아온 켄은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아니, 그건 다이스케가 아니었다. 

몇몇 선택받은 아이들이, 옹기종기 그의 침대 옆에 모여있었다.


켄은 그들이 입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지만, 그 어떤 것도 듣지 못했다.

다시 고개를 천장으로 돌린 그는, 자신이 살아있음을 자각했다.


병원.


그는 무책임하게 살아남아, 혼자 병실에 누워있었다.



***



“켄—“


멍하니 침대에 앉아 벽을 응시하고 있는 보랏빛 머릿결의 아이에게 아이들이 말을 걸어보려 했지만, 그는 그저 묵묵부답이었다. 몇 시간동안이나 그렇게 앉아있는 그를 걱정스런 눈으로 쳐다보는 아이들이었지만, 켄은 그들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있었다. 마치, 허공에 있는 누군가와 대화하는데 열중하고 있는 듯.


“이치죠우지 군. 다이스케 군 말인데...”


켄이 마침내 고개를 돌린 것은 타케루가 조용히 다이스케의 이름을 꺼냈을 때였다. 


그 후에 무슨 말이 올지, 켄은 알지 못했다. 

살아남았어? 죽었어? 다 네 탓이야? 


그래. 그거였다.


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다이스케가 죽었어.


너 때문—


“아직 살아있어.” 


쌕쌕대던 켄의 숨소리가 순간 멈췄다. 


“의식불명 상태긴 하지만— 수술이 성공적이어서—“


그 다음 말은 더이상 켄에게 들리지 않았다. 이불을 던지고 일어나려고 한 그였지만, 곧이어 자신의 다리에 심각한 통증을 느낀 그는, 다시 침대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제서야, 켄은 자신이 깁스를 하고 있음을, 자신의 온 몸이 붕대로 감겨져 있음을 알아챘다. 하지만 이런 생채기 따위가 중요한게 아니었다— 지금은 자신의 몸이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다이스케 군을 봐야겠어,”


켄이 중얼거리며 다시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의자에 앉아있던 타케루가 벌떡 일어나 그런 그를 다시 침대에 눕혔다.


“그 몸 상태로 어딜 가려는 거야. 제발 자기 몸도 생각—“


“내 몸이 뭐가 어째서!”


병원에서 깨어난 뒤로 자신에 대한 화를 참고 있던 켄의 감정이, 마치 부글부글 끓어오른 활화산처럼 폭발해버렸다. 


늘 선하게 미소만 짓던 아이의 분노 섞인 목소리에, 아이들은 모두 순간 움찔했다. 

켄의 몸은, 마치 그때처럼 온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켄 군 탓이 아니야—“


타케루 뒤에 서있던 히카리가 조용히 말했지만, 이미 켄에겐 들리지 않았다. 아이들의 손길을 뿌리치고 몸을 일으킨 켄은, 이미 그를 말리기를 포기한 이오리에게 다이스케의 병실 번호를 듣고, 절뚝거리며 자신의 병실을 박차고 나갔다.



***



드르륵-


켄이 병실의 문을 열자, 구석의 침대 옆에 앉아있던 타이치와 다이스케의 누나 준을 포함한 몇몇 사람들이 고개를 돌렸고, 곧이어 켄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켄—“


걱정스런 표정을 지은 죠가 벌떡 일어나며 말했지만, 타이치가 곧이어 그의 어깨를 잡더니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멍하니 문 앞에 서있는 켄을 뒤로한 타이치는 침대 옆에 있던 사람들에게 무어라 말했고, 그러자 곧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하나둘씩 병실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침대에 시선이 고정되어 있는 켄의 어깨를 꽉 잡았다 놓은 타이치는, 말 없이 마지막으로 다이스케의 병실을 떠났다.


절뚝, 절뚝—


천천히 다이스케의 침대로 걸어가는 시간이 마치 영원같았다. 


의식불명이라는 얘기는 들었지만— 그래서, 그가 대답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 따위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뭐라고 해야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살아있어서 다행이다? 구해줘서 고마워? 바보같은 짓 해서 미안해?


절뚝, 절뚝— 턱.


침대 앞에 다다른 그는, 말없이 다이스케를 내려다 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꿰맨 자국이 몇 군데 있었고, 제대로 닦아내지 않았는지 말라붙은 핏자국이 이마에 남아있었다.


켄은 천천히 손을 뻗어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것만 같이 핏자국이 서려있는 그의 이마를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마치, 그때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도움을 청하지도 못하고, 끝까지 자신을 지켜주고 걱정해주다 정신을 잃은 그를 붙잡고 울기만 하다가 기절해버린 자신이 새삼 혐오스러워져 버린걸까. 입술을 굳게 깨물고 손을 천천히 거둬들인 켄의 눈에서 또다시 눈물이 한줄기 흘러내렸다.


“일어나줘, 다이스케 군.”


떨리는 목소리로 마침내 말을 내뱉었지만, 어찌보면 당연하게도 그 어떤 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


천천히 다시 손을 뻗었지만, 왜인지 그를 다시 만질 수 없었다. 바로 앞에 자신을 구해준 아이가 누워있음에도, 닿지 못할것만 같았다. 그리고 이대로, 영원히 닿지 못할까 두려웠다.


“미안해.”


켄이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는, 더듬거리며 말을 내뱉었다.


“고마워.”


“... 좋아해.”


주체할 수 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않은 채, 켄은 이번에도 또 다이스케를 그저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니까, 제발.”


“깨어나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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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케히카 - 너무 커버린 너

2015년 3월 20일


특별한 사건은, 늘 가장 평범한 날에 찾아오는 법이라 했던가.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어느날- 쨍쨍하게 내리쬐는 햇빛 아래, 한 때 자신의 형제남매가 입었던 것 같은 녹색 교복을 입은 두 아이가 왁자지껄 떠들며 길을 따라가고 있었다. 


그림자 밑에서 울어대는 매미가 알려주듯, 덥디 더운 이 한여름날에 고개를 끄덕이며 키득이던 금발의 아이는, 뜨거운 날씨와 대조되는 그의 사파이어빛 눈을 그의 옆에 있던 학우에게서 떼지 않고 있었다.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던 밝은 갈색 머리를 핀으로 고정한 여자아이 또한, 그녀의 붉은 빛이 감도는 마호가니 색의 눈동자를 그에게서 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여느날과 다를 바 없는 하굣길이었다.

아니,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말이야, 타케루 군—“ 


보랏빛 단발머리를 지닌 아이와 꼭 누군가를 연상시키듯 고글을 쓴 아이의 평범할 듯 평범하지 못했던 축구 경기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던 히카리가, 마침내 키득거림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자연스레 키가 더 큰 타케루의 눈을 마주하려 고개를 위로 들었을 때에는, 늘 그녀를 내려봐주던 강아지처럼 처진 눈 대신, 붉은 벽돌만이 히카리를 마주하고 있을 뿐이었다. 


갑작스레 사라진 그녀의 하굣길 동무의 행방에 당황한 히카리는 그가 어디 숨어있는게 아닐까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골목길 하나 없이 일자로 이어지는 뻥 뚫린 길가에, 사람이— 하물며, 그처럼 키 크고 눈에 잘 띄는 아이가— 숨을 곳은 없어 보였다.


머리를 긁적이며 그의 이름을 외치려던 히카리는, 그제서야 누군가 자신의 옷을 잡아당기고 있음을 깨달았다.


“죄송합니다. 여기가 어디에요?”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고개를 내린 히카리는, 믿을 수 없는 광경과 마주했다.


뒤집어 쓴 초록색 모자. 매치되는 색의 긴팔 셔츠. 그녀가 잘 아는 옷차림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어렸을 때에도 변함없이 빛나는 금발 머리와 호수같은 파란 눈동자.


이건 의심의 여지 없이 그녀가 아는 타케루였다.


“어— 어... 타케루 군?”


“절 아세요?”


몇년 전, 디지털 세계에서 보았던 그 표정을 지으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타케루를 말없이 바라보던 히카리는, 이것이 어쩌면 또다른 나쁜 디지몬의 소행이 아닐까 생각했고, 이게 진짜 타케루인지 시험해보기로 했다. 


“너... 타카이시 타케루 맞지?”


“그런데요?”


“이시다 야마토가 형이고?”


“형아를 아세요?”


“... 파타몬은 어디있니?”


그 질문에 순간 놀란 듯한 표정을 지은 타케루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는 듯, 

끙. 하는 소리와 함께 머리를 긁적이더니, 히카리를 다시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디지털 세계에 있어요. 못 만난지 꽤 된걸요.”


옛날 같았으면 그런 얘기를 하면서 울었을 텐데. 히카리가 생각했다.


“그렇구나.”


“누나도 디지몬에 대해서 알아요?”


“...”


이번엔, 히카리가 적당한 대답을 찾지 못하고 헤맬 차례였다. 이 상황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할지 당황스러웠던 히카리였지만, 곧 현재의 타케루가 여기 없다는 것은, 타케루가 무슨 연유에선지 어려져 버렸다는 뜻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자신이 누구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얘기해야 할까 잠시 고민했지만, 곧이어 솔직한게 좋은 것이라고 얘기하던 어떤 핑크빛 머리의 언니가 생각난 그녀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꼬마 타케루에게 사실을 털어놓기로 결정했다.


“실은 말야 타케루 군, 타케루 군이 어려져 버린 것 같아.”


“에?”


“내가 누군지, 여기가 어딘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


“누나가 누군데요?”


“내가 히카리야. 중학생이 된 야가미 히카리.”


“에에엣? 히— 히카리? ... 누나?”


어정쩡하게 뒤에 존칭을 붙이는 타케루를 보며 히카리가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그러면, 히카리... 누나, 파타몬은 잘 지내?”


“그럼, 잘 지내지.”


“테이르몬도?”


“물론.”


“누나도?”


“그럼, 잘 지내지.”


“누난 나 없이도 잘 지내?”


“응? 무슨 소리야, 타케—“


“난 아니야.”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끊은 타케루를 바라보던 히카리는, 그제서야 그들의 첫번째 여행이 끝났을 때를 기억해냈다. 그래, 타케루는 첫 모험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아 오다이바에서 떨어진 곳으로 이사를 갔었다— 초등학교 5학년이 되어 다시 만나 그들의 두번째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 그들은 다시 만나지 못했었었으니.


“난 안 괜찮아.”


타케루가 뾰루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렇게나 솔직하고 귀여울 때도 있었나, 히카리가 새삼스레 기억을 되짚어보며 생각했다. 확실히, 늘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는 지금 그녀의 동갑내기 소꿉친구보다 훨씬 더 순수한 그의 어린 시절이라...


“아냐, 나도 타케루 군을 못 봤었을 때 슬펐었는걸! 그래도 괜찮아, 우리, 곧 다시 만날테니까.”


“정말?”


“그럼. 5학년 때 모두 모여서 디지털 세계에 다시 갔었는 걸.”


“파타몬도 다시 볼 수 있는거야?”


“물론이지.”


“헤에... 그때도 나쁜 디지몬이랑 싸웠어?”


“응, 그랬지.”


“혹시— 혹시 파타몬은...”


타케루가 말끝을 흐렸지만, 히카리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곧 알아차렸다.


“아냐, 아무 일 없었어. 걱정하지 마.”


“다행이다... 누나는 나쁜 일 없었어?”


“음— 5학년 때 어둠의 바다라는 곳으로 끌려갔었지.”


“무서웠어?”


“응, 오빠도, 테이르몬도 없었는걸.”


“혼자는 무서워. “


“그 때 타케루 군이 구하러 와줬었어.”


“헤에—”


“멋지지? 3년 후의 너는.”


조금 전의 찡그린 표정은 어디 갔는지, 3년 후의 자신을 생각하며 싱글벙글 웃고 있는 타케루를 바라보고 있던 히카리가 엄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타케루 군이 이렇게 작아지니까 귀엽다.”


“에에— 누나, 그런 말은—”


“응? 왜, 싫어?”


“당연하지! 이제 다 컸다구!”


“귀여워...”


“아냐... 누나가— 누나가 더 귀여워... 요!”


“귀여워...”


히카리가 키득거리며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진 타케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부끄러운지 고개를 푹 숙이고 꼼지락거리는 자신의 발을 바라보고 있던 타케루가, 화제를 전환하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누나, 중학생의 타케루는 어때?”


“글쎄. 어떨 것 같아?”


“음— 키도 크구! 공부도 잘 하구! 멋있구!”


“하핫. 그래—”


“그리고!”


“그리고?”


“히카리 누나를 좋아하고 있을 거야!”


갑작스런 말에 할말을 잃은 히카리는 타케루를 쳐다만 볼 뿐이었지만, 그렇게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히카리를 올려다본 타케루는, 그러던지 말던지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누나는?”


“으— 응?”


“누나는 내가 제일 좋지?”


타케루의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터져나오는 실소를 참을 수 없었던 히카리는, 대답을 기대하고 있는 타케루를 쳐다보며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 오빠가 좋아.”


자신이 원하는 대답이 아닌 듯, 타케루는 벌떡 일어나더니, “타이치 혀어어어엉아—!” 라고 한참 공부하고 있을 (아니, 어쩌면 야마토 오빠와 놀러갔을지도, 히카리는 생각했다.) 타이치의 이름을 허공에 대고 불렀다.


“왜 그래, 어디 가?”


“타이치 형아한테 갈거야! 누나 미워!”


“푸핫—”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는 타케루였지만, 히카리는 웃음이 터져나오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에이, 장난이야, 타케루 군. 가지 마.”


그리고, 그렇게 중학생 히카리는 어린 일곱 살 타케루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비록 늘 얘기를 나누곤 하지만, 이렇게 마음을 터놓고 얘기한 것이 얼마만일까— 히카리는 생각했다.


“타케루 군.”


“응?”


“타케루 군이 원래대로 돌아오면 조금 섭섭할 것 같은데.”


“왜?”


“글쎄— 귀엽고, 솔직하잖아. 날 좋아해주고.”


“중학생의 나는 아니야?”


히카리는 그 질문에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타케루에겐 뭐랄까, 마음의 장벽이 있는 것만 같았다. 가장 마음 고생이 심할테면서도, 안에서 가장 힘들어할 때에도, 늘 겉으로는 웃고 다른 사람들을 대해주는 그. 그를 그렇게 잘 알았기에 오히려 그의 마음을 가늠할 수 없었던 걸지도 모른다. 타케루의 '진심'을.


“... 잘 모르겠어.”


히카리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


“그렇지 않다니?”


“난 그대로야.”


“타케루 군—”


“중학생이 되서도, 난 그대로일거야.”


“헤에. 하지만 중학생이 된 타케루 군은 예전처럼 자신의 마음을 말해주지 않는 걸.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게 아닐까?”


“아니야!”


“그래?”


“난 언제나 히카리에게 솔직한 걸!”


“에—”


“히카리 누나에겐 마음을 숨기지 않을꺼야!”


히카리는, 아무 말 하지 않고 얼굴에 호선을 그리며 타케루의 머리를 쓰담을 뿐이었다.


“그럼, 약속해줄래?”


“뭘?”


“다시 돌아와서도, 지금 말했던 것처럼, 솔직해지겠다고.”


하늘을 올려다본 히카리가, 갑작스레 부는 바람을 느끼며 말했다. 어려진 타케루와 대화를 나누고 있자니, 더위도, 시간도 모두 망각해버린 것 같았다. 눈쌀을 찡그리게 내려쬐는 햇빛 너머로, 누군가의 푸른 눈을 연상케 하는 하늘을 바라보던 그녀에 귓가에, 마치 멀어져가는 옛 연인의 작별인사같은 흐릿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물론이지, 약속할게! 남아일언중천금인걸.”


“핫. 타케루 군, 그런 말도 알—”


하지만 히카리가 다시 고개를 내렸을 때, 타케루는 자취를 감춰 버린 것 같았다. 데자뷰일까, 마치 이 모든 일의 시작처럼,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 처진 눈 대신, 익숙한 붉은 벽돌만이 그녀를 마주하고 있을 뿐.


“꿈이었을까.”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는 히카리 앞에, 다시, 중학생의 타케루가 나타났다.


“히카리 쨩! 찾고 있었잖아. 갑자기 어디로 사라졌던 거야?”


“다시 돌아왔네.”


“에? 무슨 소리야?”


“... 약속은?”


“무슨 약속?”


“... 아무것도 아냐. 걱정하게 해서 미안. 어서 가자.”


히카리가 쓴웃음을 짓고는, 무릎을 탈탈 털고 가방을 집어들며 말했다.


아무일 없다는 듯이 길을 따라 걸어가는 히카리를, 타케루는 그저 쳐다만 볼 뿐이었다. 원래 같으면 그녀를 따라가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모든게 괜찮은 것인지 물어볼 그였지만, 그녀를 찾아 헤매이느라 흘린듯한 땀에 젖은 금발 머리를 지닌 그 아이는, 왜인지 그 자리에 그저 가만히 서있을 뿐이었다.


입술을 깨물며 멀어져 가는 그녀를 바라보던 타케루가, 입을 열었다.


“잊지 않았어—”


우뚝 멈춰선 히카리의 뒷모습에 대고, 그가 조용히 덧붙였다.


“... 남아일언중천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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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octor B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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