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케히카 - The Persistence of Memory
2015년 12월 3일
연성 키워드 진단메이커
타케히카의 연성 키워드는 시곗바늘, 셔츠, 참을 수 없는 입니다.
***
눈부신 햇빛이 그림자를 모두 불태워버릴 기세로 내리쬐는 화사한 여름날, 붉은 셔츠 덕에 더 빛나는 금색 목걸이를 한 여자아이가 자신을 비추는 햇님보다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걷고 있었다.
이마를 타고 흐르는 한줄기 땀을 닦아내고, 삐쳐나온 마호가니 색의 머리를 천천히, 하지만 신중하게 머리띠 안으로 다시 집어넣은 야가미 히카리는, 아파트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높게 서있는 아파트를 한번 올려다본 그녀는, 할 수 있다고 자신에게 주문이라도 거는 듯 짧은 숨을 내쉬고는 엘레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서로 이런저런 일로 바빴던데다 그녀의 오빠 타이치가 여름 감기까지 걸려버렸던 탓에 만날 날을 쉬이 잡지 못했었지만, 마침내 만날 약속을 잡은 만큼, 히카리는 무척이나 들떠있었다. 정말 며칠만에 남자친구와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된 것인가- 그것도 단둘이서만!
층수를 알리는 낭랑한 목소리와 함꼐 엘레베이터 문이 열리고, 히카리는 천천히 그의 집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2시 5분.
손목에 찬 시계를 내려다본 히카리가 중얼거렸다.
약속한 시간보다 25분이나 일찍 도착했네.
시계를 차지 않은 반대쪽 손을 들어 초인종을 누르려던 그녀는, 예상치 못한 상황과 마주했다-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갑자기 열리더니, 그녀보다 키가 큰 금발 여자 한명이 한쪽 발을 들어 구두를 고쳐신으며 나왔기 때문이었다.
"어머, 히카리 아니니?"
히카리의 앞에 서있는 것은 다름아닌 나츠코 상이었다- 타카이시 타케루의, 히카리의 남자친구의 어머니. 순간 몸이 굳어진 히카리는, 그 자리에 잠시 가만히 있었지만, 곧이어 정신을 차리고 웃으며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타케루를 보러 왔나보구나? 일 때문에 나가려는데 딱 마주쳤네. 타케루는 지금 샤워 중이니까, 잠깐만 안에서 기다리려무나. 먹을 거라도 가져다 주고 싶지만, 빨리 가야해서 말야. 그럼, 재밌게 놀다 가렴!"
히카리가 답을 할 새도 없이, 속사포로 말을 내뱉은 나츠코는 급한 듯,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는 또각또각 거리는 하이힐 소리와 함께 복도 너머로 멀어져갔다- 멍하니 열린 문을 잡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히카리를 뒤로 하고.
현관문을 닫고, 조심스럽게 신발을 벗어 한쪽으로 놔둔 히카리는, 쏴아아아- 하고 들리는 샤워기 소리를 들으며 익숙한 타케루의 방으로 걸어들어갔다. 그의 침대에 걸터앉아 한숨을 내쉰 히카리는, 자신이 왜때문인지 안도하고 있음을 느꼈다.
내가 안도감이 들만한 일이 뭐가 있지?
자신의 감정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고 있던 히카리는, 문이 열리고 타케루의 어머니를 보았을 때 순간 자기도 모르게 멈칫했던 것을 곱씹어 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왜 그랬는지도.
설마, 나 타케루 군이랑 단 둘이 있는게 아니라 어머니도 같이 계시는거라고 생각해서 실망했던거야?
자신만의 결론에 도달하고 얼굴이 확 붉어진 히카리는, 발을 동동 구르다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혹시라도 타케루가 샤워를 끝마치고 나왔을 때, 며칠만에 그가 처음 보는 그녀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새빨개진 게 아니기를 바랐기 때문이었으랴.
또다시 한숨을 내쉬며 마음을 가라앉힌 히카리는 양 손을 다시 침대에 맥없이 내려놓고는, 풀썩- 하고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나도 참, 부끄럽게.
그제서야, 히카리는 무언가 바스락거리며 그녀의 등을 간지럽히고 있음을 깨달았다.
다시 벌떡 일어나 고개를 돌리자, 침대에는 그녀가 조금 전까지 깔고 누워있던, 그가 아무렇게나 벗어둔 것 같은 와이셔츠가 있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그의 옷을 집어드는 히카리의 심장이, 다시금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살짝 떨리는 손으로 셔츠를 돌려보자, 셔츠에는 구김 자국이 있었지만 (그녀가 깔아뭉갰었다는 점을 제외하더라도), 깨끗해 보였다- 오늘 아침에 입었다가, 샤워를 하려고 벗어둔 것이 분명한 듯.
타케루가 아침에 샤워를 끝마치고 이 하얀 셔츠를 맨 몸 위에 입는 것을 상상하니, 얼굴이 어찌나 또 시뻘겋게 달아오르는 것 같은지. 간신히 그런 생각을 떨쳐냈을 때 다음으로 든 의문점은, 그가 그녀보다 얼마나 체격이 더 클까 하는 점이었다.
그냥 위에 걸쳐도 입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저도 모르게 와이셔츠에 달린 검은색 버튼을 두 손가락 끝으로 만지작거리던 히카리는, 조심스럽게 셔츠를 이미 입고 있던 옷 위에 걸쳐보았다. 그녀가 예상한 대로, 사이즈가 컸던 셔츠의 소매는 그녀의 팔을 가리고도 남아 끝에 대롱대롱 흔들리고 있었고, 단추를 잠그고 나서도 어린이 한명이 더 들어갈만한 자리가 남을만큼 낙낙했다.
손목을 흔들 때마다 시계추처럼 같이 흔들리는 소매를 쳐다보다, 다시 셔츠를 제자리에 놓아두려 단추를 푸는 그 순간, 예기치 못하게 방문이 덜컥- 하고 열렸다.
"히- 히카..리 쨩...?!"
"타케- 타케루 구-"
두 남녀는 얼어붙은 듯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츄리닝 바지만 입고, 상의를 벗은채로 젖은 금발 머리를 말리며 아무 생각 없이 방문을 열은 타케루와, 달랑거리는 소매 밖으로 간신히 손을 꺼내 호기심에 입어본 그의 셔츠를 벗으려던 히카리. 쉰 목소리로 서로의 이름을 부르고 서로를 쳐다보는 그 불편한 시간이 어찌나 영원같던지.
떨어지지 않는 입을 어떻게든 열어 변명을 하려던 히카리에 눈에 들어온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궁금해하던 그의 체격이었다.
처음 보는 그의 상체. 보디빌더처럼 우락부락하진 않았지만 몇년간 농구를 한 덕에 잔근육이 단단하게 발달해 있는 그의 몸. 히카리의 눈이 타케루의 쇄골에서부터 가슴으로, 복근으로 내려갈수록- 그녀의 얼굴은 한없이 더 붉어지고 있었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은 타케루도 마찬가지였다- 여자친구가 집에 이미 와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해서 자신의 맨 몸을 의도치 않게 보여준 것은 둘째치더라도, 그가 아무렇게나 벗어둔 셔츠를 그녀가 입고 있을 줄이야!
혼란과 부끄러움 속에 거칠어지는 숨소리.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선, 뭐라고 말이라도 해야함을 알았지만, 타케루의 머릿속은 이미 다른 것으로 가득차 있었다- 자신의 셔츠를 입고 있는 히카리가 어찌나도 귀여운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그녀를 향한 사랑이 냄비를 타고 흘러내리는 거품처럼 다른 생각들을 쫓아내기라도 하는 듯.
이미 부끄러움도, 당황스러움도 모두 잊고 서로를 넋 놓고 쳐다보던 두 연인 중에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히카리였다.
"타- 타케루 군, 미안해, 내가 그러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그게, 그- 지금 당장 돌려줄게-"
그제서야 타케루도 정신을 차린 듯, 버벅거리며 히카리에게 달려갔다.
"아냐, 내가 갑자기 들어와버려서 그래, 미안해 히카리 쨩, 내가 도와줄-"
침대에 앉아서 단추를 풀려고 하는 히카리와, 그녀를 도와주겠답시고 후다닥 손을 뻗은 타케루.
타케루가 히카리의 손을 단추 대신 잡은 것도, 그녀가 중심을 잃고 침대로 풀썩 쓰러진 것도, 타케루가 얼떨결에 왼손은 침대에, 오른손은 히카리의 손을 잡고 그녀를 내려다보게 된 것도, 다 당연한 수순이었을지도.
또다시, 그렇게 그 둘은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훨씬 더 가깝게, 훨씬 더 위험하게.
이보다 사람의 얼굴이 더 붉어질 수 있을까? 마치 시간이 멈춘 듯, 터질것 같은 표정을 하고 서로를 바라보는 그들 사이에는 침묵만이 가득했다. 천천히 똑-딱- 거리는 시곗바늘의 소리만이, 두 남녀의 심장소리와 대결이라도 하듯 크게 울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둘은 전혀 눈을 돌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은은하게 빛나는 분홍색이 섞인 히카리의 갈색 눈 속으로 빠져들듯 그녀를 바라보던 타케루는, 원래같았으면 얼굴을 가리거나 고개를 돌렸을 히카리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을 똑바로 마주보고 있음을 느꼈다.
히카리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성은 그녀에게 얼굴을 돌리고 이 상황에서 벗어나라고 충고하고 있었지만, 그의 붉은 얼굴과 대비해 더 밝게 반짝이는 파도빛 눈동자에서 벗어나는게 가능할리가 없었다.
자신을 계속해서 바라보는 히카리의 눈빛에 홀리기라도 한걸까. 이 어색하고 불편해야할 상황에서, 그녀에게 입맞춤을 하고 싶은 욕망은 왜 계속 커지는 것인지. 계속 부정하고 또 부정했지만, 그의 머리 뒷편에선 늘 이런 상황을 바라오지 않았냐는 외침이 끊임없이 메아리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둑이 무너지듯, 타케루의 얼굴이 그녀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히카리의 손은 이미 그가 놓아준지 오래였지만, 그녀는 다가오는 타케루를 보고도 얼굴을 돌리지도, 이 상황에서 빠져나오려 하지도- 그렇다고 그를 밀쳐내지도 않았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그의 새하얀 피부와, 아직 다 마르지 않은 젖은 머리. 아랫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천천히 돌리는 그의 모습에 매료된 듯, 그녀는 떨리는 눈꺼풀을 파르르 감았다.
째깍거리는 시계 소리를 음악 삼아, 두 남녀의 입술이 천천히 맞닿았다. 키스를 해본 적이야 많았다지만, 이만큼 짜릿하고 강렬한 적이 언제 또 있었을까.
째깍-
그렇게 그들의 서로를 향한 사랑 속에 어느샌가 묻혀진 시계 소리.
째깍-
시곗바늘은, 그런 그들을 시샘이라도 하듯 빠르게 돌고 또 돌았다.
째깍-
해가 질때까지, 멈추지 않고...
***
추신:
단편 The Disintegration of the Persistence of Memory (기억의 지속의 해체)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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