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케히카 - 운명

연성/장편 2015. 11. 15. 05:27



타케히카 - 운명

2015년 4월 26일


어두컴컴한 하늘 너머, 반짝이는 별들이 하나같이 미소짓고 있는 어느 겨울밤— 지저귀는 새들마저 잠을 청하러 갔는지, 어둑어둑 땅거미가 지고 있는 공원은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단 하나, 홀로 등을 돌리고 앉아있는 여린 여자아이에게서 흘러나오는, 속삭이듯 조용한 울음소리만을 제외하고.


오늘은, 오늘은 모두에게 행복한 날이었는데. 왜 어째서? 


입술을 깨물고, 터져나오는 울음을 간신히 삼키고 있는 중학생 야가미 히카리가 자신에게 되물었다.



***



결승전. 


그랬다. 오늘은 그녀의 단짝친구 타카이시 타케루가 속한 농구부가, 다른 중학교와 결승전을 치루는 날. 이상할 것 하나 없는 하루였다. 당연하게도 선택받은 아이들이 모두 모여 그를 응원했고, 그녀 또한 그곳에 있었다. 공을 손에서 놓지 않고 코트를 종횡무진하며 팀을 승리로 이끄는 그를, 또 자신들을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드는 타케루를 보며, 히카리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시합이 오다이바 중학교 팀의 압승으로 끝난 후, 히카리는 그녀의 타케루의 모든 농구 시합에서 늘 그랬듯이, 수건과 물통을 집어들고, 타케루를 향해 뛰어내려가는 다른 아이들의 뒤를 따랐다.


“장하다 내 동생!”


“너 이 자식, 정말 타고났는걸!”


팀원들과 친구들에게 둘러쌓여 칭찬과 축하를 받고 있던 타케루에게, 어떤 여자아이가 다가온 것은 바로 그 때였다. 불쑥 나타난 그 아이에게, 자연스레 타케루의 땀을 닦아주려던 히카리를 포함해서,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히카리는 한눈에 그녀를 알아볼 수 있었다. 코토네— 그녀는 타케루와, 그리고 히카리와 같은 반이었다. 사교성 좋고, 인기 많고, 여러모로 다른 학생들의 동경을 받는 아이. 그녀도 타케루를 축하해주러 온 것이었을까—


“정말 멋졌어, 타케루 군! 축하해!”


코토네가 자연스레 물통과 수건을 타케루에게 건네며 말했다. 순간 멈칫한 듯한 타케루는 곧이어 환하게 웃으며 그녀의 호의를 받아들였고, 모두들 다시 왁자지껄 그를 축하하는 데 여념이 없어 보였다— 단 한 명, 야가미 히카리를 제외하고.


왜인지 히카리는 그 곳에 가만히 서 있었다. 무언가 자신의 역할을 빼앗긴 듯이. 하지만, 그래. 생각해 보면, 굳이 그녀가 늘 타케루를 챙겨주라는 법은 없었다. 그녀는 그의 가장 친한 친구였지만— 아니, 그게 다였다. 친구. 그의 어머니도, 그의 애인도 아닌, 그의 친구. 꼭 그녀만이 그를 챙겨줄 필요는 없지 않은가? 


어깨를 으쓱이며 이 상황을 무덤덤하게 넘기려는 히카리였지만, 마음 속에 무언가가 응어리져 있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정확히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가, 그녀를 답답케 하고 있었다.


‘내가 그저 늘 하던 일을 하지 않아서 그런 거겠지 뭐,’


그렇게 애써 생각하려는 히카리는, 누군가가 자신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려놓는 것을 알아차렸다. 내심 타케루의 손길을 기대한 히카리가 고개를 돌렸지만, 그 곳에는 익숙한 금발의 아이 대신 자신을 걱정스레 내려다보고 있는 그녀의 오빠, 야가미 타이치가 있었다.


“괜찮니, 히카리? 거기 멍하니 서서 뭐하는거야?”


“아, 아무것도 아니야, 오빠. 잠깐 딴 생각좀 하고 있었어. 근데, 타케루 군은?”


“씻는다고 들어갔지. 하여간에, 오늘 시합도 이긴 겸, 죠네 집에서 파티를 열기로 했는데-“


“에에?! 내가 언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죠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에이, 내 동생이 우승을 했는데, 그정도는 해줄 수 있지 않아, 죠!”


“아니, 그건 그거고!”


말도 안된다는 표정으로 반박하는 죠와, 그런 그에게 반 협박 및 반 설득을 하는 야마토를 바라보며 얼굴에 호선을 그린 타이치가, 윙크하며 히카리에게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타케루한테 무작정 얘기를 하긴 했지만 말야, 좀 데리고 와주지 않겠어?”


“알았어, 오빠.” 히카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리고, 그렇게 왁자지껄 떠드는 아이들과 죠와 어깨동무를 하며 야마토의 편을 들어주는 타이치를 뒤로 한 채, 히카리는 웃으며 체육관을 떠났다. 


마음 속에 진 응어리는 이미 잊어버린 채로.



***



히카리는, 양손에 음료수를 하나씩 쥐고 헐레벌떡 계단을 뛰어내려오고 있었다.


‘왜 하필이면 이럴 때 자판기가 고장이 난담. 타케루 군이 먼저 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계단 아래에서 노을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는 금발을 발견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곧이어 타케루의 이름을 부르려던 히카리는, 그가 그림자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저게 누구지?


그녀의 궁금증은, 그림자 속의 인물이 입을 염으로써 해결되었다. 


“오늘 시합 정말 대단했어. 다른 선수들이 쫓아오질 못하던 걸.”


코토네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왜인지 떨리고 있었다— 타케루가 뭐라고 대답을 했지만, 히카리는 코토네의 다음 말에 정신이 팔려, 그의 대답을 듣지 못했다.


“그래서 말인데, 있잖아, 타케루 군... 실은, 네가 이번 시합에서 승리하면, 고백하기로 마음 먹었었거든.”


“에—“


“나랑, 사귀어주지 않을래?”


계단 위에 서있던 히카리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가 무너져 내렸다. 그녀의 친구가 방금 고백을 받았는데— 그것도, 저렇게나 인기 많은 여자아이에게. 자리를 비켜주고, 그가 그녀와 사귀기로 결정한다면 그를 축하해주고, 응원해주는 것이 응당 친구로써의 도리가 아닌가? 하지만, 히카리는 그들을 바라볼 수 없었다. 코토네의 다음 말도, 타케루가 뭐라고 하는지도 들을 수 없었다. 마치 멀어져가는 과거의 기억처럼, 그들은 히카리에게서 점점 더 멀리 떠나가고 있는 것 같았다.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는. 디지털 세계보다 먼 저 어딘가로.


애초에, 설레는 순정만화 같은 연애 이야기는, 모든 여자아이가 좋아할 법한 소재가 아니었나? 그 대상이 자신의 친구라면, 더더욱. 하지만, 히카리는 자신의 절친한 친구라고 생각했던 타케루의 연애사를 바라보고 있자니, 재미보단 불안이— 파도처럼 그녀를 덮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왜?


왜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척, 푸른 눈이 잘 어울리는 저 금발의 아이를 부를 수 없는 것일까. 왜 그녀는 코토네와 타케루가 붙어있는 모습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은 것일까. 왜 그녀의 심장이, 누군가 쥐어짜는 것처럼 아픈 것일까.


어째서— 마치 세상의 사활이 걸린 것 마냥 초조함과 불안함이 그녀를 엄습하는 걸까?


차가운 느낌이 그녀를 뱀처럼 감싸올랐고, 알 수 없이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한 채, 히카리는 타케루와 코토네를 뒤로 하고 계단을 뛰어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발자국 소리를 타케루가 들은 것인지, 아니면 그저 코토네에게 대답을 하는 것이었는지는 몰랐지만, 타케루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하지만, 어느 쪽이었던, 마치 지금 바깥 풍경처럼— 겨울 바람 앞에 하늘하늘 떨어져 바스라지는 나뭇잎처럼— 타케루의 목소리는 히카리에게 닿지 못했다.





살을 에는듯한 매서운 바람이 부는 겨울밤, 검은 비니를 쓰고 목도리를 두르고 있는 남자아이 하나가 그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가로등 아래에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언질받은 대로 자신의 선배, 키도 죠의 집으로 찾아간 타카이시 타케루는, 자신의 둘도 없는 친구가 자신과 원래 같이 왔어야 했음을, 그리고 그녀가 그러지 않았음을— 즉, 어딘가로 사라졌음을 깨닫고, 그녀를 찾으러 학교를 샅샅이 뒤지다 뛰쳐나온 참이었다.


거친 숨을 내뱉으며 입술을 깨문 타케루는, 왜인지 코토네가 자신에게 고백할 때 얼핏 들었던 발소리가, 히카리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구심을 떨쳐낼 수 없었다.


어느 쪽이던, 히카리를 찾아야만 했다.



***



결승전.


오늘은 그의 농구부가 그렇게 고대해왔던 결승전이었다. 타케루가 오다이바 중학교에, 그리고 나아가 농구부에 입부한 이후로, 그들은 연전연승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 시합에서 승리함으로써, 무패의 전설에 쐐기를 박을 참이었다.


상대의 전략을 분석하고 끊임없이 연습한 만큼, 타케루와 그의 팀원들은 시합을 승리로 이끌었고, 타케루는 골을 넣을 때마다 그의 친구들을 향해 엄지를 치켜세우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그의 가장 친한 친구, 야가미 히카리를 향해서.


시합이 끝난 후, 이슬처럼 맺힌 땀을 닦아낸 타케루는, 자신을 향해 환호하는 친구들을 향해 다가갔다. 짧게 친 머리를 쓸어넘기는 형도, 성게같은 머리와 단발머리를 한 동갑내기 친구들도, 그리고 모험을 같이 하며 동고동락한 다른 선택받은 아이들도 그를 보며 축하해주고 있었지만, 그의 시선은 그의 단 한명만을 향하고 있었다.


자신을 향해 언제나같이 따스한 미소를 짓고 있는 히카리를 바라보고 있자니, 그 어떤 건강식보다 빠르게 시합의 고된 피로가 사라져가는 듯 했다. 그렇게 그녀에게 손을 뻗으려는 순간—


“정말 멋졌어, 타케루 군! 축하해!”


누군가가 그에게 다가오며 외쳤다. 순간 움찔한 타케루는 옆을 바라보았고, 같은 반의 코토네가 자신을 보며 싱긋 웃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잠시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던 타케루는, 곧이어 웃음으로 그녀에게 답하며 물통과 수건을 받아들였다.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닦고, 물로 메마른 목을 축였지만, 그의 심장은 무언가를 더 원하고 있었다. 익숙한 손길이, 익숙한 목소리가, 익숙한 미소가 필요했다. 


하지만 왜?


‘히카리 쨩이 늘 날 챙겨줬으니까, 그냥 익숙하지 않아서였을까.’ 타케루가 물을 마시며 곰곰히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그녀에게 무언가를 더 바라고 있었다. 친구로써의 친근함이 아닌 무언가를.


히카리 쨩은 나에게 정확히 뭐지?


하지만, 타케루가 자신의 물음에 답하기도 전에, 히카리의 오빠, 야가미 타이치가 말썽꾸러기 같은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기에, 타케루는 자신만의 망상에서 빠져나와야만 했다.


“있잖아 타케루, 너 우승 기념으로, 죠네 집에서 파티를 열려고 하는데.”


“네? 하지만 죠 상은 그런 말을—“


“쉿. 죠네 집에 그냥 쳐들어 갈거야. 다들 가 있을테니까, 씻고 정리하고 와, 알았지?”


“푸하, 네.”


터지려는 웃음을 애써 참으며 대답하는 타케루를 보며 미소지은 타이치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더니 곧이어 똑같은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를 지으며, 야마토에게로 다가갔다.


피식— 실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은 타케루는, 고개를 들어 히카리를 바라보았다. 자신에게 등을 돌리고 무언가에 집중하듯이 가만히 서 있는 그녀를 본 그는, 그녀에게 다가가 말을 걸어볼까 생각했지만, 곧이어 타이치가 그녀의 어깨를 잡는 것을 보고, 마음을 돌렸다.


다시 자신의 질문을 곰곰히 되짚어보며, 타케루는 샤워실로 향했다.


우리는 친구일까?


아니면 그 이상일까?



***



아직도 자신의 질문에 해답을 찾지 못한 타케루가, 머리를 긁적이며 가방을 들고 락커룸을 빠져나왔다. 밖이 춥다는 것도 잊어버렸는지, 외투도 제대로 걸치지 않은 그는, 죠의 집까지 걸어가며 혼자 생각할 시간도 가질 겸, 복도를 돌아 학교를 벗어나려고 했으나, 예상치 못한 사람과 마주치고 말았다.


“안녕, 타케루 군.”


“어, 어어, 코토네 쨩. 안녕.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어, 응.”


자신의 눈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는 코토네를 바라보며, 타케루는 그녀가 자신에게 무언가 할 말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곧이어, 그 할말이 무엇인지도.


“오늘 시합 정말 대단했어. 다른 선수들이 쫓아오질 못하던 걸.”


“아— 하하. 고마워. 아, 수건이랑 물도.”


타케루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생각은 다시 히카리를 향하고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어물쩡 말하는 코토네의 목소리가 그를 다시 수면 위로 끌어올렸고, 그는 다시 고개를 들어 그녀를 마주보았다.


“실은, 네가 이번 시합에서 승리하면, 고백하기로 마음 먹었었거든.”


“에—“


“나랑, 사귀어주지 않을래?”


타케루는 대답을 망설였다. 어찌보면 차가울 수도 있지만, 이미 그가 그녀의 의중을 알아차렸을 때부터,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코토네는 그의 친한 친구일 뿐이었다. 


하지만, 히카리는? 히카리는 과연 그의 그저 또다른 친한 친구일 뿐일까? 아니면 자신도 모르게 그녀와의 대화에, 그녀와의 접촉에 너무 익숙해져, 자신이 마음 속에서 키우고 있는 감정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게 아니라고, 그녀도 그저 친구일 뿐이라고 생각하려고 하고 있지만, 코토네가 자신에게 고백한 상황에서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히카리라면, 사랑을 논하려는 상황에서 가장 먼저 자신의 머릿속에 그려진 것이 히카리라면—


그렇게, 그의 머릿속은 이미 다른 종착점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무언가 해답이 보이는 듯하달까— 마치 그의 정신이 이 곳에서 빠져나와 다른 곳을 떠돌고 있는 느낌. 어둠 속에서 자신을 비추는 무한한 빛(光)에, 히카리(光)에 이끌려.


그 순간, 어디선가 들려온 우당탕 거리는 발자국 소리가 말없이 서있던 그의 환상을 깨뜨렸고, 그는 저도 모르게 “히카리?” 라고 조용히 혼잣말을 내뱉었다.


“타케루 군?”


“아— 아? 아... 미안, 코토네 쨩. 넌 좋은 친구지만, 난 널 그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아.”


타케루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고, 코토네는 씁쓸한 미소로 화답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네... 역시, 히카리 쨩 때문인거지?”


“엣—?”


하지만, 타케루가 차마 대답할 새도 없이, 그녀는 우승을 축하한다고, 대답해줘서 고맙다고, 그리고 내일 학교에서 보자는 말과 함께 복도를 돌아 그림자 너머로 사라져버렸다.


자신이 저도 모르게 몇 년 전부터 꾸준히 묻고 있던 질문에 대해 마침내 답을 얻은 타케루를 뒤로 하고.



***



조용한 밤. 어둠이 내려앉은 공원 한가운데에서, 타케루는 히카리를 마침내 찾아내고야 말았다. 이 추운 날, 외투 하나 제대로 껴입지 않고 벤치에 앉아 훌쩍이고 있는 그녀를.


아무 말 없이, 그는 자신의 외투를 벗었다. 천천히 다가가 그녀의 어깨에 자신의 옷을 덮어준 타케루는, 깜짝 놀라 자신을 돌아보는 히카리를 향해 멋쩍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어디 갔었어. 다들 한참 찾고 있었다구.”


“... 미안.”


히카리가 타케루의 질문에 대답하는 데에는 한참이 걸렸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추궁하지 않겠다는 듯, 타케루는 조용히 그녀 옆에 앉아 그녀의 어깨를 감싸주고 있을 뿐이었다.


“... 왜 울고 있었어?”


“아무것도 아니야...”


“그런데 왜 여기 혼자 있었던거야, 감기 걸리게.”


타케루가 왼손을 천천히 들어 그녀의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살포시 닦아주며 얘기했지만, 그녀는 아무 답이 없었다.


“... 실은, 코토네랑 있는 거 봤어.”


그 상태로 미동도 않고 몇 분이 지났을까. 딸꾹질 비슷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마침내 히카리가 입을 열었다.


‘그 때 내가 들었던 발자국 소리가 히카리가 맞았구나,’ 타케루가 생각했지만, 그가 코토네의 고백을 거절했다고 말하기도 전에, 히카리가 다시금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실은, 그 때 고백하는 걸 봤었어. 그런데— 그, 그런데— 왜인지 모르게, 나도 모르게 그만— 그만 도망쳐 버렸어. 나도— 나도 왜 이러는지, 내가— 왜 울고 있는지—“


벌벌 떨면서, 버벅대면서 말하는 히카리의 변명 아닌 변명은, 타케루의 손이 그녀의 어깨와 머리를 감싸안고 자신에게 끌어당겨 그녀를 꽉 안아줌으로써, 뚝 끊기고 말았다.


자신의 어깨에 말없이 울고 있는 히카리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던 그는, 조용히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고백, 거절했어.”


그의 품에 얼굴을 묻고 있던 히카리의 울음이 뚝 그쳤다.


그녀의 어깨를 조심스레 잡고 자신의 어깨에서 그녀를 떼어놓은 타케루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히카리의 마호가니 색 눈을 바라보았다. 붉은 빛이 감도는, 마치 보석같은 그녀의 눈동자. 사람을 끌어당기는 듯한 느낌의 눈동자— 마치, 마법에 홀려버린 듯, 그는 왼손을 들어 그녀의 젖은 뺨을 어루만지며, 히카리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히카리 또한, 바다처럼 넓은 타케루의 사파이어 빛의 두 눈동자에서 눈을 뗄 생각이 없어보였다. 자기도 모르게, 파르르 눈꺼풀을 감은 그녀는, 고개를 천천히 돌리며 그의 허리를 휘어잡았다.

그들은 늘 서로와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했지만, 지금은, 무언가 사뭇 달랐다.


점점 더 서로에게 다가가며, 희망의 문장의 소유자와 빛의 문장의 소유자는 서로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서로 연결된 듯한 느낌. 처음 모험을 하며 만났을 때에도, 두번째로 ‘선택’받아 또다시 디지털 세계를 구할 때에도 느꼈던 그 소름돋는 감정이— 둘을 고리처럼 휘감았다. 


시간마저도 그들의 입술이 닿는 순간을 숨죽여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캄캄한 공원 한가운데에서, 따뜻한 달빛에 흠뻑 젖은 두 아이는, 말 없이 영원같았던 그 순간을 음미했다.


헉— 하고 들이마쉬는 숨과 함께, 희망의 빛으로 이어진 입맞춤이 끝을 맺었을 때, 두 아이는 아무 서로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았으면서도 너무 순식간에 끝나버린 그 순간.


다시 서로를 향해 고개를 움직이는 그들은, 그 어떤 조명 없이도, 충분히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 순간만큼은,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그들을 방해할 수 없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운명이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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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octor B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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