켄다이 - 선공후사 (先公後私)
2015년 3월 30일
드르륵—
다사다난한 몇주가 지나고, 다시 평화를 찾은듯한 다이스케가 텅 빈 자신의 포장마자를 닫으려는 무렵, 문이 열리더니 한 남자가 재료를 정리하다 우뚝 멈춰선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목까지 잠긴 셔츠. 직접 현장에서 뛰느라 우락부락해진 손과 그 손이 잡아당기고 있는 검은 넥타이. 그 팔에 들려있는 푸른색 외투, 그리고 붉은 노울이 반사되어 마치 영롱한 자수정처럼 빛나고 있는 청아한 보랏빛 머리—
“이치죠우지.”
성게같이 삐죽빼죽 튀어나온 어릴적 헤어스타일 대신, 깔끔하게 잘린 붉은색 머리를 쓸어넘기며 입술을 깨물고 있던 다이스케가 조용히 말했다. 그는 차마 자신 앞에 서있는 사람을 쳐다볼 수 없었다. 아니, 쳐다보고 싶지 않았다. 요 몇주간 자신의 모든 것을 무너뜨릴 기세로 자신을 파헤치려 했던 그 사람을. 과거의 친구를, 과거의—
“우리가 성으로 부를 사이는 아닐텐데. 이거 섭섭한 걸.”
누가 먼저 그랬는데. 혼자 생각하다 그제서야 고개를 든 다이스케는, 씁쓸한 미소를 짓고 서있는 이치죠우지 켄의 얼굴을 마주했다.
“그럴려고 그런게 아닌 건 잘 알잖아.”
한 걸음, 두 걸음.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그 보랏빛 머리의 남자에 대한 분노가 머리 끝까지 차올랐다. 그럴려고 그런게 아니라는 것이야 잘 알고 있었다. 그게 그의 직업이니까. 그의 사명이니까. 하지만, 하지만— 친구를, 믿음을—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켄은, 외투를 옆 자리에 올려놓고는, 입술을 깨고 땅을 내려다보는 다이스케를 턱을 괴고 말없이 쳐다보았다.
“친구 말도 못 믿는 주제에, 여기까지 찾아오다니 배짱도 좋지.”
마침내 고개를 든 다이스케가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공은 공이고 사는 사일 뿐이야, 다이스케 군.”
자신을 보며 얼굴에 호선을 그리고 있는 그를 바라보던 다이스케는, 또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원래 같았으면 화라도 내고, 성질이라도 부렸을 그였겠지만—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소용일까.
“... 늘 먹던걸로?”
켄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다이스케는 라면을 준비하러 부엌으로 사라졌다.
***
그 이후로 그 둘 사이엔 아무 말도 없었다. 다이스케는 켄이 좋아하는 숙주나물 듬뿍 들어간 라면을 그의 앞에 가져다 놓았고, 켄 또한 조용히 머리를 귀 뒤로 넘기고 라면을 먹을 뿐이었다.
끼익—
켄이 라면을 먹는 동안, 포장마차의 문을 닫고 테이블과 의자를 정리하고 있던 다이스케가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을 때엔, 라면을 깨끗이 비운 켄이 의자에서 일어나 주섬주섬 외투를 입고 있었다.
턱.
옮기던 것들을 모두 내려놓은 다이스케는 그런 그의 뒷모습을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오묘한 감정. 어렸을 때 느꼈던 그 감정 비슷한 것이 몇십년만에 그의 차디찬 가슴을 찔렀다. 이미 잊었다고, 묻어두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바람 앞에 떨어지는 꽃잎처럼 하나둘씩 그의 심금을 울리는 것 같았다.
“잘 먹었어, 다이스케 군.”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며 켄이 말했다.
“...”
“개새끼.”
지갑을 열던 켄의 손이 우뚝 멈췄다.
“이 빌어먹을 새끼야.”
몸을 돌린 켄은 고개를 푹 숙이고 뛰어오다시피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다이스케를 보았고, 눈을 감았다. 혼자 자책하며 쓰디쓴 맥주를 들이키다 이곳에 다시 오기로 결정했을 때부터 예상한 일이었다. 주먹이라도 날려야 다이스케 답지, 속으로 켄이 생각했고, 다이스케의 발소리가 바로 앞에서 들렸을 때—
켄을 맞이한 것은 주먹이 아닌, 뼈가 으스러지다시피 자신을 껴안는 다이스케의 팔이었다.
툭.
켄의 손에서 지갑이 빠져나가 땅에 떨어졌다.
고개를 들썩이며 자신을 껴안고 있는 다이스케를 내려다 본 켄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을까. 공사를 구별하긴, 빌어먹을. 여태까지 담담한 척 하고 있던 켄의 손이 떨렸다. 자신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다이스케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던 켄은, 자신 또한 그에게 몸을 맡겼다.
조용한 포장마차 한가운데서, 그 둘은 아무 말 없이 서로를 껴안고 있을 뿐이었다.
***
그 둘이 서로를 놓은 것은 긴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렇게 울어놓고, 눈물로 얼룩진 홍조 띈 얼굴을 보여주긴 싫었는지, 등을 돌리고 서있는 다이스케를, 켄은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
어쩌면, 아무 말도 필요 없었을지도 모른다. 자기 자신보다 서로를 더 잘 이해한 그 둘은, 이미 서로의 진심을 확인했을 터였다. 그 어떤 말보다 더 따스한 행동으로.
“여기 꼼짝말고 있어.”
떨리는 목소리로 한숨을 내쉰 다이스케가, 고개를 홱 돌리고는 켄을 쳐다보며 말하더니, 부엌으로 뛰어들어갔다.
곧이어, 한손에는 이슬이 송글송글 맺힌 술병을, 또다른 한손에는 술잔 두개를 들고 온 다이스케가, 바로 옆의 테이블에 그것들을 쾅 하고 내려놓았다.
“돈 따위 안내도 돼. 난 너랑 달라서 말야,”
아직도 눈에 맺힌 눈물 한방울을 쓱 닦아내며, 다이스케가 말했다.
“공과 사 따위 구분 못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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