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소라야마 - 카이저

2015년 6월 2일


천공이 핏빛으로 물든 디지털 세계의 어느 밤.


비웃음으로 가득찬 눈매를 가려주던 선글라스를 벗어던진 그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만신창이가 된 아이들의 절망보다 더 칠흑같은 정장을 입고, 철옹같은 검은 왕좌에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는 그-


디지몬 카이저, 야가미 타이치.


"선택받은 아이라느니, 세계를 구하겠다느니... 한심하긴. 이제 꿈에서 깰 때도 됐잖아?"


땅에 널부러져 있던, 한 때 디지몬 카이저라고 자칭하던 켄의 선글라스와는 확연히 다른 둥그렇고 더 악한 기운을 내뿜는 선글라스를 검은 구두로 자근자근 밟아 부순 타이치가 비열하게 웃으며 말했다.


쓰러져 있는 아이들과 그들의 디지몬 파트너를 내려다본 그는,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철들지 못한 너희 바보들을 일깨워 주려는 이 리더의 노력을, 이렇게 배은망덕하게 갚으면 안되지."


"타... 타이치..."


전투의 흔적이 아직 채 가시지 않은 부서진 땅바닥에 주저앉아있는 소라가 그를 올려다보며 조용히 중얼거리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만연했던 미소가 싹 가신 타이치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타케노우치."


타이치가 더 이상 이름이 아닌 성으로 자신을 부르자, 소라는 순간 몸을 움찔했다.


"왜 그래? 이번엔 또 무슨 말로 나를 화나게 하려고? 그 망할 금발 늑대 새끼와 얼마나 잘 지내고 있는지 시시콜콜 얘기라도 해줄 참인가? 그럴려고 여기까지 찾아온거냐? 저 쓸모없는 쓰레기 놈들과 함께?!"


야마토의 언급에 한번 더 소라의 몸이 움찔거리는 것을 본 타이치는, 점점 악에 받쳐 소리를 지르듯 외쳤다.


"이게! 이 모든 게, 누구 때문인데! 사랑이고, 우정이고, 용기고! 다 지랄맞은 개소리에 지나지 않아!!"


거의 울음을 터트리기 직전인 소라 앞에, 손에 쥐고 있던- 이미 모양도, 색도 바래버린- 자신의 문장을 집어던진 타이치는, 그 어떤 상황에서 부서지지 않던 문장이 주인의 의도를 알아차린 듯, 쨍그랑 하고 산산조각 나는 것을 보았고, 곧이어 자신의 왕좌 옆에서 전투 태세를 취하고 있는 워그레이몬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그저, 울고 있는 소라에게서 등을 돌린 채, 천천히 멀어져갈 뿐.


그들을, 자신을 이 굴레에 옭아맨 그녀를-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아직도 차마 끝내버릴 수 없는 자신을 저주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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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octor B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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