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그대는


어느 화창한 여름날— 봄이 언제 왔었냐는 듯, 어느샌가 뙤약볕은 뜨거운 열기를 가득 내리쬐고 있었다. 마치 쑥을 연상시키는 녹색의 교복을 입고 하굣길을 걸어가는 두 남녀는 눈부신 태양 빛에 눈을 찡그렸지만, 쉬지 않고 움직이는 그들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날 줄을 몰랐다.


“그래서 결국 씩씩대는 다이스케 군을 풀어주느라 수학 시간을 다 날려버렸다니깐.”


오뚝한 이목구비의 남자아이가 이마를 간지럽히는 금빛머리를 쓸어 넘기며 오늘의 무용담을 늘어놓자, 색소 옅은 부드러운 갈색 머리를 머리핀으로 고정한 여자아이는 키득거리는 웃음으로 화답했다.


타카이시 타케루와 야가미 히카리— 아주 어렸을 때부터 친한 친구 사이인 이 둘은, 일상 같은 지루한 수업을 마치고 여느 때처럼 같이 집으로 걸어가는 길이었다. 비록 2학년이 되면서 반이 갈렸고, 타케루는 농구부에, 히카리는 신문부에 들어가 시간이 많이 엇갈렸지만, 그런데도 그 둘은 서로와 함께 하교하는 게 너무나도 당연했고, 늘 그래왔듯 서로를 기다리곤 했다.


그리고 오늘도 그렇게 별반 다를 것 없는 하루가 저물어 가고 있는 줄 알았다. 가까이 붙어 걸어가며 흔들리는 타케루의 긴 손가락이, 옆에서 같이 흔들리던 히카리의 손가락과 무심한 듯 닿기 전까진.


갑자기 등줄기를 타고 올라오는 찌릿한 느낌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팔을 확 뺐다. 덩달아 깜짝 놀라 그녀를 쳐다보는 타케루의 눈빛에, 히카리는 그제야 자신이 한 행동을 이해하고 얼굴을 붉혔다.


“히카리 쨩, 왜 그래? 괜찮아?”

“아— 아무것도 아니야. 갑자기 정전기가 일어나서.”


타케루는 히카리의 행동이 무언가 이상함을 눈치 챘지만, 곧이어 어깨를 으쓱하고는 가방에서 하얀 스냅백을 꺼냈다. 옆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모자를 쓰려던 타케루는, 히카리가 또 모자를 쓰냐며 핀잔을 줄 것이라는 생각에 다다랐는지, 움직임을 멈췄다.


히카리는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느라 타케루를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고,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던 타케루는 좋은 생각이라도 난 듯, 장난꾸러기 같은 웃음을 지었다.


푹— 하고 히카리의 머리에 갑자기 씌워진 모자. 깜짝 놀라 자신을 올려다보는 히카리를 보며 타케루는 다정하게 미소 지었다.


“예쁘다.”


그 말에 히카리는 말문이 턱 막혀버린 듯, 어쩔 줄 모르다 곧이어 모자를 더 깊게 눌러썼다. 
그 때문에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없어 히카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던 타케루는, 그녀의 앞에 서서 허리를 숙였다. 모자의 챙을 들어 올리며 그녀의 눈을 마주치려 한 타케루는 입을 열었지만—


“히카리 쨩? 혹시—”


—결국 말을 끝내지 못했다. 눈앞에 갑자기 나타난 타케루를 보고 놀라버린 히카리가, 저도 모르게 그의 옆구리를 꼬집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정말, 오늘 미야코 상 만나러 가는 거 알면서, 내 머리 어쩌려구.”

“아야야야야야— 하하, 미안해, 히카리 쨩.”


울음과 웃음이 섞인 듯한 목소리로 사과하며 크게 웃는 타케루를 보며,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모자는 내가 압수할 거야.”

“엣? 그런 게 어디 있어—?”


눈썹을 치켜세우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히카리. 모자를 머리 위에 살짝 걸친 그녀는, 그의 원망스런 눈길을 재밌다는 듯 쳐다보았다. 아무 일 없다는 듯, 여느 때와 다름없는 장난을 치고 있었지만, 내심 히카리는 왜 자신이 그렇게 깜짝 놀랐는지 고민하고 있었다.


오늘 무언가 자신을 예민하게 한 일이라도 있었는지 곱씹어봐도, 생각나는 것이 없는데— 결국 해답을 찾지 못한 채, 히카리는 옆구리를 쓰다듬는 타케루와 함께 계속 걸었다. 그가 혹시라도 고민하는 자신의 기분을 읽을까, 걸쳐 쓰고 있던 모자 밑으로 자신의 눈을 숨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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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햇살이 창문을 타고 모두를 환하게 비추는 도서관에서, 야가미 히카리는 책을 꺼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꽤 구석진 곳에 있어 누구한테 도움을 요청하기가 모호한 것도 있었지만, 닿을락 말락 하는 자신의 손가락이 책을 툭툭 건드리기만 하는 것에 오기가 생겼기 때문이기도 했었을 터였다.


그때, 어디선가 불쑥 다른 손이 나타나 책을 잡았다. 결국, 자신이 꺼내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고맙다는 말을 하려 고개를 돌린 순간, 그녀는 익숙한 얼굴을 마주했다. 자신을 웃으며 내려다보고 있는 높은 코와 푸른 눈동자—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파도처럼 하얗게 빛나는 머리— 타카이시 타케루.


“부르지 그랬어.”


웃으며 오래전 졸업한 선배가 남긴 신문부 스크랩북에 쌓인 먼지를 털어낸 타케루는, 히카리에게 책을 건넸다.


“아— 그냥, 혼자 꺼내볼까 해서. 고마워.”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마움을 표시한 그녀는, 얼굴에 큰 호선을 그린 타케루를 올려다보았다— 잠깐, 올려다보았다고?


여태까지 왜 자각하지 못했을까? 어느샌가, 히카리는 타케루를 올려다보고 있었음을. 남자아이들이 원래 더 키가 크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왜인지 히카리는 자신이 타케루와 키가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타케루 군, 언제 그렇게 키가 컸어?”

“응? 무슨 소리야, 난 늘 히카리 쨩보다 컸다구?”

“초등학교 때도 기억 못 하나 보네.”

“물론 기억하지. 5학년 때도 내가 더 컸었잖아.”


웃으며 히카리가 말을 꺼내자, 지지 않겠다는 듯 타케루 또한 얼굴에 호선을 그리는 것으로 화답하며 맞받아쳤다. 히카리는 그때를 말하는 게 아니라며 졌다는 듯 웃어 보였고 타케루 또한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를 지었다. 이윽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타케루의 손은 그녀의 머리를 향했고, 곧이어 그녀의 갈색 머리카락이 그의 손바닥을 간지럽혔다.


“타— 타케루 군?”


자신을 쓰다듬는 손에 당황한 듯 말을 더듬는 히카리와, 그런 그녀를 보고 되려 본인이 놀랐다는 듯 손을 멈칫했지만 이내 다시 웃는 타케루. 타케루가 히카리의 머리를 쓰다듬는 일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히카리는 타케루에게서 자신의 오빠인 타이치를 보곤 했었다. 마치 타이치가 그녀를 쓰다듬어줄 때처럼.


그렇지만 지금은 아냐. 자신을 마주 보며 쓰다듬어주는 타케루에게는 그 누구도 겹쳐 보이지 않았다.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환한 미소를 짓는 그의 바다 같은 푸른 눈동자가, 자기주장을 그녀에게 강력하게 펼치고 있었다— 타카이시 타케루라는 존재를. 그리고 그런 그에게 반응하듯, 무언가 찌릿한 감각이 그의 손으로부터 그녀를 감싸 내려갔다.


“그래도 지금은 내가 크니까—”

“타케루 군!”


타케루가 웃으며 말을 이어가려던 그 순간, 책장 뒤에서 검은 머리의 여자아이가 쑥 튀어나왔다. 그녀는 친한 듯 타케루의 팔을 아무렇지도 않게 잡았지만, 타케루는 재빠르게 그 팔을 빼내고는 무슨 용건이냐는 듯 눈썹을 치켜세웠다.


“모모가 빨리 오라고 부르는 걸!”


타케루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쉬이 발길을 돌릴 생각은 하지 않고 있는 듯했다. 이만 가볼게, 라는 한 마디와 함께 책장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도, 그의 눈길은 계속 히카리를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한 듯, 히카리는 그저 조심스레 그가 흩트려 놓은 머리카락을 다듬을 뿐이었다. 아무리 머리를 만져보아도 아까 같은 찌릿함은 느낄 수 없었다— 정전기라도 되었는지, 뭐였는지 알 순 없었지만, 곧 히카리는 그런 생각을 떨쳐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시계를 쳐다보고는 깜짝 놀란 히카리는, 그제야 빠르게 도서관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바로 두 명의 여자아이와 앉아 웃으며 떠들고 있는 타케루였다. 이상할 것은 없었다— 그는 늘 친절한 아이였다. 그 외모와 친절한 성품으로, 모두에게 인기 있는 아이— 그런데도, 그 누구 하나 소홀히 대하지 않는 아이. 하지만, 저 둘과 대화를 나누는 타케루가 오늘따라 왜 이리 행복해 보이는지.


‘무척 친한 아이들인가 보네.’


저도 모르게 씁쓸한 미소가 지어지는 것을 히카리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저, 무의식적으로 머리를 계속 어루만지며,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떴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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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쪄 죽겠다니깐, 정말.”


방과 후, 뜨겁게 내리쬐는 햇볕을 피해 학교 뒤쪽 벤치에 걸터앉은 타케루가 자신에게 부채질을 해주는 히카리를 보며 기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운동하다 나오니 더 그렇지, 라며 타케루에게 물을 건넨 히카리는 그가 그 자리에서 한 병을 모두 마셔버리는 것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늘 운동을 하곤 덥다며 집을 박차고 들어와 반쯤 풀어진 교복으로 물을 들이켜던 또 한 사람이 문득 떠오른 히카리는, 희미한 미소로 자신 쪽을 쳐다보던 타케루를 보며 입을 열었다.


“타케루 군, 이렇게 보니 정말 우리 오빠 같네.”


히카리는 순간 타케루의 얼굴에서 미소가 장맛비에 씻겨나가듯 사라지는 걸 본 것 같았지만, 눈을 깜빡였을 때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웃고 있었다.


“내가 타이치 상을 닮았어?”


머리를 긁적이며 자신에게 묻는 타케루의 눈빛에는, 진지함이 언뜻 숨겨져 있는 것 같았다. 그냥, 운동하는 거나 물 마시는 거나 여러모로 오빠가 생각나서— 라는 웅얼거리는 듯한 대답. 돌아온 건 가족 같고? 라고 무심한 듯 덧붙이는 타케루의 한 마디였다.


뭐, 그런 걸려나. 어깨를 으쓱인 히카리의 대답에 만족하지 못했는지, 고개를 꺾고 고민하는 표정을 짓던 타케루는 곧이어 다시 얼굴에 호선을 그렸다. 타케루의 그 표정,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기도—


“왜 그래, 타케루 군?”


타케루가 내심 대답을 해주길 바랐지만, 역시 그는 별 일 아니라는 듯 손사래를 칠 뿐이었다. 곧 그들의 대화는 다른 화제를 향해 달렸지만, 히카리는 그제야 그들이 어렸을 적 타케루가 자신에게 화를 냈던 것을 기억해냈다.


‘언제까지 타이치 상 타령만 할 거야?'


이번에도 비슷한 맥락이었을까? 그렇지만 그녀는 아직도 타케루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처음엔 자신이 타이치에게 너무 의존한다고 생각한 것이겠거니 했지만, 그렇다면 그는 왜 오늘도 굳은 표정을 지은 것인가?


히카리가 다시 시선을 돌렸을 때,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당연하게도 타케루였다. 하지만 당연하지 않아— 마치 도서관에서 있었던 일이 머릿속에서 재생되는 것처럼, 자신을 다시 바라보는 그의 모습에게서 히카리는 타이치가 아닌 타케루만을 보았다. 어쩌면, 이제야 말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그래, 넌 타이치 오빠와는 달라, 타케루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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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가 끝나가는 것을 암시하듯, 붉게 타오르는 태양은 높이 솟은 산 뒤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나무의 그림자 밑에 자리를 잡고, 흔들리는 나뭇잎들 사이로 비추는 햇빛을 바라보고 있던 야가미 히카리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다름 아닌 그녀의 친구 타카이시 타케루였다.


“자, 히카리 쨩.”


입에는 푸른 소다 맛 하드를 물고, 그녀가 좋아하는 편의점 아이스크림을 건넨 그는 곧이어 그녀의 옆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하아, 오늘 진짜 덥네.”


능숙하게 아이스크림을 뜯고, 숟가락으로 크게 푼 한 입을 입에 털어 넣은 히카리는 타케루의 말에 공감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를 찡하고 울리는 차가운 단맛이 혀에서 살살 녹는 그 느낌. 뜨겁다고 아우성치는 몸에 퍼지는 냉기에 히카리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고마워, 타케루 군. 타케루 군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 했네.”

“대신 나중에 나도 사주는 거다?”


하드를 베어 먹으며 자신의 말을 맞받아치는 타케루를 보며, 히카리는 미소를 지었다. 땀 때문인지, 습기 때문인지, 살짝 촉촉하게 젖은 그의 머리는 저번 주의 농구 경기를 연상케 했다.


늘 타케루를 응원하기 위해 농구 경기를 참관하던 히카리였지만, 저번 주만큼은 달랐다. 다름 아닌 다른 학교와의 결승전— 이번에는 친구로써가 아닌, 신문부의 기자로서 방청석에 앉아있던 그녀는, 타케루의 이름을 외칠 새도 없이 경기 장면을 사진으로 남기기에 급급했었다.


치열한 접전. 비록 아주 간발의 차였지만, 경기 종료 직전 타케루와 다른 팀원들의 훌륭한 연계 덕에 오다이바 중학교는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다ㅡ 그리고, 쉴 새 없이 셔터를 누르던 히카리의 입가에도 환한 미소가 번졌다.


늘 그랬듯 다른 친구들과 함께 타케루를 축하해주고, 방송실로 돌아간 그녀는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마주했다— 100장이 넘는 사진 중에 무려 80장 가까이가 타케루의 사진이라니. 공을 드리블하는 사진, 패스하는 사진, 슛하는 사진……. 심지어 마지막 연계마저, 슛을 넣은 팀원이 아닌 공을 패스하는 타케루가 찍혀있었다.


히카리는 그 사진들을 걸러내며 간신히 편집을 해내는 데 성공했지만, 그래도 학교 신문의 1면에 실린 것은 결국 타케루의 사진이었다. 그래도 여전히 그녀에게 남아있는 한 가지 의문. 80장에 다다르는 타케루의 사진들. 결국, 신문 1면에 실린 그의 사진. 왜 그랬던 것일까? 혹시—


찌잉—


그때를 곰곰이 생각하던 히카리는, 생각에 빠져 자신이 얼마나 많은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지를 자각하지 못한 듯했다. 파도처럼 몰려오는 차가운 두통에 그녀는 얼굴을 찡그렸고, 밀려온 파도가 빠져나가듯 그녀의 생각 또한 빠르게 머릿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 이후로, 히카리는 그저 타케루와 소소한 얘기를 나누며 아이스크림만을 먹었다.


컵에 든 아이스크림이 점점 줄어들수록 가장 밑에 보이는 브라우니. 히카리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었다.


마침내 녹아내리는 차가운 아이스크림들이 다 없어지고 마지막 남은 달달한 브라우니를 퍼 올렸을 때, 그녀는 왜인지 다시 농구 경기를— 타케루를— 생각하고 있었다. 왜 생각난 것일까?

가장 깊은 곳에 깔린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려면 그 위에 쌓여있는 다른 것들을 걷어내야 하는 법. 친구로서의 그들의 관계와 그들이 나눈 추억들을 모두 밀어놓고 나면, 히카리는 타케루에게 과연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이 아이스크림처럼, 위에 쌓여있는 것들이 모두 녹아 사라지면, 남는 것은 결국 한 조각 브라우니.


히카리가 가장 좋아하는 브라우니처럼 가장 단순한 감정.

히카리가 가장 좋아하는—?


“그럼 어머니 오시기 전에 그만 가봐야겠다, 히카리 쨩.”


먼저 천천히 일어나는 타케루를 보며, 히카리의 생각은 다시금 결론에 다다르지 못했다. 작별 인사를 하고, 자신에게 손을 흔드는 타케루가 골목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다, 히카리는 들고 있던 아이스크림 컵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직도 컵에는 브라우니가 남아있었다— 그녀가 브라우니를 남긴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평소 같으면 스스럼없이 먹었을 그것을, 퍼 올리다 말고 멈춰버린 채였다.


땅거미가 가라앉는 하늘을 바라보며, 히카리는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다른 모든 것을 걷어내고 보면, 과연 자신에게 타케루는 어떤 존재인지를 고민하며.




:::




따뜻한 토요일 아침, 야가미 히카리는 침대에 멍하니 누워있었다. 약속 시각은 3시였다— 조금은 늦잠을 자도 괜찮을 그런 주말이었지만, 히카리는 왜인지 새벽부터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고 있었다. 알람이 울리기만을 기다리며, 그녀는 그렇게 천장만을 바라보았다.


“히카리, 언제까지 누워만 있을 거야?”


자신의 허벅지를 쿡쿡 찌르며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을 때, 히카리는 자신의 파트너인 테이르몬을 발견했다. 부모님도 약속이 있어 나가시고, 오빠와 아구몬은 축구를 하러 가버린 만큼, 히카리 없인 놀 상대가 기껏해야 실 뭉치밖에 없던 테이르몬이 심심해하는 것도 당연하였을지도.


“빨리 타케루랑 파타몬 만나러 가자—”


테이르몬의 애교 아닌 애교에 미소를 지으며 일어난 히카리는, 테이르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빌려줬던 책도 돌려받고, 밥도 먹고, 시험공부도 같이 할 겸 타케루와 약속을 잡은 것이 엊그제— 늘 같은 일상이지만, 많은 생각 속에 히카리는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샤워를 하며, 이를 닦으며, 옷을 입으며 생각해봐도 쉽사리 결론지어지지 않는 생각. 히카리는 뚱한 표정으로 시리얼이 담긴 그릇을 휘적였다.


“히카리, 무슨 일 있어?”

“아무것도 아냐, 테이르몬.”


테이르몬에게 웃어 보이며 먹은 그릇을 설거지하는 히카리.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긴 했지만, 그녀에게는 확실히 고민이 있었다— 다름 아닌, 타카이시 타케루에 대한.


그는 확실히 그녀의 친구였다. 둘은 남들이 하지 못할 경험을 함께 공유해왔고, 그만큼 많은 시간을 함께했다. 그런 타케루는 과연 히카리에게 있어서 그저 친구인 걸까? 아니면 그 이상인 걸까?


그 이상이란 건 무슨 감정일까? 늘 특별한 사람이 없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히카리는 자신의 오빠인 타이치를 언급하곤 했었다. 물론 그 질문의 특별한 사람이란 그런 의미가 아니겠지, 히카리는 생각했다. 미야코가 좋아하는 사람 있냐고 물어본 건데 타이치 얘기 좀 그만 하라며 핀잔을 준 적도 있었으니 말이다.


타케루를 좋아하냐는 질문도 많이 받았었다. 그래, 히카리는 확실히 타케루를 좋아했다— 어쩌면 단순한 친구 이상으로써. 그렇지만 그가 남자로 보이냐 묻는다면— 글쎄. 둘이 사귀냐며 사람들이 장난기 섞인 말을 할 때마다, 히카리는 손사래를 치곤했었다. 둘은 친구였으니까. 그 이상은 아니라고 다른 사람에게 말하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에게도 얘기해왔었으니까.


철퍽—


“앗!”


생각에 푹 빠져 싱크대에서 물이 흘러넘치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히카리는, 허겁지겁 물을 잠그고 바닥을 닦았다. 걱정되는 듯한 눈빛의 테이르몬에게 괜찮다는 손짓을 하고, 그녀는 타케루를 만날 준비를 했다.


집을 나서며, 히카리는 타케루에 대한 생각을 떨쳐내려 애썼다. 설사 그를 좋아하더라도, 관계를 더 발전시키려다가 잘 풀리지 않아 깨지기라도 한다면? 그녀는 타케루가 없는 일상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위험한 외줄 타기를 하는 것보다, 튼튼한 친구로써의 관계가 훨씬 더 나았다. 최소한, 이 상태로는 그를 잃지 않을 테니까.


“타케루다!”


테이르몬의 말에 고개를 든 히카리는, 저 멀리서 비니를 쓰고 있는 타케루를 발견했다. 쓱 주위를 둘러보자, 아니나 다를까, 타케루 옆의 나무 위에서 주황색의 포동포동한 무언가가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그의 이름을 부르려 하는 순간, 히카리는 건물에 가려 보이지 않던 또 다른 사람을 발견했다. 타케루와 꽤 친한 듯이 보였던 여자아이. 얼핏 기억날 듯 말 듯한 이름— 아, 그래, 모모.


달려가려는 테이르몬의 입을 막고, 히카리는 둘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엿듣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왜인지 그녀는 타케루와 모모의 이야기가 너무나도 궁금했다.


“… 그래서 걔가 오기 전까진 혼자라는 거네?”


충분히 가까이 가자 들리는 모모의 목소리. 히카리는 그녀가 자신을 지칭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응, 뭐. 곧 올 거지만. 그래서 꼭 하고 싶다는 말이 뭐야?”


상냥한 미소로 그녀에게 답하는 타케루. 히카리는 나무 뒤에서 그런 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행복해 보이고, 친절해 보이는 그의 목소리에, 히카리는 저도 모르게 얼굴에 호선을—


“오랫동안 좋아해 왔어, 타카이시— 아니, 타케루 군. 사귀지 않을래?”


그 순간, 히카리의 미소도, 이 세상 다른 모든 것도, 순간 얼음이 된 듯 멈춰버렸다. 많은 것들이 머릿속에서 스쳐 지나가는 그 순간, 얼음을 산산이 부숴버린 것은 타케루의 대답이었다.


“그래, 그러자.”


환하게 웃는 타케루를 보며, 히카리는 온 세상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탸케루에 대한 자신의 감정도, 친구 사이가 더 나을 것이라는 생각도 마치 이젠 모두 소용이 없는 듯 소용돌이 속에서 잊혀졌다.


타케루가 마냥 그녀의 친구에 불과했다면, 이런 기분이 될 리가 없었다. 그렇지만— 히카리가 자신의 감정을 알아차렸다 한들, 이미 기회는 오래전에 놓친 후였다.


“앗— 히카리 쨩!”


히카리가 고민하는 사이에 모모와 행복한 표정으로 무언가 이야기를 하던 타케루는, 곧이어 히카리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지만, 고개를 푹 숙인 히카리는 곧이어 반대쪽으로 열심히 달리기 시작했다.


“히카리 쨩?”


타케루가 외쳤지만, 그의 목소리는 그녀에게 닿지 않았다. 히카리가 뛰는 방향은 그녀의 집도 아니었다. 당황한 테이르몬을 품 안에 꽉 안고, 히카리는 무작정 달렸다. 자신의 죄책감에게서, 후회에게서, 질투에게서—


타케루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




그 후로, 히카리는 타케루를 피해 다녔다. 시험공부도 혼자 하고, 타케루와 마주치지 않기 위해 학교도 다른 길로 돌아갔다. 가끔 마주칠 때면, 타케루는 걱정스러운 말투로 히카리에게 뭐라 말하려 입을 열었지만 히카리는 그저 미안, 타케루 군. 이라는 짧은 말만 남기고 그에게서 멀어져갈 뿐이었다.


그때 도망쳐 버렸던 사건이 있고 난 뒤 타케루와 편히 대화하는 것 자체가 왜인지 불편해진 히카리였지만,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바로 그에게 딱 붙어있는 모모의 존재였다. 늘 팔짱을 끼거나, 타케루에게 기대고 있는 모모를 볼 때마다, 히카리는 씁쓸함만을 느꼈으니까.


솔직히, 아직도 히카리는 자신이 타케루를 좋아하는 것이 맞는지 알지 못했다. 어쩌면 그저 모모가 타케루와 더 많이 시간을 보내는 것에 질투를 느끼는 것일지도 몰랐다. 아이러니하게도, 결국 마음의 정리도, 관계의 발전도 하지 못했음에도 히카리 자신의 걱정대로 그녀는 타케루와 예전 같은 친구 사이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건 그녀 자신의 탓이지, 타케루의 탓은 아니었다. 소꿉친구가 처음으로 애인을 사귀었는데, 축하는 해주지 못할망정 자신의 아니꼬운 감정에 휘말려서 그를 차갑게 대하는 꼴이라니. 이 얼마나 한심한가?


그런 서먹서먹한 관계가 된 지 몇 주가 지났을까. 쨍하게 내리쬐던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저녁, 부 활동을 마치고 집으로 걸어가던 히카리는 얼핏 타케루의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골목 너머에서, 모모가 타케루에게 뭐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타케루는 그런 그녀에게 소리치거나 하진 않았지만, 확실히 딱딱한 얼굴로 맞받아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싸우는 것일까? 무슨 연유로 다투는 것인지 호기심이 동했지만, 히카리는 곧이어 그냥 발길을 돌렸다. 무슨 일인지 내일 타케루 군에게 물어보면 되겠지— 라는 생각이 얼핏 들었지만, 히카리는 타케루와 제대로 된 아침 인사도 한 지 너무나 오래되었다는 차가운 벽에 다시금 부딪혔다.


그와 행복도, 고민도 모두 나누던 것이 너무 당연한 일이었었던 그 시절이 그리웠던 것이었을까. 그저 씁쓸한 미소를 지은 히카리는, 하늘을 붉게 물들이면서 산 뒤로 사라지는 태양을 바라보았다.


사라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따뜻함을 건네주는 태양. 그런 태양에서, 묘하게 히카리는 타케루의 미소를 겹쳐 보았다. 그 눈부신 태양과 늘 엮었던 타이치 대신 보이는 타케루의 빛. 그제야, 히카리는 그가 알게 모르게 은은히 자신을 비춰주고 있었음을, 늘 자신을 밝혀주고 있었음을, 그가 있었기에 이렇게 자신이 빛날 수 있었음을— 자신이 그의 태양 같은 빛을, 타케루를 얼마나 좋아했는지를 보았다.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는데 왜 이렇게 오래 걸린 걸까? 난 우리 사이가 변할까 봐 두려웠나 봐, 히카리는 뉘엿뉘엿한 태양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네가 변할까 봐, 내가 변할까 봐— 아냐. 그래. 난 우리가 변하지 않을까 두려운 거였어.


그 결론에 다다르자, 히카리는 푹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자신의 감정을 감추고 있었던 것에는 그런 두려움이 있었나 보다— 매일매일, 하루하루, 그들이 커가고 바뀌어 가도, 자신들의 관계는 더는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 그랬기에 꽁꽁 싸매고 있었는가 보다. 좋아한다는 것을. 오래전부터 타케루를 이성으로 보고 있었다는 것을.


다시 고개를 든 히카리 앞에는, 태양이 마지막 빛을 내뿜으며 산 너머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 붉은빛이 사라진 하늘에는 적막이 가득한 어둠만이 깔렸고, 그녀는 그런 밤하늘처럼 자신이 이미 늦었음을 알았다.




:::




“자, 마지막으로. 방학이랍시고 끝나자마자 삼삼오오 놀러 가지 말고, 폭우주의보가 내렸으니까 다들 바로 집으로 돌아가도록. 알겠지? 그럼, 좋은 방학 보내라!”


드르륵—


아이들이 모두 빠져나간 텅 빈 교실을 마지막으로 한 번 돌아본 히카리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 마지막 날이니만큼, 늘 그랬듯 이 교실 밖에 타케루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하는 욕심을 품었지만, 그곳에는 텅 빈 복도만이 그녀를 마주할 뿐이었다.


그럼 그렇지, 히카리는 생각했다. 타케루는 모모와 먼저 간 것이 분명했으랴. 그녀가 일방적으로 그를 피한지도 벌써 한 달— 지쳤으면 지쳤지, 이제 와서 타케루가 다시 히카리를 찾아올 리가 만무했다.


교문을 나선 히카리는, 가방에서 조그마한 우산 하나를 꺼냈다.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치고 있었지만, 그녀의 텅 빈 마음만 했을까? 눈조차 제대로 뜰 수 없을 폭우였음에도, 히카리는 씩씩하게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폭풍우에 휩싸인 그녀의 우산은 그 힘을 버틸 수 없다는 듯, 얼마 안 가 뒤집혀 버리고 말았다. 어떻게든 해보려고 용을 썼지만, 부서질 대로 부서져 버린 우산은 회생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젖는 교복을 뒤로하고 집까지 뛰어가기 위해 골목을 도는 그 순간, 그녀는 예상치 못하던 한 사람을 골목 끝에서 보았다.


불투명한 우산 밑으로 보이는 흐릿한 금빛 머리. 걱정된다는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푸른 눈동자. 그녀의 소꿉친구였던 그 사람, 타카이시—


“히카리 쨩?!”


—타케루.


“우산은 어디에다 두고 그러고 있어!”


자신이 젖는 것은 상관하지 않고 히카리에게 달려오는 그 아이. 그녀에 대한 걱정이 묻어나는 그의 낮은 목소리가 골목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런 타케루를 바라보며, 히카리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타케루 군은 바뀐 게 하나도 없구나.


한 달이 넘도록 그를 피해 다녔음에도, 제대로 된 인사조차 하지 않았음에도, 그는 여전히 자기보다 히카리 자신을 더 걱정하고 있었다. 너무나도 타케루 다운 행동— 왜인지 홀가분한 마음에, 히카리는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자신에게 다가와 뭐라고 하는 타케루의 얼굴을 바라보았지만,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비 때문이었을까? 하지만 그녀의 입이 조용히 속삭인 한 마디는, 그 어떤 폭우도 뚫고 타케루의 귀에 꽂혀버렸다.


“좋아해, 타케루 군.”


놀란 듯 커진 타케루의 눈은 많은 감정을 담고 있었다. 역시 변한 게 없는 듯, 히카리는 타케루의 복잡한 감정 변화를 읽어낼 수 있었다. 분명 그중에는 모모도 있겠지.


자신들이 변해도 관계가 변하지 않는다는 게 두려운 거였다면, 자신들이 변하지 않으면 역으로 관계는 변할 수 있는 걸까? 히카리는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떨리는 타케루의 눈동자를 보며 생각했다.


그러나 그러기엔 히카리 자신은 너무나도 변한 것 같았다. 이 철없는 고백으로, 그들의 관계 또한 영원히 바뀌리라는 것을 알았음에도.


미소 다음엔… 슬픔이었다. 뭐라고 말하려, 자신을 붙잡으려 하는 타케루를 뿌리치고 히카리는 그렇게 빗속을 달렸다. 그가 자신이 흘리는 후회의 눈물을 빗방울로 착각하길 바라며— 그녀가 방금 그들의 모든 관계를 한 줌 재로 만들어버린 것을, 빗물이 씻겨내 주길 바라며.




:::




공원의 나뭇가지 밑에서 비를 피한 히카리는, 집에 들어갈 생각은 추호도 하고 있지 않았다. 나뭇잎 사이로 빗방울이 떨어져 내렸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 곳에 있었다.


여태까지 그를 피해 니다가, 만나서 한 말이 고작 한심한 고백이라니, 이 얼마나 최악의 결정인지. 이제 그녀는 다시 그의 얼굴을 볼 수 없겠지, 그저 한때 알았던 사람처럼 데면데면한 채로 학교생활을 보내면서. 그는 그대로 모모와, 그녀는 그녀대로—


차가움이 느껴지지 않는 어깨. 언제부터 비가 그친 것일까?


고개를 들었을 때, 히카리는 비를 막아주는 하늘빛 우산 하나가 자신의 머리 위에서 흔들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곧이어 옆으로 돌아간 시선은, 그녀 옆에 무심한 듯 앉아 우산을 씌워주는 금발의 남자아이를 보았다.


히카리가 비를 맞지 않게 하려고 하느라 자신의 왼쪽 어깨가 다 젖어버린 것을 알기나 하는지, 타케루는 얼굴에 호선을 그리며 히카리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놀란 표정을 짓는 그녀를 바라보며, 그는 입을 열었다.


“감기 걸린다구.”

“타케루 군—”


히카리는 뭐라 말하려 입을 열었지만, 타케루는 다 알겠다는 듯 그녀의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뉘었다. 그런 그녀의 머리 위에 그는 자신의 머리를 조심스레 기댔고, 투둑투둑, 하고 쏟아지는 빗줄기를 들으며, 그들은 그렇게 한참을 있었다.


“미안해.”


적막을 깬 히카리의 사과. 타케루는 천천히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아니야, 미안해할 필요 없어.”

“하지만 한 달 동안이나 타케루 군을—”

“그리고 난 한 달 동안이나 히카리 쨩한테 상처를 줬는걸.”


고개를 돌려서 본 타케루는, 싱긋 웃고 있었다. 오랜만에 이렇게 가까이 보는 타케루의 푸르른 눈동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함을 담고 있는 것 같았다. 혹시라도 그가 자신의 바보 같은 고백을 받아들여 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에게는 모모가 있지 않았던가.


눈빛을 읽을 수 있는 건 그녀 뿐만이 아니었는 듯, 타케루는 깊은 한숨과 함께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모모랑은 헤어졌어— 그런 그의 씁쓸한 말투에 놀란 히카리였지만, 그녀는 그가 얘기를 계속하도록 입을 다물었다.


“나는 히카리 쨩이 나를 싫어하는 줄 알았으니까.”


“닿을 때마다 놀라고, 가끔 안절부절 못 해하고, 나랑 있을 때도 뭔가 다른 생각에 잠긴 것처럼 보일 때가 많다고 느껴서, 혹시 내가 불편한 걸까 라는 생각도 했었어. 그래서 모모의 고백을 받아줬던 거야. 기회가 없었다고 생각했었으니까.”


미안해— 히카리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지만, 타케루는 싱긋 미소 지으며 그녀를 토닥여 주었다. 히카리 쨩이 좋아한다고 해 줬으니까, 라고 말하며 윙크를 날리는 그의 장난스러운 모습에, 히카리는 마침내 그들이 옛날로 돌아갔다는 기분을 느꼈다.


“좋아해, 히카리 쨩. 먼저 말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괜찮아.”


미안하다는 듯 찌푸려진 타케루의 미간을 펴주듯 쓸어주고, 곧이어 그의 뺨을 어루만진 히카리는, 웃으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나도 좋아해, 타케루 군.”


옛날과 같아졌지만 동시에 옛날과 같지 않은. 가까이서 서로를 바라보며 웃는 그들의 감정이 마침내 서로를 향한 것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어두운 먹구름은 사라지고, 밝은 여름 태양이 그들을 비추고 있었다—


그런 따사로운 태양처럼 영원히 빛나라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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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octor B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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