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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5.12.30 다이켄카이저 - Psychosis by Doctor Box
  3. 2015.12.23 타케히카 - The Disintegration of the Persistence of Memory by Doctor B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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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15.11.29 타이코시 - 선물 by Doctor Box
  8. 2015.11.15 카이저켄 - 악몽 by Doctor Box
  9. 2015.11.15 다이타케 - Lather, Rinse, Repeat by Doctor Box
  10. 2015.11.15 타케히카 - 운명 by Doctor Box

타이코시 - 술

연성/단편 2016. 1. 4. 14:25

타이코시 -

2016년 1월 3일


"코시로오오오오오오-!"


얼굴이 새빨개진 야가미 타이치가 술 냄새를 잔뜩 풍기며 투정을 부리자, 모든 걸 다 안다는 듯한 표정을 지은 이즈미 코시로는 가만히 그를 무릎 위에 앉혀놓고 쓰다듬어 주었다. 또다시 여자친구와 헤어진 것인지, 여동생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술을 있는대로 들이킨 그는, 오늘도 어김없이 코시로를 찾아와 있었다.


늘 그런 식이었다. 완벽한 듯, 결점 하나 없어보이는 듯한 코시로와 헛점 많아보이는 타이치. 납득이 갈 것 같으면서도 가지 않는 그들의 우정은 얼핏 보면 일방적이었지만, 타이치와 코시로를 같이 아는 주의의 사람들에겐 그들만큼 끈끈하게 맺어진 친구들도 또 없었을 것이다.


"아니, 내가 뭘 잘못했다고 나한테 구러눈건뒈에..."


코시로는 눈을 감고 허공에 주먹을 휘두르는 타이치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의 쉴새 없는 입에서 퍼져나오는 술 냄새가 코 끝을 찔렀지만, 코시로는 말 없이 그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어 줄 뿐이었다. 


이윽고, 타이치가 코시로의 무릎 위에서 잠이 들면, 그는 조심스럽게 빠져나와 전화를 하곤 했다- 타이치 상이 잠들었으니, 데려가라고. 가끔은 히카리가, 또 가끔은 타케루나 야마토가 그를 데려갔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을 경우도 많았다. 


타이치 상이 이런 적이 한두번이어야지, 라고 늘 생각하는 코시로는 새근새근 잠이 든 타이치에게 이불을 덮어주곤 다시 연구 작업에 몰두하곤 했다. 다음 날 아침에 깨어난 타이치는 코시로에게 사과를 하고, 그는 늘 웃으며 타이치에게 냉수를 건네주었다- 다음에는 이렇게까지 마시지 말라고 충고하면서.


늘 그랬듯이.



***



딩동-


히카리가 미야코와 켄, 그리고 타케루와 영화를 보러 간다고 나간 어느 겨울 밤, 야가미 타이치는 자신의 집 앞에서 빨개진 얼굴로 입김을 내뿜는 이즈미 코시로를 발견했다. 


"타이치 상."


그의 목소리는 흔들림이 없었지만, 차가운 겨울 공기를 타고 타이치의 코를 간지럽히는 이 익숙하고 숨막히는 냄새는, 분명 술이었다. 높은 도수를 마신걸까, 아니면 그렇게 느껴질만큼 많이 마신걸까. 자신이 반팔 차림으로 문을 열었던 것도 잊어버릴 만큼 코시로의 술 냄새는 타이치의 코를 지나 그의 가슴을 찔렀다.


아니, 그건 술 냄새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도 모르게 피어난 연민의 감정이었는지, 무엇이었는지. 자신이 여자친구와 헤어졌다고 새해부터 술을 들이키고 코시로의 오피스에 찾아간 게 바로 엊그제인데, 이번에는 그 천하의 코시로가 술을 마시고 자신을 찾아왔다는 것에 대한 충격 때문일지도 몰랐다- 아니면, 안도감이었을까.  


코시로가, 자신이 코시로에게 의지하는 만큼 자신을 의지해주기에 찾아왔다는, 그런 안도감.


제 몸 하나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코시로를 방 안에 들인 타이치는, 멍하니 자신의 장갑 낀 손만을 만지작거리는 코시로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가 왜 여기 왔는지, 타이치는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게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코시로는 늘 자신이 무슨 말을 하든 다 아는 것 같았으니까. 자신이 무슨 일 때문에 여기에 왔는지, 왜 술을 마셨는지, 모두 다.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초등학교때부터 모험과 일상을 같이하며 코시로에 대해 모든 것을 알았다고 생각했지만, 술은 체질에 안맞는다고 하던 코시로가 왜 이렇게까지 마시고 자신을 찾아왔는지, 왜 또 그가-


타이치의 생각은 급작스럽게 코시로가 그에게 자신의 입술을 조심스럽게, 하지만 재빠르게 포개면서 끊겨버리고 말았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코시로의 입 안에 남아있던 알코올이 타이치의 입 안에서 맴돌았고, 타이치는 둘의 입술이 떨어지자 씁쓸함을 느꼈다- 이것이 술의 씁쓸함인지, 코시로의 마음 속 씁쓸함인지는 알지 못했지만.


"저도 참 웃기죠, 타이치 상."


"코시로, 너 무슨-"


"이러지 말아야 한다고 곱씹어도, 전 결국 타이치 상을 좋아하나봐요."


울먹이는 코시로의 목소리에 타이치는 방금 전 입맞춤에 대한 얘기는 커녕, 숨소리조차도 함부로 내지 못했다. 알지 못했던 코시로의 약한 모습에, 또 방금 그가 했던 행동에 대해, 수많은 질문이 머릿속을 유유히 헤엄쳤지만, 그는 그 중 무엇도 감히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이기적이라서 미안해요... 타이치 상이 헤어지는 것에 내심 기뻐하는 것도, 술 마시고 이렇게 찾아오는 것도... 추악한 걸 너무 잘 알지만..."


타이치는 조용히 훌쩍거리며 중얼거리는 코시로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자신의 무릎에 뉘였다. 계속 미안하다고, 자신이 나쁜 사람이라고 얘기하는 코시로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을 뿐. 그가 그랬듯이, 지금은 코시로를 안정시켜주는 것이 그가 해야 할 일이였다.


늘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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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켄카이저 - Psychosis

2015년 12월 29일


글을 시작하기 전에:
이 글은 노래를 기반으로 쓰여졌으나, 글이 길어짐에 따라 노래의 페이스와는 맞지 않을 확률이 더 높습니다. 그렇기에 노래를 들으시는 것을 추천하지만 그림 MAD 같은 느낌이 아닌 BGM 정도로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다 읽으시기 전에 노래가 끝날 확률이 더 높습니다마는...)


** 주의: 자학적이고 고어적인 묘사, 캐붕 있음. 읽을 때 주의 또 주의해주세요 ㅜ^ㅜ **




***



방문이 굳게 닫힌지도, 벌써 나흘.


깊게 잠긴 문 안을 가득 메우는 어둠 속에서 나는 내 자신을 저주한다- 학교도, 친구도, 가족도, 디지몬도. 그 아무것도 이젠 나에게 닿지 않는다. 그들이 나에게 닿아 오염될 일은 더이상 없다.


어둠의 바다가 다시 나를 부른지도, 벌써 나흘.


내 과거의 망령을 들먹이며 나를 부르는 소리에 어둠의 씨앗이 있던 상처가 오늘도 아파온다. 고통에 몸부림치며, 고통을 없애주길 바라며 긁어댄 탓에 내 목덜미는 손톱 자국과 말라붙은 핏자국으로 가득했지만, 아무래도 상관 없다.


이 모든 것은 내 짐이니까.



It was just the beginning, but I saw the end

시작에 불과했지만 나는 그 끝을 보았어

of a love lost story

놓쳐버린 사랑 이야기의 끝

It was burned in my head 

내 머릿속에 각인되어버렸지



다시 모두를 내 일에 끌어들이게 하고 싶지 않다 했지만, 어둠의 바다는 혼자 맞서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들은 영원히 감겨진 두 눈으로 나를 보았고, 굳게 꿰매어진 입으로 내게 속삭였다. 고통과 죽음을 속삭이는 입들이 나무를 이뤄 거미줄에 잡힌 파리처럼 날 겁박했고- 절대적인 광기가 핏빛으로 물들은 천공을 군림하는 세상이 끊임없이 그 손길을 내게로 뻗어왔다.


그런 어둠 속에서 날 미치지 않게 해준것은, 내가 초등학생일때에도 나에게 손을 내밀어주었던 바로 그 사람- 다이스케.



And I try to forget it, I try to move on

잊어버리려도 해봤고, 나아가려고도 해봤지만

but I'm trapped and I realize

결국 그 안에 갇혀 깨닫네

I've been dead all along

난 이미 죽어있었다는 것을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그를 끌어들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어둠의 바다는 그 어느 때보다 강렬했고, 그들은 빛의 아이 대신 나를 부르고 있었다. 희망이 다시 그녀를 구해줄 것을 알기라도 하는 듯, 그들은 대신 이미 어둠에 빠졌었던 나에게 달콤함을 속삭였다.


먼저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이 흔들렸고,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흔들렸다. 내 가치관이 흔들렸고, 내 자신이 흔들렸다. 


나는 왜 그들을 거부하고 있지?

모든 것은 결국 네 잘못이야.


나는 왜 속죄하고 있지?

모든 것은 결국 네 잘못이야.


나는 왜 내가 옳다고 생각한 것에 대해 비난받아야 하는거지?

모든 것은 결국...



Black hearts beat under lungs that bleed

칠흑같은 심장이 너의 머릿결을 핥아대는 연기 덕에

From the smoke that licks at your hair

피 흘리는 폐 아래에서 계속해서 두근댄다-



너무 쎄게 주먹을 쥐어 손톱 자국이 남아있는 손바닥 안에는 방금 쥐어뜯은 보랏빛 머리카락들이 한움큼 쥐어져 있었다. 그래- 여기서 끝내야만 했다. 이미 더럽혀져 있는 내 심장마저 그들이 다시 쥐게 할 순 없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책상 위에 널부러져 있는 칼을 집어든다. 이미 몇번 시도했던 듯 칼은 붉게 물들여져 있었다.


어? 내가 언제?


이미 내 왼손은 붉은 직선으로 가득했다. 어쩌면 왼손에 도통 힘이 없던 이유가 그 때문일지도 몰랐다. 쓰라린 상처를 칼을 쥔 채로 천천히 훑는 순간, 누군가가 거칠게 방문을 두들겼다.



Don't save me I am lost

날 구하지 마, 난 이미 늦었어

I'd let you in but the door is locked

들어오라 하고 싶어도 문은 이미 잠겼어

And I am screaming from inside

난 그 안에서 비명 지르고 있으니까-



"켄!"


방문 너머에서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여태까지 느끼지 못했던 오한이 엄습한다. 마치 다이스케가 자신을 찾아올 그 날을 기다리고 있기라도 했었던 듯, 어둠이 소름끼치게 미소를 짓는 것만 같았다.


"그 안에 있는 거 다 알아, 부모님한테 들었다고! 문 안 열어?"


하지만 열어줄 수 없는걸, 다이스케 군. 다이스케 군을 끌어들이고 싶지 않아. 날 내버려둬. 어차피 곧 끝내려고 했던 참이었는데. 이건 내 고민이야, 내 고통이야, 내 벌이야-


쾅.


축구로 단련된 발길질에 잠금쇠가 단박에 떨어져 나가고, 거친 숨을 몰아쉬는 성게 머리의 남자 아이가 기어코 내 방에, 내 어둠 속으로 빛을 들고 헤집어 들어온다.



Don't let me out cause I can't be free

날 꺼내주지 마, 난 자유로워질 수 없어

There's not a lot of life left in me

남아있는 생명의 불씨마저도 얼마 없어

And I got a little surprise for you

널 위해 깜짝 놀랄만할 것을 준비했으니까-



"도대체 무슨 일이야 켄, 꼴이 말이 아니잖-"


씩씩거리며 나를 쏘아붙이던 그가 내 몰골을 보고 말을 멈췄다. 네가 봐도 나는 추악하겠지? 발버둥쳐 보았자 이미 어둠에 물들여질대로 물들여져버린 나는 이미 네가 알던 사람이 아니니까.


"켄, 너 설마-"


"이제 그만 돌아가줘, 다이스케 군."


마른 침을 삼키고 조용히, 하지만 확실하게 말한다. 난 널 지키려는 거야. 나라는 존재를 지워줘.


"무슨 짓을 하고 있었던거야?!"


열린 문 사이로 흘러들어오는 불빛 때문이었을까, 내 등 뒤를 은은하게 빛내고 있는 한 줄기 달빛 때문이었을까. 다이스케는 내 손목을 보았고, 황급히 뒤로 숨기려던 나의 손을 잡아챘다.


"그거 이리 내,"


그가 나머지 한 손으로 거칠게 내 칼을 빼앗으려고 하지만, 나는 손에 힘을 준다. 내 희망을, 내 탈출구를 훔쳐가려 하지 마. 난 널 위해 모든 걸 짊어질 각오가 되어있는데, 너는 왜 나에게서 그 희생마저도 빼앗으려 해?



All the voices in my head (all the voices in my head)

내 머릿속 목소리들 (내 머릿속 목소리들)

They're telling me to do things I regret (you know you want to)

내가 후회할 짓들을 하라고 속삭이고 있어 (너도 이걸 바라고 있잖아)



빼앗으려는 다이스케와 놓지 않으려는 나. 그가 잡고 있던 왼손을 뿌리치고 두 손으로 칼을 뺏기지 않는데 내 온 힘을 집중한다. 


"다 널 위해서란 말야," 라고 악을 쓴다. 다이스케도 지지 않고 뭐라고 외쳤지만 더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가 뭐라고 하던 상관 없었으니까. 나는 악이고, 너는 선이야. 내가 최소한 조금의 자존심이라도 품고 떠날 수 있도록 허락해주는게 그렇게 힘든거야?


난 너를 구하려고 하는건데 왜 넌 날 이해하지 못해? 


나의 심장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며, 나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었었다며.

진정한 용기가, 우정이 뭔지 그 고생을 하고도 겪지 못한거야?


때로는 놔줄수도 있어야 한다는 걸 왜 몰라?



Don't make me I won't do it

부추기지 마, 난 안 할거야

(Yes you will, you're hungry, admit it!)

(할거잖아? 실은 이걸 원했으면서. 인정해!)



머리가 점점 더 세게 울린다. 누군가 내 옆에서 종을 울리듯, 충격이 관자놀이를 타고 머리 전체로 퍼져나간다. 실랑이를 벌이며 우리는 서로 입에 담기 힘든 말을 내뱉지만 그것이 무엇인지조차 나는 알 수 없다.


양손으로 미끄러질듯한 칼 손잡이를 더욱 더 세게 쥔다. 다이스케도 질세라 그의 오른손으로 내게서 칼을 빼앗으려 한다- 손잡이와 이어져 있는 칼날에 그의 엄지가 깊게 베이고, 그의 머리색만큼이나 붉은 피가 칼을 따라 흐른다.


불빛와 달빛은 섞여 춤을 추듯 우리를 조롱했고, 친절했던 그의 얼굴도 어둠에 물들어가듯 비웃음을 띄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다이스케가 아닌 어둠의 바다 그 자체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이제 그만 이성의 끈을 놓으라는듯이 나를 부추기면서.


애정도, 연민도 아닌 증오심이 가슴 가장 깊숙한 곳에서부터 끓어오른다.

내 고통에 대해서, 내가 하려는 것에 대해서- 나에 대해서 아는 것 하나 없으면서.


왜 나를 방해만 하려고 드는거야?



Two hands hold the will of one

두 손이 하나의 의지를 가득 담는다-



모두의 눈을 아프게 하는 불빛은, 꺼뜨려야만-


푸욱.



AND YOU CAN'T UNDO WHAT I'VE DONE

그리고 내가 한 짓을 넌 돌이킬 수 없어



모든 것이 멈출 듯 느려졌다. 내 시선은 충동적으로 튀어나간 내 팔을, 그리고 조금 전까지 손잡이를 잡고 있던 다이스케의 피 흐르는 손을 지나, 그의 복부에 깊숙히 박혀있는 칼에 다다랐다. 



Don't save me I am lost

날 구하지 마, 난 이미 늦었어

I'd let you in but the door is locked

들어오라 하고 싶어도 문은 이미 잠겼어

And I am screaming from inside

난 그 안에서 비명 지르고 있으니까-



마치 보기 싫은 공포 영화의 한 장면을 슬로우 비디오로 보는 듯, 아주 천천히 그의 점퍼가 붉게 물들었다. 나도 모르게 칼을 쥐고 있던 손을 놓자- 이번엔 내 주위 모든 것이 모습을 바꾸었다.


나는 절벽 앞에 서 있었다. 내가 놓은 것은 칼이 아니라 다이스케의 손이 되어있었다. 나를 마지막까지 믿고 있던 그의 얼굴에 알 수 없는 표정이. 놀람일까, 충격일까, 고통일까. 가만히 손을 내밀고 멈춰있는 나를 끝까지 쳐다보던 그의 몸이 절벽 뒤로 천천히 넘어갔다.


그럼에도 그의 얼굴에서, 배신감도, 증오도 찾아볼 수 없는 건 왜일까.


이 절벽 끝으로 널 데려온 것도, 결국 이 절벽에서 널 밀어낸 것도 나인데.

너는 왜 끝까지 나를 혐오하지 않는걸까?


그런 너를 완벽하게 나에게서 지우고자 너를 밀쳐버린 나는- 



Don't let me out cause I can't be free

날 꺼내주지 마, 난 자유로워질 수 없어

There's not a lot of life left in me

남아있는 생명의 불씨마저도 얼마 없어

And I got a little surprise for you

널 위해 깜짝 놀랄만할 것을 준비했으니까-



쿵.

그의 몸이 땅바닥과 거칠게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나는 다시 내 방으로 돌아왔다. 방바닥에 누워 칼을 헤집고 흘러넘치는 붉은 피를 막으려 그의 더듬거리는 두 손이 용을 쓰지만, 댐이 무너지듯 피는 계속 쏟아져 내렸다. 새빨간 피가 땅바닥을 천천히 잠식하고, 그의 찬란한 빛도 천천히 깜빡인다.

그럼에도 마지막까지 너는 나에게 뭐라고 속삭인다. 조금 전까지 듣기 싫어했던 네 목소리가 그리워 허공에 있던 손을 움직여보지만, 네 목소리는 나에게 닿지도 못하고 사라져 버린다. 허겁지겁 무릎을 꿇고 피 묻은 네 손을 부여잡아도, 네 속삭임은 들리지 않는다.

난 내 손으로 도움을 뿌리쳐 버렸어.
넌 네 손으로 네 친구를 찔렀어

난 내 손으로 다이스케를 배신했어.
넌 네 손으로 네 친구를 죽였어

땅바닥에 차갑게 떨어지는 네 손과 함께, 괴로운 비명을 지른다. 끝까지 이기적이게도, 나는 네가 살아있는지 아닌지는 관심 없었다. 난 네가 나에게 하려던 말이, 나에게 할 말이 너무 두려울 뿐이야.


You should leave now, and never look back
넌 이제 그만 떠나는게 좋아, 뒤돌아보지 말고
I should leave now, and never look back
나도 이제 그만 떠나는게 좋아, 뒤돌아보지 말고


눈에서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피눈물이어도 이상할 게 없겠지만, 나는 볼 수 없었다. 달빛도, 불빛도 모두 내 어둠에 먹혀 빛나지 못했다. 그의 빛이 꺼짐으로써 나는 다시는 앞을 볼 수 없는 장님이 되어버렸다.

영원한 어둠 속에서 무릎을 꿇고 머리를 다시 쥐어뜯는다. 어차피 아무리 소리 질러도 이 집엔 더 이상 아무도 없으니까-

그들을 제외하고.

어떻게든 벗어나려 다이스케에서 멀어져 침대로 올라가려 해보지만, 불탈 듯 타오르는 사다리에 금방 손을 놓는다. 남아있는 것은 그의 피로 이루어진 내 손자국. 

가장 밝게 빛나던 태양을 쏴내린 죄인에게 안식 따위는 허용되지 않는거야.


You should leave now, and never look back
넌 이제 그만 떠나는게 좋아, 뒤돌아보지 말고
I should leave now, and never look back
나도 이제 그만 떠나는게 좋아, 뒤돌아보지 말고


또다시 처절한 비명을 지르지만, 이번에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들만이 나를 보며 조소하듯 킥킥댈 뿐. 그들은 이걸 원하고 있었어. 내가 완전한 어둠 속에서 들을 수 없는 어둠 밖 모두를 향해 소리치기를, 처절하게 몸부림치기를.

이것도 결국은 내가 선택한 거야.
불공평해.

난 내가 만든 감옥 속에 있어.
왜 나만 당해야 하지?

이 모든 건 다 내 탓...
이 모든 건 다 그 녀석들 탓.

모든 게 네 손아귀 안에 있었다면, 모두가 너 같았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텐데. 그렇지?
응.

어차피 내가 더 이상 잃을 게 남아있는 것도 아니잖아?


You can't save me I am lost

날 구할 수 없어, 난 이미 늦었어

I'd let you in but the door is locked

들어오라 하고 싶어도 문은 이미 잠겼어

And I am screaming from inside

난 그 안에서 비명 지르고 있으니까-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그들의 목소리가 점점 더 멀어져 간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발소리가 잔잔한 호수에 물수제비가 물결을 일으키듯 울려퍼지고- 내 눈도 차차 다시 선명해져만 간다.


다이스케가 있던 곳을 힐끗 쳐다보지만, 그 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살아있어 이 곳을 빠져나간걸까, 아니면 나는 더이상 그에 대해 상관하지 않게 된 것일까? 어느 쪽이든 상관 없었다-


이미 빛은 없으니까.


피가 덜 묻은 오른손으로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검은 디지바이스를 쥔다. 내 의지에 반응하듯 디지바이스는 불길하게 삑삑댔고- 나는 어머니 품을 찾는 아이처럼 비로소 그들에게 돌아갔다.


터덜터덜 벽에 서있는 전신 거울을 향해 다가간다. 거울에서 비춰보이는 디지몬 카이저의 차가운 미소. 공포에 질려 디지바이스를 쥔 손을 휘두른다- 쩌억 하고 거울이 갈라지는 소리가 들린다.



Don't let me out cause I can't be free

날 꺼내주지 마, 난 자유로워질 수 없어

There's not a lot of life left in me

남아있는 생명의 불씨마저도 얼마 없어

And I got a little surprise for you

널 위해 깜짝 놀랄만할 것을 준비했으니까-



다시 내 머릿속을 가득 메우는 그들의 비명소리.  

다른 손으로 거울에 손을 대고 무릎을 꿇자, 자연스레 내 손을 따라 거울에 핏자국이 묻는다- 마치 천국에서 추락하는 천사처럼, 끝없는 지옥으로 떨어지는 나를 상징하듯.

다시 거울을 올려다보지만, 깨져버린 유리 조각에서는 수많은 카이저들이 나를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내 진실된 모습은 하나도 비춰지지 않은 채, 하나같이 나를 비웃으며.

비웃음을 차마 참지 못하고 떨궜던 고개를 다시 들고 거울을 향해 손을 뻗는다- 그래, 지금 의지할 수 있는 건 한 명 뿐이니까.

오사무 형.


I don't have much time here, so stay here
남은 시간이 별로 없어, 그러니 여기 계속 있어


형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형이라면 나처럼 되진 않았겠지?
형은 왜 죽어서도 내가 원하는 걸 모두 갖고 있는거야?

형의 모습을 하고 나를 바라보는 디지몬 카이저들을 마주보며, 나는 말없이 어둠을 삼킨다.

이 모든 것은-
내 짐이니까.


Everything you have I want, but the truth is...
난 네가 갖고 있는 그 모든 걸 원하지만, 진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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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케히카 - The Disintegration of the Persistence of Memory
2015년 12월 23일


글을 시작하기 전에:
이 단편은 타케히카 수위물 The Persistence of Memory (기억의 지속)의 다음 이야기입니다.

후편이니만큼 수위가 조금 더 올랐으니, 캐붕 및 수위물을 안좋아하시는 분들은 조심해주세요.


덤) 이 긴 제목은 "기억의 지속의 해체"라는 뜻으로, 유명한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가 자신의 가장 유명한 그림인 "기억의 지속"을 1945년에 다른 관점으로, 다시 한번 그린 그림의 제목입니다. 전편에서 뭉뚱그려 넘어갔던 부분을 좀 더 자세히 (...) 해체해서 본다는 뜻에서 이런 이름을 붙였습니다.



***



"히카리 쨩..."


맞닿은 입술을 조심스레 뗀 타케루가, 거친 숨과 함께 꼬옥 맞잡고 있던 히카리의 손을 조금 더 세게 쥐며 말했다. 


이미 그의 머리는 물기 하나 없었고, 그녀가 걸치고 있던 타케루의 셔츠도, 그녀가 입고 왔던 옷도 그의 수건과 함께 한쪽으로 내팽겨쳐져 있었지만- 두 남녀는 그 이상으로 발을 내딛지 못하고 있는 듯 했다.


"괜찮겠어?"


마른 침을 삼킨 타케루가, 저도 모르게 그녀의 드러난 쇄골을 엄지 손가락으로 훑으며 물었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알지 못하는 듯, 그의 눈은 그녀의 깊은 눈동자에 고정되어 있었다.  


"몇번을 물어볼 셈이야, 타케루 군,"


똑같이 그의 사파이어빛 눈을 바라보던 히카리가, 쿡- 하고 작게 웃으며 말했다. 어쩌면, 지금 상황은 그들의 관계에 있어서 너무나도 급작스런 전개일수도 있음은 그녀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리라- 하지만 동시에 이 마법같은 달콤함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다는 마음 또한 히카리를 강하게 사로잡고 있었다. 이것이 꿈이라면, 차라리 깨지 않기를.


"우리 이제, 어른이잖아."


그녀의 대답에 미소를 지으며 다시 한번 입을 맞춘 타케루는, 자신의 손에 쥐여져 있는 분홍색의 포장지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 책상 밑 서랍을 거칠게 열어 가져온 그것은, 다름아닌 그의 형 야마토가 그에게 준 선물이었다.


"이제 너도 알만큼 알 나이니까, 특히 조심해야지."


"아, 형-!"


작년 크리스마스 밤, 토마토보다 빨갛게 달아오르는 타케루를 보며 무척이나 즐거워하던 야마토가 그에게 억지로 넘겨준 것은, 바로 콘돔 한 박스. 이제 성인이 되었으니 그에 맞는 선물을 타이치와 고민하고 또 고민해서 준비했다며 간신히 웃음을 참는 야마토를 보고 있자니, 그 둘이 이 선물을 준비하며 얼마나 배꼽을 잡고 웃었을 지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재생이 되던 타케루였다.


그리고 지금 이 상황에서 그 포장지를 바라보고 있으니, 왜인지 지금 자신이 그 선물을 누구와 사용하려고 하는지 알게 된다면 타이치가 어떻게 반응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타케루... 너...


웃음이 터져나옴과 동시에 머릿속에서 울려오는듯한 오싹한 목소리를 뒤로 하고, 타케루는 오른손을 들어, 하얗게 빛나는 앞니의 도움을 받아 포장지를 뜯었다. 내용물을 꺼내고 포장지를 던져버린 그는,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히카리에게 다시금 입을 맞췄다.


"천천히 할테니까..."



***



삐리리리리리-


해가 뉘엿뉘엿 지는 초저녁, 방 안에 울려퍼지는 전화기 소리에 타카이시 타케루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자신의 옆에 누워서 자고 있는 히카리를 본 타케루는, 그녀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고, 혹여 옷을 벗고 있는 그녀가 감기라도 걸릴까 이불을 조심스럽게 덮어주고는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땅바닥에 널부러져 있는 츄리닝 바지를 걸쳐입고, 벨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고개를 돌린 그는, 히카리의 앙증맞은 핸드폰이 부르르 떨며 악을 쓰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가 그녀의 핸드폰을 집어들기도 전에 벨소리는 끊겼고, 그제서야 타케루는 창문에 부딪히는 굵은 빗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비가 엄청나게 쏟아지는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며 히카리의 전화기를 내려다 본 그는, 피가 온몸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창백해진 그 손에 쥐여진 핸드폰에, 부재중 전화 19통: 타이치 오빠 라는 글자가 반짝이고 있었기 때문이었으랴.


그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핸드폰은 다시 울리기 시작했고, 이번에도 어김없이 핸드폰에는 "타이치 오빠"라는 글귀가 적혀있었다. 그 때, 침대 속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비비며 "타케루 군-" 이라고 잠긴 목소리로 말하는 히카리를 돌아본 타케루는, 아무 말 없이 그녀에게 전화기를 넘겨줬고, 반쯤 감긴 눈으로 타케루를 바라보던 히카리의 눈도 번쩍 뜨이고야 말았다.


"여- 여보세요-"


히카리가 떨리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자마자, 타이치의 목소리가 핸드폰을 찢고 나올듯 터져나왔다. 


"도대체 전화도 안 받고 뭐하고 있는거야! 걱정했잖아! 태풍이 부는데!"


"엣- 태풍이라니?"


"뭘 하고 있었길래 밖이 저렇게 난리인데 모르고 있었던거야?"


그제서야 히카리는 타케루의 시선이 향한 곳을 바라보았고- 점심까지만 해도 조용하고 따뜻했던 날씨는 어디 가고, 강한 바람과 거센 빗줄기만이 창문 밖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히카리?"


"아, 그- 타- 타케루 군네 집에서 영화를 보다 같이 깜빡 잠이 들어서..."


히카리는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거짓말을 황급하게 내뱉었다. 타케루와 히카리가 사귀고 있는 것은 타이치도 알고 있었지만, 몇달 전에 그들이 그 사실을 모두에게 말했을 때의 타이치의 리액션을 생각하면, 오늘 그의 집에서 일어난 일에서는 절대 말하지 않는게 현명했을 테니까. 


뭐, 그래도 반은 사실이지만...


히카리가 누구에게랄것도 없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어휴.. 알았어, 엄마한테 이미 말해뒀으니까, 타케루 어머니께 물어봐서 가능하면 오늘은 거기서 자고 와, 알았지? 이 날씨에 또 억지로 집에 오려다간 클난다!"


타케루는, 타이치의 목소리를 조용히 듣고 있더니 히카리에게 고개를 끄덕이곤 자신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하러 거실로 나갔다. 한편, 타이치의 설교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던 히카리는, 자신이 방문을 열고 나가는 타케루의 벗은 등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다시 얼굴이 붉어지고야 말았다.


"... 서로 다른 방에서 자는 거 명심하고. 조심해서 있다 와, 알았지?"


"아- 응, 알았어 오빠, 고마워. 걱정시켜서 미안해. 내일 봐!"


휴. 히카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전화를 끊자마자, 전화기를 귀에 대고 있는 타케루가 알 수 없는 미소를 띄며 방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네- 네, 알겠어요. 나도 사랑해요 엄마, 조심하세요."


전화를 끊은 타케루는, 환하게 웃어보이며 침대에 앉아있는 히카리 옆에 털썩- 하고 걸터앉았다. 


"오늘 밤 자고 가도 된대. 이럴 때 집에 보내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하셨어."


"오시면 고맙다고 말씀드려야겠네. 근데 왜 이렇게 웃고 있어, 타케루 군?"


"아 그게, 비 때문에 고속도로가 임시로 폐쇄되었다나봐. 그래서 동료분의 집에서 묵고 가신다고, 오늘밤은 우리 둘이서만 있으라고 하시길래."


"엣, 그러면-"


히카리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타케루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입을 맞췄다. 천천히 입술을 떼며 숨을 들이쉰 타케루는, 미소를 지으며 히카리에게 다시 다가갔다-


"오늘은 우리만의 밤이야, 히카리 쨩." 라는 말을 속삭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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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케히카 - The Persistence of Memory

2015년 12월 3일


연성 키워드 진단메이커
타케히카의 연성 키워드는 시곗바늘셔츠참을 수 없는 입니다.



***



눈부신 햇빛이 그림자를 모두 불태워버릴 기세로 내리쬐는 화사한 여름날, 붉은 셔츠 덕에 더 빛나는 금색 목걸이를 한 여자아이가 자신을 비추는 햇님보다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걷고 있었다. 


이마를 타고 흐르는 한줄기 땀을 닦아내고, 삐쳐나온 마호가니 색의 머리를 천천히, 하지만 신중하게 머리띠 안으로 다시 집어넣은 야가미 히카리는, 아파트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높게 서있는 아파트를 한번 올려다본 그녀는, 할 수 있다고 자신에게 주문이라도 거는 듯 짧은 숨을 내쉬고는 엘레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서로 이런저런 일로 바빴던데다 그녀의 오빠 타이치가 여름 감기까지 걸려버렸던 탓에 만날 날을 쉬이 잡지 못했었지만, 마침내 만날 약속을 잡은 만큼, 히카리는 무척이나 들떠있었다. 정말 며칠만에 남자친구와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된 것인가- 그것도 단둘이서만!


층수를 알리는 낭랑한 목소리와 함꼐 엘레베이터 문이 열리고, 히카리는 천천히 그의 집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2시 5분


손목에 찬 시계를 내려다본 히카리가 중얼거렸다. 


약속한 시간보다 25분이나 일찍 도착했네.


시계를 차지 않은 반대쪽 손을 들어 초인종을 누르려던 그녀는, 예상치 못한 상황과 마주했다-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갑자기 열리더니, 그녀보다 키가 큰 금발 여자 한명이 한쪽 발을 들어 구두를 고쳐신으며 나왔기 때문이었다.


"어머, 히카리 아니니?"


히카리의 앞에 서있는 것은 다름아닌 나츠코 상이었다- 타카이시 타케루의, 히카리의 남자친구의 어머니. 순간 몸이 굳어진 히카리는, 그 자리에 잠시 가만히 있었지만, 곧이어 정신을 차리고 웃으며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타케루를 보러 왔나보구나? 일 때문에 나가려는데 딱 마주쳤네. 타케루는 지금 샤워 중이니까, 잠깐만 안에서 기다리려무나. 먹을 거라도 가져다 주고 싶지만, 빨리 가야해서 말야. 그럼, 재밌게 놀다 가렴!"


히카리가 답을 할 새도 없이, 속사포로 말을 내뱉은 나츠코는 급한 듯,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는 또각또각 거리는 하이힐 소리와 함께 복도 너머로 멀어져갔다- 멍하니 열린 문을 잡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히카리를 뒤로 하고.


현관문을 닫고, 조심스럽게 신발을 벗어 한쪽으로 놔둔 히카리는, 쏴아아아- 하고 들리는 샤워기 소리를 들으며 익숙한 타케루의 방으로 걸어들어갔다. 그의 침대에 걸터앉아 한숨을 내쉰 히카리는, 자신이 왜때문인지 안도하고 있음을 느꼈다.


내가 안도감이 들만한 일이 뭐가 있지?


자신의 감정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고 있던 히카리는, 문이 열리고 타케루의 어머니를 보았을 때 순간 자기도 모르게 멈칫했던 것을 곱씹어 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왜 그랬는지도.


설마, 나 타케루 군이랑 단 둘이 있는게 아니라 어머니도 같이 계시는거라고 생각해서 실망했던거야?


자신만의 결론에 도달하고 얼굴이 확 붉어진 히카리는, 발을 동동 구르다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혹시라도 타케루가 샤워를 끝마치고 나왔을 때, 며칠만에 그가 처음 보는 그녀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새빨개진 게 아니기를 바랐기 때문이었으랴.


또다시 한숨을 내쉬며 마음을 가라앉힌 히카리는 양 손을 다시 침대에 맥없이 내려놓고는, 풀썩- 하고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나도 참, 부끄럽게.


그제서야, 히카리는 무언가 바스락거리며 그녀의 등을 간지럽히고 있음을 깨달았다.


다시 벌떡 일어나 고개를 돌리자, 침대에는 그녀가 조금 전까지 깔고 누워있던, 그가 아무렇게나 벗어둔 것 같은 와이셔츠가 있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그의 옷을 집어드는 히카리의 심장이, 다시금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살짝 떨리는 손으로 셔츠를 돌려보자, 셔츠에는 구김 자국이 있었지만 (그녀가 깔아뭉갰었다는 점을 제외하더라도), 깨끗해 보였다- 오늘 아침에 입었다가, 샤워를 하려고 벗어둔 것이 분명한 듯.  


타케루가 아침에 샤워를 끝마치고 이 하얀 셔츠를 맨 몸 위에 입는 것을 상상하니, 얼굴이 어찌나 또 시뻘겋게 달아오르는 것 같은지. 간신히 그런 생각을 떨쳐냈을 때 다음으로 든 의문점은, 그가 그녀보다 얼마나 체격이 더 클까 하는 점이었다. 


그냥 위에 걸쳐도 입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저도 모르게 와이셔츠에 달린 검은색 버튼을 두 손가락 끝으로 만지작거리던 히카리는, 조심스럽게 셔츠를 이미 입고 있던 옷 위에 걸쳐보았다. 그녀가 예상한 대로, 사이즈가 컸던 셔츠의 소매는 그녀의 팔을 가리고도 남아 끝에 대롱대롱 흔들리고 있었고, 단추를 잠그고 나서도 어린이 한명이 더 들어갈만한 자리가 남을만큼 낙낙했다.


손목을 흔들 때마다 시계추처럼 같이 흔들리는 소매를 쳐다보다, 다시 셔츠를 제자리에 놓아두려 단추를 푸는 그 순간, 예기치 못하게 방문이 덜컥- 하고 열렸다. 


"히- 히카..리 쨩...?!"

"타케- 타케루 구-"


두 남녀는 얼어붙은 듯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츄리닝 바지만 입고, 상의를 벗은채로 젖은 금발 머리를 말리며 아무 생각 없이 방문을 열은 타케루와, 달랑거리는 소매 밖으로 간신히 손을 꺼내 호기심에 입어본 그의 셔츠를 벗으려던 히카리. 쉰 목소리로 서로의 이름을 부르고 서로를 쳐다보는 그 불편한 시간이 어찌나 영원같던지.


떨어지지 않는 입을 어떻게든 열어 변명을 하려던 히카리에 눈에 들어온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궁금해하던 그의 체격이었다. 


처음 보는 그의 상체. 보디빌더처럼 우락부락하진 않았지만 몇년간 농구를 한 덕에 잔근육이 단단하게 발달해 있는 그의 몸. 히카리의 눈이 타케루의 쇄골에서부터 가슴으로, 복근으로 내려갈수록- 그녀의 얼굴은 한없이 더 붉어지고 있었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은 타케루도 마찬가지였다- 여자친구가 집에 이미 와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해서 자신의 맨 몸을 의도치 않게 보여준 것은 둘째치더라도, 그가 아무렇게나 벗어둔 셔츠를 그녀가 입고 있을 줄이야! 


혼란과 부끄러움 속에 거칠어지는 숨소리.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선, 뭐라고 말이라도 해야함을 알았지만, 타케루의 머릿속은 이미 다른 것으로 가득차 있었다- 자신의 셔츠를 입고 있는 히카리가 어찌나도 귀여운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그녀를 향한 사랑이 냄비를 타고 흘러내리는 거품처럼 다른 생각들을 쫓아내기라도 하는 듯.


이미 부끄러움도, 당황스러움도 모두 잊고 서로를 넋 놓고 쳐다보던 두 연인 중에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히카리였다. 


"타- 타케루 군, 미안해, 내가 그러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그게, 그- 지금 당장 돌려줄게-"


그제서야 타케루도 정신을 차린 듯, 버벅거리며 히카리에게 달려갔다.


"아냐, 내가 갑자기 들어와버려서 그래, 미안해 히카리 쨩, 내가 도와줄-"


침대에 앉아서 단추를 풀려고 하는 히카리와, 그녀를 도와주겠답시고 후다닥 손을 뻗은 타케루. 


타케루가 히카리의 손을 단추 대신 잡은 것도, 그녀가 중심을 잃고 침대로 풀썩 쓰러진 것도, 타케루가 얼떨결에 왼손은 침대에, 오른손은 히카리의 손을 잡고 그녀를 내려다보게 된 것도, 다 당연한 수순이었을지도.


또다시, 그렇게 그 둘은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훨씬 더 가깝게, 훨씬 더 위험하게. 


이보다 사람의 얼굴이 더 붉어질 수 있을까? 마치 시간이 멈춘 듯, 터질것 같은 표정을 하고 서로를 바라보는 그들 사이에는 침묵만이 가득했다. 천천히 똑-딱- 거리는 시곗바늘의 소리만이, 두 남녀의 심장소리와 대결이라도 하듯 크게 울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둘은 전혀 눈을 돌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은은하게 빛나는 분홍색이 섞인 히카리의 갈색 눈 속으로 빠져들듯 그녀를 바라보던 타케루는, 원래같았으면 얼굴을 가리거나 고개를 돌렸을 히카리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을 똑바로 마주보고 있음을 느꼈다.


히카리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성은 그녀에게 얼굴을 돌리고 이 상황에서 벗어나라고 충고하고 있었지만, 그의 붉은 얼굴과 대비해 더 밝게 반짝이는 파도빛 눈동자에서 벗어나는게 가능할리가 없었다.


자신을 계속해서 바라보는 히카리의 눈빛에 홀리기라도 한걸까. 이 어색하고 불편해야할 상황에서, 그녀에게 입맞춤을 하고 싶은 욕망은 왜 계속 커지는 것인지. 계속 부정하고 또 부정했지만, 그의 머리 뒷편에선 늘 이런 상황을 바라오지 않았냐는 외침이 끊임없이 메아리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둑이 무너지듯, 타케루의 얼굴이 그녀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히카리의 손은 이미 그가 놓아준지 오래였지만, 그녀는 다가오는 타케루를 보고도 얼굴을 돌리지도, 이 상황에서 빠져나오려 하지도- 그렇다고 그를 밀쳐내지도 않았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그의 새하얀 피부와, 아직 다 마르지 않은 젖은 머리. 아랫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천천히 돌리는 그의 모습에 매료된 듯, 그녀는 떨리는 눈꺼풀을 파르르 감았다.


째깍거리는 시계 소리를 음악 삼아, 두 남녀의 입술이 천천히 맞닿았다. 키스를 해본 적이야 많았다지만, 이만큼 짜릿하고 강렬한 적이 언제 또 있었을까.


째깍-


그렇게 그들의 서로를 향한 사랑 속에 어느샌가 묻혀진 시계 소리. 


째깍-


시곗바늘은, 그런 그들을 시샘이라도 하듯 빠르게 돌고 또 돌았다.


째깍-


해가 질때까지, 멈추지 않고...



***



추신:

단편 The Disintegration of the Persistence of Memory (기억의 지속의 해체)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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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레스 - 카소드 테이머

2015년 11월 27일


"이야아, 이게 누구야, 워레스 아니야-"


"다이스케 군-!" 살짝 짜증 섞인 목소리로 눈을 굴리는 타케루를 컴퓨터에서 밀쳐낸 다이스케는, 타케루의 외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화상통화를 통해 모니터 너머로 자신에게 손을 흔드는 백인 아이에게 큰 미소를 지어보였다.


"다 기억하고 있겠죠, 워레스 군,"


쉴새없이 지난 일들을 떠벌리는 다이스케를 간신히 밀어낸 타케루가, 워레스를 보며 나머지 아이들을 향해 손짓했다. 이제 중학생 교복을 입고 있는 미야코와 히카리가 오래된 친구를 향해 손을 흔들었고, 사복을 입고 있는 이오리 또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조금 더 어두운 교복을 입고 있는 또다른 아이 하나는, 나머지 아이들 옆에 어색하게 서있기만 할 뿐이었다.


"아, 맞아, 그러고 보니 그때는 켄이 없었지,"


다이스케의 손에 반쯤 이끌려 모니터에 얼굴을 드러낸 단발 머리의 아이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의 자수정빛 머리를 쓸어넘겼다. "아- 얘기는 많이 들었는데- 반가워요."


"나도 타케루한테서 얘기는 많이 들었어- 만나서 반가워, 켄!"


"그러고 보니까 말야, 워레스," 다이스케가 마침내 켄의 손을 놓고 다시 워레스와의 대화에 집중하자, 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모니터에서 한발짝 뒤로 물러섰다. 어차피 자신이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인만큼, 그는 나머지 아이들이 기쁜 맘으로 대화를 하는 것을 지켜보기만 할 셈이었다... 다이스케의 다음 말을 듣기 전까지는.


"그래서, 구미몬이랑 초코몬은 잘 지내?"


켄은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몸이 돌처럼 굳어짐을 느꼈다. 특별히 그 디지몬들을 아는 건 아니었지만, 워레스의 파트너가 하나가 아닌 이라는 것에.


"죄송합니다, 워레스 군, 한가지만 물어볼게요."


다이스케를 밀어낸 켄이 무릎을 꿇고 모니터 앞으로 다가갔고, 뭔가 이상한 기류를 알아차린 아이들은 입을 다물고 걱정스런 눈빛으로 켄을 바라보았다.


"아, 응, 얼마든지."


"혹시... 아키야마 료라는 사람을 아세요?"


켄의 물음에, 아이들은 하나같이 눈썹을 치켜뜨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것이, 그들의 모험이 끝난 후, 디지몬 카이저가 되기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이스케가 조심스럽게 물었을 때, 켄은 상세한 이야기를 하기를 꺼려했다- 그를 도와줬다는 단 한 사람의 이름, '아키야마 료'를 제외하고.


그 이후로 절대 켄의 입에서 그 이름이나 그 때의 일이 언급되는 적은 없었다- 최소한, 지금까지는. 아이들은 무언의 눈길을 주고받았지만, 그들을 더 놀라게 한 것은 다름아닌 워레스의 대답이었다. 


"아, 너도 료를 아는거야? 이야, 반가운걸. 그 녀석은 잘 지내는가 모르겠네."


"그에게서 무언가 특별한 걸 받기라도 했나요?"


"그게 무슨 소리야?"


"워레스 군... 디지몬 파트너가 둘이잖아요. 안그래요?"


"응, 그렇지. 초코몬과 구미몬. 이 둘은 쌍둥이니까-"


"하지만, 워레스 군은 카소드 테이머 (음극 조련사)가 아니잖아요?"


"뭐- 무슨 테이머?"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의 등장에, 아이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젠장, 코시로 형이 있었어야 했는데. 타케루가 저 단어에 대해 설명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믿는 코시로의 존재를 그리워하고 있는 동안, 다이스케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켄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켄은 손을 들어 다이스케를 저지했다- 아직도 모니터에 시선이 고정되어 있는 채로.


"료 상을 어떻게 만났는지 혹시 기억해요?"

"어? ... 글쎄... 이상하네. 그 부분이 기억나질 않아."


금발의 아이는 고개를 옆으로 꺾고는, 꼴똘히 생각하다가 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켄은 포기할 생각이 없는 듯, 속사포처럼 다음 질문을 던졌다.


"그럼 어떻게 자신의 디지몬 파트너와 만났는지는요?"


"에.. 그게, 이렇게 말하면 웃기지만 말야, 모니터에서 갑자기 튀어나왔는걸."


워레스가 얼굴에 호선을 그리며 말했지만, 켄은 웃기는 커녕 눈 한번 깜빡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알아차린 듯, 켄은 워레스에게 질문을 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럼 D-1 그랑프리는- 사성수는요?"


"그랑프리? 그랑- 아, 그래, 맞아. 그때 료랑 겨뤘었지. 다른 테이머들도 거기 있었고 말야. 흠, 생각해보니까, 료에 대해서 내가 기억하는게 그거밖에 없는걸... 아참, 그러고 보니 타케루, 네 형도 거기 있었는데. 이름이 뭐였더라- 야마토였나?"


형의 언급에 고개를 휙 돌린 타케루는, 모니터를 바라보며 형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형이 워레스를 이미 한번 만났었단 말인가? 하지만 왜 이 얘기를 하지 않았지? 왜 워레스를 처음 보는 척 한거지? 그 이후에 간 것이라면, 왜 난 알지 못했던 거지? 수많은 질문이 입 안에서 소용돌이쳤지만, 그런 타케루를 뒤로하고 계속 말을 이어간 것은 켄이었다.


"뭔가 말이 안돼도 크게 안된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워레스 군?"


"그게 무슨 소리야?"


"어느 순간 디지바이스가 나타난 것도 아니고, 특별한 이유도 없이 파트너 디지몬이 둘. 하지만 어노드 카소드에 대해선 아는 것 하나 없고, 료 상을 만났지만 기억하는 건 그랑프리 뿐. 무언가 잘려나갔다는 생각이 들지 않냐구요, 워레스 군."


아이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켄과 워레스를 번갈아 쳐다봤지만,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건 워레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봐 켄, 료를 알고 있는 사람을 만난 거까진 좋은데 말야, 도대체 무슨 소리를-"


"밀레니엄몬."


켄의 나즈막한 한마디에, 워레스는 말을 멈추었다. 그의 얼굴에 퍼져있던 연민의 미소는 한순간에 싹 사라져 버렸고,마른 침을 삼키는 워레스의 피부는 핏기가 가셔, 원래보다 더 하얗게 보일 지경이었다.


"우리의 기억엔 구멍이 있어요... 마치 누군가 가위로 잘라낸 것마냥."


워레스는 당황한 표정으로, 머리를 감싸고 있었다- 마치 깊이 묻어두었던, 기억해선 안되는 무언가를 억지로 끄집어 내기라도 한 듯.


식은땀을 닦은 켄은, 설명을 요구하는 아이들의 무언의 눈빛을 무시하고, 워레스에게 마지막 한마디를 건넸다.


"료 상을 찾아야 해요. 지금 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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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케히카 - 크리스마스

2015년 11월 12일


"으아아, 늦겠는데-"


벌써부터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어느 겨울 저녁, 눈이 발목까지 쌓인 추위에도 불구하고 녹색 교복 위에 얇은 자켓 하나만을 걸친 금발 아이 하나가, 급하게 포장한 듯한 선물 하나를 들고 미끄러지듯이 집에서부터 뛰쳐나왔다.


자신의 형을 위한 크리스마스 선물로 무엇을 사야할 지 고민하고 있던 참에, 똑같이 타이치 형의 선물을 고민하고 있던 소꿉친구 히카리가 같이 선물을 사러 갈 것을 제안하자 흔쾌히 이를 승낙했던 타케루였지만, 몰래 히카리를 위한 선물을 준비하다 그만 포장에 정신이 팔려 시간을 망각해버리고는, 약속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이제서야 허겁지겁 포장지를 붙이고 달려나온 것이었다.


"헉- 히카리- 헉- 쨩- 헉- 늦진 않았-"


장갑과 모자를 쓰고 공원 벤치에 조용히 앉아있던 히카리는, 숨을 몰아쉬며 자신의 이름을 간신히 내뱉는 타케루를 보며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타케루 군도 정말, 여기까지 뛰어온거야? 괜찮아, 나도 이제 도착했는걸."


타케루는 숨을 고르며 띄엄띄염 변명 비슷한 무언가를 말했지만, 히카리의 시선은 이미 타케루의 손에 들려있는 빨간 포장지의 무언가에 가 있었다.


"히카리 쨩-"


"이럴 줄 알았다니까." 


고개를 저은 히카리는, 멍하니 서있는 타케루를 향해 미소를 잃지 않은 채로 비슷한 크기의 상자를 건넸다. 더 꼼꼼하게 그리고 예쁘게 포장되어 있는 이 상자에는, To. 타카이시 타케루 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거 설마-"


"서로 크리스마스에는 선물 주지 않기로 했으면서, 이번 해에도 결국 또 교환하게 생겼네."


그제서야 히카리의 웃음의 의미를 알아차린 타케루는, 멋쩍은 듯 같이 웃으며 그녀의 선물을 받고는, 히카리에게 어설프게 포장된 그의 선물을 부끄럽게 건네주었다. 


"지금 풀어봐도 돼, 히카리 쨩."


히카리가 만연한 미소를 띄고 자신의 선물을 내려다보고 있자, 타케루가 부끄러운 듯 고개를 돌리며 얼버무렸고, 그러자 히카리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타케루 군이 내 것도 지금 열어본다면." 이라고 말했다.


"그럼, 동시에 같이 열어보는거다?"


"하나, 둘, 셋-"


포장지를 풀어헤친 타케루의 눈 앞에 보인 것은 보라색의 조그만 상자였다. 상자 안에는, 타케루의 금발처럼, 그의 문장처럼 환하게 빛나는 노란색의 비니가 들어있었다. 히카리 또한 같이 포장지를 풀었고, 거기엔 곱게 접혀져 있는 분홍색의 머플러가 있었다.


"타케루 군, 비니 잘 어울려. 모자를 그렇게도 좋아하면서, 비니를 써본 건 본 적이 없는 거 같아서." 


히카리의 선물을 냉큼 머리에 썼던 타케루는, 붉어진 얼굴로 머리를 긁었다. 하지만 곧이어 부끄러움이 미소로 바뀐 타케루는 히카리가 들고 있던 머플러를 손수 그녀의 목에 둘러주고는, "히카리 쨩도 분홍색 머플러 하니까 정말 눈부시게 예쁜걸." 이라고 맞받아쳤고- 이제 히카리가 얼굴이 붉어질 차례였다.


"그나저나, 이 비니 정말 따뜻하네- 진짜 고마워-!"


머리를 만지작거리는 타케루를 본 히카리는, 곧이어 상자를 내려놓고 일어나서는 타케루가 둘러준 목도리를 반쯤 풀어 그에게도 둘러주었다. 갑자기 목도리 하나를 같이 쓰게 된 것에 타케루는 당황한 눈치였지만, 히카리는 오히려 뾰루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당연히 따뜻하지, 이 바보. 얼마나 급하게 나왔으면 교복 위에 자켓만 걸치고 나온거야?"


그러고는, 히카리는 자신의 왼쪽 장갑을 빼 타케루에게 건넸다. 


"에- 괜찮아, 히카리 쨩, 안 그래도 되니까-"


하지만 그녀는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의 왼손에 장갑을 억지로 끼워준 히카리는, 이제 겨울 날씨에 고스란히 노출된 그녀의 왼손으로 이미 칼바람같은 추위에 얼음장처럼 변해버린 타케루의 오른손을 꽉 잡았다.


"그럼 갈까? 곧 해가 지겠어. 빨리 가자!"


"어- 응..."


자신의 손을 잡고 자신을 이끄는 여자 아이의 뒤를 멍하니 바라보던 타케루는 곧 얼굴에 호선을 그리며 그녀를 따랐고, 그렇게 그 둘은 쇼핑몰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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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코시 - 선물

연성/단편 2015. 11. 29. 11:40

타이코시 - 선물

2015년 11월 11일


"아~ 좋겠다~ 누군 애인한테 선물도 받고~"


자켓을 여미고 목도리를 둘러도 취위때문에 저절로 입김을 내뿜게 되는 한겨울 저녁, 눈이 소복히 쌓인 길거리를 코시로와 함께 걸어가던 타이치가 우연찮게 선물을 교환하는 소라와 야마토를 발견하고는 들으라는 듯이 말했다.


순간 얼굴이 붉어져 다른 길로 도망치듯 사라진 두 남녀를 뒤로 하고, 코시로가 쏘아붙이듯이 말했다.


"소라 상한테도 이미 선물을 받아놓고는, 파렴치하게 뭐라는 거에요?"


푸핫- 하고 웃으며 코시로의 어깨를 끌어잡은 타이치는, 얼굴에 아직도 호선을 그린채로 하늘에 손을 뻗으며 말했다. 


"에이, 코시로, 친구한테 받는 선물하고 사랑하는 사람한테 받는 선물은 다른 거라구?"


타이치는 코시로가 어이 없다는 표정인지 부끄러운 표정인지 알 수 없는 이상한 표정을 지은 것을 본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곧이어 고개를 저으며 다른 화제로 말을 돌리는 코시로는 다시 원래의 뚱한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그러고 보니까요, 타이치 상..."


옆으로 멘 가방을 뒤적거리던 코시로는, 가방 가장 깊숙한 곳에서 티켓 두 장을 꺼냈다.


"어? 뭐야? 네 선물이야? 누구 주게? 여자라도 생긴거냐? 미미? 설마 히카리는 아니겠지?"


목표감을 찾기라도 한 듯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를 지으며 속사포로 질문을 해대는 타이치 덕에 얼굴이 빨개질 대로 빨개진 코시로는, 결국 타이치에게 소리를 질렀다.


"아 쫌!"


하지만, 크하핫- 하고 배꼽을 잡던 타이치가 예상 못했던 것은, 자신의 머리만큼이나 새빨개진 얼굴을 목도리 뒤로 숨긴 코시로가 티켓을 자신에게 내밀었다는 사실이었다.


"... 이번에 첼시가 친선 경기를 하러 일본으로 온다고 노래를 불렀었잖아요."


"어- 그-"


"같이 보러 가요, 타이치 상."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코시로가 내밀은 티켓을 붙잡은 타이치의 얼굴도, 발갛게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눈부실 듯한 하얀 눈으로 둘러쌓인 가로등 아래에, 그 둘은 그렇게 말 없이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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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저켄 - 악몽

연성/단편 2015. 11. 15. 14:51

카이저켄 - 악몽

2015년 11월 7일


어쩌면,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한 게 잘못이었을까.


눈을 떴을 때, 이치죠우지 켄은 잠옷 차림으로 다시 그 곳에 있었다. 맨발에 느껴지는 이 생기 하나 없는 모래와 털을 곤두세우는 이 바람의 촉감은- 눈을 뜨지 않아도, 절대 잊어버릴 수 없는 기억이었다.


곧이어, 짭짤한 바닷 내음이 두 눈을 꼭 감고 주먹을 쥔 켄의 코를 간지럽혔다. 하지만 그가 친구들과 함께 현실 세계에서, 디지털 세계에서 느끼던 바다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향기- 공포가, 절망이, 죽음이- 그의 뺨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이 곳은 정확히 무엇일까 라는 생각에 다다른 켄은, 과거의 모든 신화들이 얘기하던,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망자들의 강을 떠올렸다. 그렇다면 여기는 그 곳의 일부인걸까? 스틱스 강? 요르단 강? 


어느 쪽이든, 확실한 건-


"코퀴토스가 더 어울릴 거 같지 않아?"


익숙한 목소리에 켄은 감고 있던 두 눈을 뜨고 허둥지둥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목소리의 주인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과거가 비추어져 보이는 시름의 강. 그만큼 완벽한 이름도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럴리가 없어.

고개를 세차게 저은 켄은 이 곳을 떠나려 했지만, 행복한 것을 떠오르려 했지만-

그의 손에는 이미 그의 과거를 대변하는 차가운 채찍이 쥐어져 있었다.


"카이저님..."


그의 등 뒤에서 겁에 질린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켄은 차마 돌아볼 수 없었다. 지금 와서 돌아본다면, 그의 치욕을, 그의 수치스런 과거를 다시 맞이해야 하는데- 


켄에게는 그럴 자신도, 용기도 없었으니까.


"카이저님... 카이저님..."


목소리는 점점 더 커졌고, 그 수도 점점 더 많아지고 있었다. 요동치는 죽음의 바다를 스피커 삼아 메아리치는 그들의 부름은, 아무리 귀를 틀어막아도 켄을 집요하게 파고들기만 할 뿐이었다.


"그만!!! 그만해!!!!"


더 이상 참을 수 없던 켄이 돌아보며 외쳤지만, 그 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한 줌 재와 같은 모래와 그가 내던져버린 채찍만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을 뿐.


"왜? 왜 그렇게 거부하는건데?"


또 다시 들려오는 목소리에 켄은 다시금 고개를 세차게 돌렸고, 거기엔 그가- 

그가 서 있었다.


"아무리 도망치려 해봤자 소용 없어. 아무리 잊어보려 해봤자 소용 없다구."


디지털 문자가 새겨져 있는 선글라스를 조용히 치켜올린 그 남자는, 가시처럼 솟은 머리를 쓸어넘기며 웃었다.


"느껴져, 이 추위가? 이 오한이?"


얼어붙어 있는 켄에게, 이 남자는 망토를 펄럭이며 다가왔다. 자신의 얼굴 앞까지 다가왔을때에야 켄은 뒷걸음질을 쳤지만, 남자는 그런 켄의 손목을 휘어잡고는 차가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너를 증오하는 모든 이들의 한이 너를 짓누르고 있어. 그들의 분노가, 그들의 증오가 느껴져? 느껴지냐구?"


섬뜩할 정도로 부자연스런 미소를 띄고 있던 남자는- 디지몬 카이저는- 아니, 과거의 켄 그 자신은- 켄을 꽉 끌어안고는, 발버둥치는 켄의 귀 옆에서 속삭였다. 그 섬찟한 미소를 계속 지은 채로.


"너에게 미래란 없어. 빛에 다가갈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다니, 안일하기도 하지. 애써 속죄라는 사탕발린 말 따위로 날 덮을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어?"


"그만.. 아냐... 난.. 친구들이.."


옴짝달싹 못하게 된 켄이 중얼거렸지만, 카이저의 미소는 점점 더 커지기만 할 뿐이었다. 


"친구라고? 그 뭐 하나 구별할 수 없는 고글 멍청이 말이야? 아니면 네 얼굴만 보고 널 쫓아오는 여자아이? 너에겐 관심조차 없는 빛의 소유자? 아, 나머지 두 명은 아직도 널 껄끄러워 하지? 그리고 너도 그걸 잘 알고 있잖아?"


"아니야... 아니라고... 너 따위..!"


하지만 그의 입에서 새어나오는 말과 달리, 켄의 반항은 계속 잦아들고 있었다.


"너 따위? 하하, 뭘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치죠우지. 난 너야. 너 그 자신이라고. 나는 그저 네 그림자에 불과해. 네가 도망가려고 하고 있는 그림자. 하지만 네가 어디로 도망치든, 그림자는 늘 네 곁에 있지. 나 없인 넌 살 수 없어."


말이 끝남과 동시에 꽉 껴안고 있던 켄을 놔준 카이저는, 곧이어 그를 물가로 밀쳐내고는, 무릎 꿇은 켄의 머리채를 잡고 그의 앞으로 파도치는 바닷물을 바라보게 했다- 그리고 그 바닷물에 비친 건, 머리채를 잡혀 있는 켄도, 그를 거칠게 누르고 있는 카이저도 아니었다.


그저, 홀로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디지몬 카이저와, 그를 바라보는 수많은 붉은 눈동자들.


켄은 움직일 수 없었다. 카이저는 더 이상 그를 누르고 있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그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카이저는 켄 그 자신이자 그 자체니까.


"아니야... 아니야!!!"


자신을 죽일듯이 노려보는 셀 수 없는 눈동자를 뒤로하고, 카이저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소리쳤지만, 그의 울분 가득한 목소리는 누구에도 닿지 못하고 힘없이 메아리칠 뿐이었다.



***



"켄 쨩.. 무슨 일이야? 괜찮아?"


"어.. 어?"


켄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온몸이 땀에 젖어 힘껏 몸부림치는 그를 보고 걱정되어 달려온 웜몬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 응, 아무것도 아니야, 웜몬. 걱정시켜서 미안해. 그냥 나쁜 꿈을 꿨을 뿐이야."


걱정스런 표정을 하고 있는 웜몬을 쓰다듬으며 몸을 일으킨 켄은, 그저 자신이 악몽을 꾸었다고 생각하려 애썼지만, 그 모든 것은 너무 생생했다. 어쩌면 그는 정말로 그가 가장 무방비한 시간- 수면을 취하는 바로 그 시간에- 어둠의 바다로 끌려갔던 것일지도 몰랐다.


'혹시 모르니 타케루 군이랑 히카리 쨩한테 물어보는 것이..'


켄은 알지 못했지만, 그가 무의식적으로 어루만지던 그의 목 뒷덜미는, 불안한 검붉은색으로 은은히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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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타케 - Lather, Rinse, Repeat

2015년 5월 3일


이야기를 읽기 전에:

이 단편은 애니코믹스 판 디지몬 어드벤처 02에서 타케루와 다이스케가 처음 만나는 장면에, 타케루가 "전에 쓰고 있던 고글은 어디가고, 그런 이상한 걸 차고 있는거야?" 라는 소리를 한 것에서부터 착안한 타임루프물입니다. (사진: http://i.imgur.com/03HRBwl.jpg)



***



익숙한 풍경.


“잘 먹었습니다—“


똑같은 일상.


“미안하구나 타케루, 내가—“


이미 셀 수도 없이 많이 겪은 대화들.


“아니에요.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나를 걱정스런 눈으로 돌아보는 어머니의 눈빛마저도, 이제는 싸늘하게만 느껴진다. 


더 이상 일말의 감정도, 일말의 후회도 느껴지지 않는다. 지금 이 상황은, 중요치 않음을 안다.


가방을 메고 현관문을 나선다. 산뜻하게 불어오는 봄바람.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문다.


평화로운 세상이 내 눈 앞에 펼쳐진다. 다른 세계에 온 것 같은 착각— 아니, 어쩌면, 다른 세계일지도.


더 이상 원래 세계가 어떤지조차 기억할 수 없다. 모든 것이 일말의 파편으로만 남아있다. 산산조각난 거울을 통해 내 얼굴을 들여다보려 해봤자, 흐릿한 단편의 조각만이 나를 돌아볼 뿐.


뚜벅, 뚜벅. 


복도 끝에서 나를 일층으로 데려다 줄 엘레베이터를 기다린다.


문이 열리고, 조그마한 소년 하나와 분홍색 머리의 여자아이가 나를 반긴다. 바로 앞에 있음에도 그들의 목소리는 내게 들리지 않는다. 마치 휘몰아치는 폭풍우 같은 내 마음 속에서, 하염없이 비를 맞으며 그만 포기하라고, 돌아가라고 악이 받치도록 소리를 지르는 이성의 마지막 끈처럼.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 이미 수십번도, 아니, 수백번도 넘게 해본 대화. 억지 웃음을 지으며 내 대사를 읊는다. 거세게 몰아치는 폭풍의 노호 속에 내 목소리도 묻힌 듯 들리지 않았지만, 그들이 나를 보며 웃는다— 적어도, 실수는 하지 않은 것 같군.


엘레베이터를 타고 모자를 푹 눌러쓴다. 깊은 한숨이 내 목구멍을 간지럽히며 타고 올라온다.


내 이름은 타카이시 타케루. 오늘도 난, 초등학생이라는 명목 하에 내 옛 추억을 되짚는다.



***



모든 것은 다이스케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난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아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직 고등학생인데. 아직 해야할 일이 많은데, 아직, 아직—


하루하루를 고통 속에 살아갔다. 죄책감 속에 살아갔다.


내 잘못이 아니라고,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고 사람들은 얘기했지만, 그들이 뭘 안단 말인가. 내 앞에서 그가 죽는 것을 직접 본 내 기분을, 그들이 어찌 감히 상상조차 할수 있긴 할까?


내가 소중한 존재를 잃어버린 것이, 처음이 아니니까, 더 의연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거야? 내가 결국 웃으며 쓰라린 기억을 짚고 다시 일어설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냔 말이야?


나에 대해서 무엇을 안다고...


그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내 자신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난 가면을 썼다. 


웃음이라는 가면. 사람들에게서 내 진정한 마음을 숨길 수 있는 가면. 오직 그만이— 나에게서 벗겨낼 수 있었던 그 가면을, 또다시. 두 겹, 세 겹으로.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내 가면은 나의 일부가 되었다. 떨어질 수 없는 접착제로 붙여놓은 듯, 그 누구에게도 더 이상 내 진심을 보여주지 않았다. 가끔은 무엇이 내 진심인지 헷갈릴 때도 있었지만, 그의 부서진 고글을 내 손에 쥐는 하루하루가 나에게 그 날의 쓰라린 기억을, 그리고 내 진심을 다시 깨닫게 해 주었다.


그들이 뭐라고 하든 상관 없었다. 난 그를 되찾을 방법을 찾을 것이었다. 설령 그러기 위해 그 때의 그 지옥같은 기억을 매일 다시 떠올려야 한다손 쳐도.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 했던가.



***



내가 처음으로 다시 웃었던 것은 코시로 형이 몇십 년도 더 지나,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기계를 마침내 만들었다고 했을 때였다. 우리가 처음 모험을 할 적, 디지털 세계의 시간이 현실 세계와 다르게 돌아갔다는 점에서 착안해, 겐나이 상의 도움으로 디지털 세계를 통해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고 그는 우리에게 얘기했지만, 그 기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알 바 아니었다.


돌아갈 수 있어.


다이스케 군을 살릴 수 있어.


딱히 코시로 형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거나 동의를 구할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그들이 내 의견을 들어줄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기에. 


코시로 형은 타임머신을 보여줄 적 과거를 바꾸는 행동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아예 통째로 근간부터 흔들어 놓을 것이라고 경고했었지만, 새벽에 연구실 안에 잠입해 떨리는 손으로 어쩌면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는 과거의 여행을 시작하려는 나에겐, 그의 경고 따위는 머릿속에서 내 진정한 웃음처럼 희미하게 사라져 버린지 오래였다.


다만 그도, 나도 알지 못했던 것은, 과거로 돌아간다는 것이, 과거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을 역사를 공부하듯이 훑는것이 아닌, 내 자신이 그 시대로 돌아가버린다는 것이었을까.


나는, 다시 10살이 되어있었다. 


어머니는, 오늘이 내가 처음으로 오다이바 초등학교로 다시 입학하는 날이라 나를 흔들어 깨웠고, 난 그제서야 내가 여태까지 겪어왔던 모든 것을 모두 다 다시 겪을 것임을 깨달았다.


그럼에도, 다이스케를 만날 수 있다는 것에, 희망을 가졌다.


처음에는.



***



내게 선명하게 남아있는 우리의 두번째 모험을 모두 다시 겪고, 중학생이, 그리고 고등학생이 되어 다시 그 운명의 날을 맞이했지만—


나는 그를 구할 수 없었다.


왜?


어째서?


내가 너를 구할 방법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는데, 어째서 난 너를 구하지 못한거지?


넌 왜 나에게서 계속 멀어지기만 하는거야?


왜?


돌아와.


돌아오란 말이야...


그 때의 충격은 처음보다 더 심했다. 그를 또다시 잃었다고 생각하니 더 이상 가면도 소용이 없었다. 무너져 내리는 둑처럼, 절망이, 공포가, 파도처럼 나를 덮쳤다.


그래서 나는 다시 시도했다.


타임머신을 타고, 다시 우리가 처음 만난 그 날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나는 또다시 실패했다.


자책.

재시도.

실패.


자책, 재시도, 실패. 자책, 재시도, 실패—


나는 시간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코시로 형의 기계로,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영원한 시간의 아지랑이 속에, 끊임없이 돌아가는 시계바늘 속에 손발이 묶여 인형처럼 다스려지고 있는 것은 나였다. 


째깍째깍대는 시곗소리에 트라우마가 생겼다. 처음 내가 기억하는 우리의 모험과 다른 일도 많이 겪었고, 코시로 형의 경고에 맞게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타임머신은 늘 개발되었고, 나는 늘 돌아갔다.


내 정신이 피폐해지고, 나를 비웃는 시계추가 나를 부숴놓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내 대사 하나하나를 모두 기억할 수 있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늘...


돌아갔다.



***



처음으로 그를 만나는 순간이 매정하게도 또다시 나를 찾아왔다.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 차라리 이 때 그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가 용기와 우정을 이어받는 아이가 아니었더라면 같은 생각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몰랐지만, 그를 만나면 그 모든 것이 사라지곤 했다. 


그리고 난 그런 내가 미웠다—


내 자신을 갉아먹고 있음을 앎에도, 다시 돌아올 수 밖에 없는 나를, 그가 행복할 수 있도록, 우리가 행복할 수 있도록, 그를 처음 본 것처럼 행동해야 하는 나를.


끔찍하게도 증오했다.


툭.


내 앞으로 축구공이 굴러온다.


“여어, 축구공 좀 던져줄래—“


천천히 몸을 숙여 축구공을 집어든다. 차마 앞을 바라볼 자신이 없다. 목이 뻣뻣하게 굳는다. 이 모자로 가려진 시야 앞에, 그가 서있다.


“이봐—“


그의 목소리에 마른 침을 삼키며 고개를 든다. 붉은 머리. 진한 갈색 눈동자. 네모난 고글.


네모난 고글?


아아, 그래. 그랬다. 그는 타이치 형을 동경해서 고글을 쓰고 다녔었다. 우리의 첫 모험에서 브이몬을 만나고, 그에게 동그란 고글을 물려받기 전까지, 그는 저 고글을 썼었다.


“야, 거기, 축구공 줄거야, 말거야?”


그의 짜증나 하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 다시 그를 쳐다본다. 그에게 삐걱거리는 미소를 지어보이고 축구공을 던진다. 이제 내가 해야할 대사를 읊어야 할 차례.


말문이 막힌다.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내가 정작 해야할 말은 내 목구멍에서 나오질 않는다. 감정이 메말랐다고 생각했지만, 이 순간만 되면 모든 것이 터져나올 것만 같았다.


이상하게 나를 쳐다보는 그의 고글에 다시 시선이 쏠린다. 안 어울리는 네모난 고글.


“전에 쓰고 있던 고글은 어디 가고, 그런 이상한 걸 차고 있는거야?”


내 입에서 내 진심이 흘러나온다. 늘 그랬듯이, 그는 존재만으로 내 가면을 벗겨버리고 있었다. 


더욱 더 나를 이상하게 바라보는 그를 마주할 자신이 없다. 분명 미친놈이라고 생각하겠지. 오늘 처음 만났는데, 전에 쓰고 있는 고글이라니. 온 몸이 떨린다, 그가 뭐라고 중얼거린 것 같았지만, 그를 쳐다볼 수도, 그의 목소리를 감히 들을 수도 없다. 


그가 내 이름을 부른 것 같지만, 날 본 적도 없는 녀석이 내 이름을 알리가 없다. 이젠 환청까지 들리는 걸까.


닭똥같이 떨어지는 눈물을 닦으려 하지도 않고, 그를 지나쳐 간다. 


숨을 쉴 수조차 없다.


누가 제발 이 고리를 끊어줘.


이런 생각을 매일 하면서도, 결국 그를 보며 웃고, 그와 대화하고, 그를 구하기 위해 다시 이 세계로 돌아오는 내가...


참 밉다.



***



익숙한 풍경.


똑같은 일상.


이미 셀 수도 없이 많이 겪은 대화들.


오늘도 나는 같은 대사를 읊으며 학교로 나선다. 한숨을 쉬고, 입술을 깨물며 공을 찬다.


이번에도 나는 또 과거로 돌아왔다. 가끔은 그가 밉다. 하지만 그를 보고 있으면 그런 마음이 눈 녹듯 사라져 버린다. 후회하면서도, 그를 저주하고 싶을 때가 있음에도, 모든 것이 그의 눈웃음에 산산조각나 버린다.


그것이 너무 고통스러워.


그러니까... 

그러니까 이제 제발.


...


이제 제발 날 놔줘.


너를 구한 것이 몇번째인지, 네가 내 몫까지 행복한 삶을 살길 바라며, 네가 죽는 것을 볼 바에 차라리 내 목숨을 댓가로 바쳐 널 구한 것이 몇번째인지— 너는 모른다.


난 네가 망가지는 것을 알고 있어.


그러니까 제발 그만.


내가 대신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날 줄 알았다. 하지만 너는 계속 돌아왔다.


운명은 가혹했다. 네가 없는 세상은 지옥같았고, 코시로 형이 만든 타임머신을 타고 난 돌아와 너를 구하기 위해 몇번이고 우리의 모험을 다시 겪었다. 하지만, 하지만— 너를 구할 순 없었다.

단 한가지 방법만을 빼고.


근데 너는 왜 계속 돌아오는거야?


이제는 내가 널 구하더라도 네가 계속 돌아올 것을 안다. 우리의 이야기가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절대 끝나지 않을 것임을 안다. 이야기가 돌고 돌아, 우리 둘 다 완전히 파멸할 때까지 네가 돌아올 것임을 나는 안다.


하지만 미안해.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네가 죽은 세상에서 살고싶진 않아.


이기적이라서 미안해.


그러니까, 이젠 제발 나를 놔주면 안될까—


타케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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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케히카 - 운명

연성/장편 2015. 11. 15. 05:27



타케히카 - 운명

2015년 4월 26일


어두컴컴한 하늘 너머, 반짝이는 별들이 하나같이 미소짓고 있는 어느 겨울밤— 지저귀는 새들마저 잠을 청하러 갔는지, 어둑어둑 땅거미가 지고 있는 공원은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단 하나, 홀로 등을 돌리고 앉아있는 여린 여자아이에게서 흘러나오는, 속삭이듯 조용한 울음소리만을 제외하고.


오늘은, 오늘은 모두에게 행복한 날이었는데. 왜 어째서? 


입술을 깨물고, 터져나오는 울음을 간신히 삼키고 있는 중학생 야가미 히카리가 자신에게 되물었다.



***



결승전. 


그랬다. 오늘은 그녀의 단짝친구 타카이시 타케루가 속한 농구부가, 다른 중학교와 결승전을 치루는 날. 이상할 것 하나 없는 하루였다. 당연하게도 선택받은 아이들이 모두 모여 그를 응원했고, 그녀 또한 그곳에 있었다. 공을 손에서 놓지 않고 코트를 종횡무진하며 팀을 승리로 이끄는 그를, 또 자신들을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드는 타케루를 보며, 히카리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시합이 오다이바 중학교 팀의 압승으로 끝난 후, 히카리는 그녀의 타케루의 모든 농구 시합에서 늘 그랬듯이, 수건과 물통을 집어들고, 타케루를 향해 뛰어내려가는 다른 아이들의 뒤를 따랐다.


“장하다 내 동생!”


“너 이 자식, 정말 타고났는걸!”


팀원들과 친구들에게 둘러쌓여 칭찬과 축하를 받고 있던 타케루에게, 어떤 여자아이가 다가온 것은 바로 그 때였다. 불쑥 나타난 그 아이에게, 자연스레 타케루의 땀을 닦아주려던 히카리를 포함해서,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히카리는 한눈에 그녀를 알아볼 수 있었다. 코토네— 그녀는 타케루와, 그리고 히카리와 같은 반이었다. 사교성 좋고, 인기 많고, 여러모로 다른 학생들의 동경을 받는 아이. 그녀도 타케루를 축하해주러 온 것이었을까—


“정말 멋졌어, 타케루 군! 축하해!”


코토네가 자연스레 물통과 수건을 타케루에게 건네며 말했다. 순간 멈칫한 듯한 타케루는 곧이어 환하게 웃으며 그녀의 호의를 받아들였고, 모두들 다시 왁자지껄 그를 축하하는 데 여념이 없어 보였다— 단 한 명, 야가미 히카리를 제외하고.


왜인지 히카리는 그 곳에 가만히 서 있었다. 무언가 자신의 역할을 빼앗긴 듯이. 하지만, 그래. 생각해 보면, 굳이 그녀가 늘 타케루를 챙겨주라는 법은 없었다. 그녀는 그의 가장 친한 친구였지만— 아니, 그게 다였다. 친구. 그의 어머니도, 그의 애인도 아닌, 그의 친구. 꼭 그녀만이 그를 챙겨줄 필요는 없지 않은가? 


어깨를 으쓱이며 이 상황을 무덤덤하게 넘기려는 히카리였지만, 마음 속에 무언가가 응어리져 있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정확히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가, 그녀를 답답케 하고 있었다.


‘내가 그저 늘 하던 일을 하지 않아서 그런 거겠지 뭐,’


그렇게 애써 생각하려는 히카리는, 누군가가 자신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려놓는 것을 알아차렸다. 내심 타케루의 손길을 기대한 히카리가 고개를 돌렸지만, 그 곳에는 익숙한 금발의 아이 대신 자신을 걱정스레 내려다보고 있는 그녀의 오빠, 야가미 타이치가 있었다.


“괜찮니, 히카리? 거기 멍하니 서서 뭐하는거야?”


“아, 아무것도 아니야, 오빠. 잠깐 딴 생각좀 하고 있었어. 근데, 타케루 군은?”


“씻는다고 들어갔지. 하여간에, 오늘 시합도 이긴 겸, 죠네 집에서 파티를 열기로 했는데-“


“에에?! 내가 언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죠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에이, 내 동생이 우승을 했는데, 그정도는 해줄 수 있지 않아, 죠!”


“아니, 그건 그거고!”


말도 안된다는 표정으로 반박하는 죠와, 그런 그에게 반 협박 및 반 설득을 하는 야마토를 바라보며 얼굴에 호선을 그린 타이치가, 윙크하며 히카리에게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타케루한테 무작정 얘기를 하긴 했지만 말야, 좀 데리고 와주지 않겠어?”


“알았어, 오빠.” 히카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리고, 그렇게 왁자지껄 떠드는 아이들과 죠와 어깨동무를 하며 야마토의 편을 들어주는 타이치를 뒤로 한 채, 히카리는 웃으며 체육관을 떠났다. 


마음 속에 진 응어리는 이미 잊어버린 채로.



***



히카리는, 양손에 음료수를 하나씩 쥐고 헐레벌떡 계단을 뛰어내려오고 있었다.


‘왜 하필이면 이럴 때 자판기가 고장이 난담. 타케루 군이 먼저 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계단 아래에서 노을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는 금발을 발견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곧이어 타케루의 이름을 부르려던 히카리는, 그가 그림자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저게 누구지?


그녀의 궁금증은, 그림자 속의 인물이 입을 염으로써 해결되었다. 


“오늘 시합 정말 대단했어. 다른 선수들이 쫓아오질 못하던 걸.”


코토네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왜인지 떨리고 있었다— 타케루가 뭐라고 대답을 했지만, 히카리는 코토네의 다음 말에 정신이 팔려, 그의 대답을 듣지 못했다.


“그래서 말인데, 있잖아, 타케루 군... 실은, 네가 이번 시합에서 승리하면, 고백하기로 마음 먹었었거든.”


“에—“


“나랑, 사귀어주지 않을래?”


계단 위에 서있던 히카리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가 무너져 내렸다. 그녀의 친구가 방금 고백을 받았는데— 그것도, 저렇게나 인기 많은 여자아이에게. 자리를 비켜주고, 그가 그녀와 사귀기로 결정한다면 그를 축하해주고, 응원해주는 것이 응당 친구로써의 도리가 아닌가? 하지만, 히카리는 그들을 바라볼 수 없었다. 코토네의 다음 말도, 타케루가 뭐라고 하는지도 들을 수 없었다. 마치 멀어져가는 과거의 기억처럼, 그들은 히카리에게서 점점 더 멀리 떠나가고 있는 것 같았다.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는. 디지털 세계보다 먼 저 어딘가로.


애초에, 설레는 순정만화 같은 연애 이야기는, 모든 여자아이가 좋아할 법한 소재가 아니었나? 그 대상이 자신의 친구라면, 더더욱. 하지만, 히카리는 자신의 절친한 친구라고 생각했던 타케루의 연애사를 바라보고 있자니, 재미보단 불안이— 파도처럼 그녀를 덮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왜?


왜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척, 푸른 눈이 잘 어울리는 저 금발의 아이를 부를 수 없는 것일까. 왜 그녀는 코토네와 타케루가 붙어있는 모습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은 것일까. 왜 그녀의 심장이, 누군가 쥐어짜는 것처럼 아픈 것일까.


어째서— 마치 세상의 사활이 걸린 것 마냥 초조함과 불안함이 그녀를 엄습하는 걸까?


차가운 느낌이 그녀를 뱀처럼 감싸올랐고, 알 수 없이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한 채, 히카리는 타케루와 코토네를 뒤로 하고 계단을 뛰어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발자국 소리를 타케루가 들은 것인지, 아니면 그저 코토네에게 대답을 하는 것이었는지는 몰랐지만, 타케루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하지만, 어느 쪽이었던, 마치 지금 바깥 풍경처럼— 겨울 바람 앞에 하늘하늘 떨어져 바스라지는 나뭇잎처럼— 타케루의 목소리는 히카리에게 닿지 못했다.





살을 에는듯한 매서운 바람이 부는 겨울밤, 검은 비니를 쓰고 목도리를 두르고 있는 남자아이 하나가 그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가로등 아래에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언질받은 대로 자신의 선배, 키도 죠의 집으로 찾아간 타카이시 타케루는, 자신의 둘도 없는 친구가 자신과 원래 같이 왔어야 했음을, 그리고 그녀가 그러지 않았음을— 즉, 어딘가로 사라졌음을 깨닫고, 그녀를 찾으러 학교를 샅샅이 뒤지다 뛰쳐나온 참이었다.


거친 숨을 내뱉으며 입술을 깨문 타케루는, 왜인지 코토네가 자신에게 고백할 때 얼핏 들었던 발소리가, 히카리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구심을 떨쳐낼 수 없었다.


어느 쪽이던, 히카리를 찾아야만 했다.



***



결승전.


오늘은 그의 농구부가 그렇게 고대해왔던 결승전이었다. 타케루가 오다이바 중학교에, 그리고 나아가 농구부에 입부한 이후로, 그들은 연전연승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 시합에서 승리함으로써, 무패의 전설에 쐐기를 박을 참이었다.


상대의 전략을 분석하고 끊임없이 연습한 만큼, 타케루와 그의 팀원들은 시합을 승리로 이끌었고, 타케루는 골을 넣을 때마다 그의 친구들을 향해 엄지를 치켜세우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그의 가장 친한 친구, 야가미 히카리를 향해서.


시합이 끝난 후, 이슬처럼 맺힌 땀을 닦아낸 타케루는, 자신을 향해 환호하는 친구들을 향해 다가갔다. 짧게 친 머리를 쓸어넘기는 형도, 성게같은 머리와 단발머리를 한 동갑내기 친구들도, 그리고 모험을 같이 하며 동고동락한 다른 선택받은 아이들도 그를 보며 축하해주고 있었지만, 그의 시선은 그의 단 한명만을 향하고 있었다.


자신을 향해 언제나같이 따스한 미소를 짓고 있는 히카리를 바라보고 있자니, 그 어떤 건강식보다 빠르게 시합의 고된 피로가 사라져가는 듯 했다. 그렇게 그녀에게 손을 뻗으려는 순간—


“정말 멋졌어, 타케루 군! 축하해!”


누군가가 그에게 다가오며 외쳤다. 순간 움찔한 타케루는 옆을 바라보았고, 같은 반의 코토네가 자신을 보며 싱긋 웃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잠시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던 타케루는, 곧이어 웃음으로 그녀에게 답하며 물통과 수건을 받아들였다.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닦고, 물로 메마른 목을 축였지만, 그의 심장은 무언가를 더 원하고 있었다. 익숙한 손길이, 익숙한 목소리가, 익숙한 미소가 필요했다. 


하지만 왜?


‘히카리 쨩이 늘 날 챙겨줬으니까, 그냥 익숙하지 않아서였을까.’ 타케루가 물을 마시며 곰곰히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그녀에게 무언가를 더 바라고 있었다. 친구로써의 친근함이 아닌 무언가를.


히카리 쨩은 나에게 정확히 뭐지?


하지만, 타케루가 자신의 물음에 답하기도 전에, 히카리의 오빠, 야가미 타이치가 말썽꾸러기 같은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기에, 타케루는 자신만의 망상에서 빠져나와야만 했다.


“있잖아 타케루, 너 우승 기념으로, 죠네 집에서 파티를 열려고 하는데.”


“네? 하지만 죠 상은 그런 말을—“


“쉿. 죠네 집에 그냥 쳐들어 갈거야. 다들 가 있을테니까, 씻고 정리하고 와, 알았지?”


“푸하, 네.”


터지려는 웃음을 애써 참으며 대답하는 타케루를 보며 미소지은 타이치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더니 곧이어 똑같은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를 지으며, 야마토에게로 다가갔다.


피식— 실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은 타케루는, 고개를 들어 히카리를 바라보았다. 자신에게 등을 돌리고 무언가에 집중하듯이 가만히 서 있는 그녀를 본 그는, 그녀에게 다가가 말을 걸어볼까 생각했지만, 곧이어 타이치가 그녀의 어깨를 잡는 것을 보고, 마음을 돌렸다.


다시 자신의 질문을 곰곰히 되짚어보며, 타케루는 샤워실로 향했다.


우리는 친구일까?


아니면 그 이상일까?



***



아직도 자신의 질문에 해답을 찾지 못한 타케루가, 머리를 긁적이며 가방을 들고 락커룸을 빠져나왔다. 밖이 춥다는 것도 잊어버렸는지, 외투도 제대로 걸치지 않은 그는, 죠의 집까지 걸어가며 혼자 생각할 시간도 가질 겸, 복도를 돌아 학교를 벗어나려고 했으나, 예상치 못한 사람과 마주치고 말았다.


“안녕, 타케루 군.”


“어, 어어, 코토네 쨩. 안녕.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어, 응.”


자신의 눈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는 코토네를 바라보며, 타케루는 그녀가 자신에게 무언가 할 말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곧이어, 그 할말이 무엇인지도.


“오늘 시합 정말 대단했어. 다른 선수들이 쫓아오질 못하던 걸.”


“아— 하하. 고마워. 아, 수건이랑 물도.”


타케루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생각은 다시 히카리를 향하고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어물쩡 말하는 코토네의 목소리가 그를 다시 수면 위로 끌어올렸고, 그는 다시 고개를 들어 그녀를 마주보았다.


“실은, 네가 이번 시합에서 승리하면, 고백하기로 마음 먹었었거든.”


“에—“


“나랑, 사귀어주지 않을래?”


타케루는 대답을 망설였다. 어찌보면 차가울 수도 있지만, 이미 그가 그녀의 의중을 알아차렸을 때부터,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코토네는 그의 친한 친구일 뿐이었다. 


하지만, 히카리는? 히카리는 과연 그의 그저 또다른 친한 친구일 뿐일까? 아니면 자신도 모르게 그녀와의 대화에, 그녀와의 접촉에 너무 익숙해져, 자신이 마음 속에서 키우고 있는 감정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게 아니라고, 그녀도 그저 친구일 뿐이라고 생각하려고 하고 있지만, 코토네가 자신에게 고백한 상황에서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히카리라면, 사랑을 논하려는 상황에서 가장 먼저 자신의 머릿속에 그려진 것이 히카리라면—


그렇게, 그의 머릿속은 이미 다른 종착점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무언가 해답이 보이는 듯하달까— 마치 그의 정신이 이 곳에서 빠져나와 다른 곳을 떠돌고 있는 느낌. 어둠 속에서 자신을 비추는 무한한 빛(光)에, 히카리(光)에 이끌려.


그 순간, 어디선가 들려온 우당탕 거리는 발자국 소리가 말없이 서있던 그의 환상을 깨뜨렸고, 그는 저도 모르게 “히카리?” 라고 조용히 혼잣말을 내뱉었다.


“타케루 군?”


“아— 아? 아... 미안, 코토네 쨩. 넌 좋은 친구지만, 난 널 그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아.”


타케루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고, 코토네는 씁쓸한 미소로 화답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네... 역시, 히카리 쨩 때문인거지?”


“엣—?”


하지만, 타케루가 차마 대답할 새도 없이, 그녀는 우승을 축하한다고, 대답해줘서 고맙다고, 그리고 내일 학교에서 보자는 말과 함께 복도를 돌아 그림자 너머로 사라져버렸다.


자신이 저도 모르게 몇 년 전부터 꾸준히 묻고 있던 질문에 대해 마침내 답을 얻은 타케루를 뒤로 하고.



***



조용한 밤. 어둠이 내려앉은 공원 한가운데에서, 타케루는 히카리를 마침내 찾아내고야 말았다. 이 추운 날, 외투 하나 제대로 껴입지 않고 벤치에 앉아 훌쩍이고 있는 그녀를.


아무 말 없이, 그는 자신의 외투를 벗었다. 천천히 다가가 그녀의 어깨에 자신의 옷을 덮어준 타케루는, 깜짝 놀라 자신을 돌아보는 히카리를 향해 멋쩍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어디 갔었어. 다들 한참 찾고 있었다구.”


“... 미안.”


히카리가 타케루의 질문에 대답하는 데에는 한참이 걸렸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추궁하지 않겠다는 듯, 타케루는 조용히 그녀 옆에 앉아 그녀의 어깨를 감싸주고 있을 뿐이었다.


“... 왜 울고 있었어?”


“아무것도 아니야...”


“그런데 왜 여기 혼자 있었던거야, 감기 걸리게.”


타케루가 왼손을 천천히 들어 그녀의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살포시 닦아주며 얘기했지만, 그녀는 아무 답이 없었다.


“... 실은, 코토네랑 있는 거 봤어.”


그 상태로 미동도 않고 몇 분이 지났을까. 딸꾹질 비슷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마침내 히카리가 입을 열었다.


‘그 때 내가 들었던 발자국 소리가 히카리가 맞았구나,’ 타케루가 생각했지만, 그가 코토네의 고백을 거절했다고 말하기도 전에, 히카리가 다시금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실은, 그 때 고백하는 걸 봤었어. 그런데— 그, 그런데— 왜인지 모르게, 나도 모르게 그만— 그만 도망쳐 버렸어. 나도— 나도 왜 이러는지, 내가— 왜 울고 있는지—“


벌벌 떨면서, 버벅대면서 말하는 히카리의 변명 아닌 변명은, 타케루의 손이 그녀의 어깨와 머리를 감싸안고 자신에게 끌어당겨 그녀를 꽉 안아줌으로써, 뚝 끊기고 말았다.


자신의 어깨에 말없이 울고 있는 히카리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던 그는, 조용히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고백, 거절했어.”


그의 품에 얼굴을 묻고 있던 히카리의 울음이 뚝 그쳤다.


그녀의 어깨를 조심스레 잡고 자신의 어깨에서 그녀를 떼어놓은 타케루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히카리의 마호가니 색 눈을 바라보았다. 붉은 빛이 감도는, 마치 보석같은 그녀의 눈동자. 사람을 끌어당기는 듯한 느낌의 눈동자— 마치, 마법에 홀려버린 듯, 그는 왼손을 들어 그녀의 젖은 뺨을 어루만지며, 히카리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히카리 또한, 바다처럼 넓은 타케루의 사파이어 빛의 두 눈동자에서 눈을 뗄 생각이 없어보였다. 자기도 모르게, 파르르 눈꺼풀을 감은 그녀는, 고개를 천천히 돌리며 그의 허리를 휘어잡았다.

그들은 늘 서로와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했지만, 지금은, 무언가 사뭇 달랐다.


점점 더 서로에게 다가가며, 희망의 문장의 소유자와 빛의 문장의 소유자는 서로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서로 연결된 듯한 느낌. 처음 모험을 하며 만났을 때에도, 두번째로 ‘선택’받아 또다시 디지털 세계를 구할 때에도 느꼈던 그 소름돋는 감정이— 둘을 고리처럼 휘감았다. 


시간마저도 그들의 입술이 닿는 순간을 숨죽여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캄캄한 공원 한가운데에서, 따뜻한 달빛에 흠뻑 젖은 두 아이는, 말 없이 영원같았던 그 순간을 음미했다.


헉— 하고 들이마쉬는 숨과 함께, 희망의 빛으로 이어진 입맞춤이 끝을 맺었을 때, 두 아이는 아무 서로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았으면서도 너무 순식간에 끝나버린 그 순간.


다시 서로를 향해 고개를 움직이는 그들은, 그 어떤 조명 없이도, 충분히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 순간만큼은,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그들을 방해할 수 없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운명이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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