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몬'에 해당되는 글 49건

  1. 2016.02.18 타케히카 - Falling For You by Doctor Box 4
  2. 2016.02.07 타케히카 - Lovemental Up! by Doctor Box
  3. 2016.01.20 히카미야 - 생머리 by Doctor Box
  4. 2016.01.19 켄미야 - 머리끈 by Doctor Box
  5. 2016.01.19 켄타케 - 바람 부는 날 by Doctor Box
  6. 2016.01.18 타이야마 - 담배 by Doctor Box
  7. 2016.01.16 디지몬 x 킹스맨 - Roundabout by Doctor Box
  8. 2016.01.15 이오켄 - Sleeping Beauty by Doctor Box
  9. 2016.01.14 다이이오 - 라면 by Doctor Box
  10. 2016.01.09 타이야마타이 - 온천 by Doctor Box



타케히카 - Falling For You
2016년 2월 18일


글을 시작하기 전에:

이 연성은 천사 타케루 x 인간 히카리 AU 삼부작의 첫번째 이야기입니다.

두번째 이야기 : Flying For Us

세번째 이야기 : Freeing For Me



***



"육품 능천사 (六品 能天使), 타카이시 타케루. 제 2 선봉대대의 부지휘관으로써 맡은 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하얗도록 눈부신 빛에 가려, 세 쌍의 날개 말고는 그 형체마저도 가늠할 수 없는 존재는 손으로 무언의 신호를 보냈다. 그 앞에 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금발의 남자는, 다시 화려한 무늬와 두 개의 별이 새겨져 있는 검은 제복모를 깊게 눌러썼다.


금빛으로 형형색색의 문양이 수놓아져 있는 거대한 문이 닫히고, 어깨와 팔등지에 숫자 6이 적혀있는 큰 별 문양이 달린 검은 제복을 입은 남자는 아무 말 없이 그 곳을 빠져나왔다. 풀려있던 단추를 조용히 잠구고, 소매를 만지작거리는 그의 손목에는, 금색 손목시계가 있었다. 하지만 그 시계에는 아무 숫자도 적혀있지 않았고, 그저 흔들리는 붉은 초침만이 어딘가를 불길하게 가리키고 있을 뿐이었다. 


"축하하네, 타카이시."


자신을 보며 싱긋 웃는 흑발의 남자에게, 그는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그의 제복은 타케루의 것과 비슷해 보였으나, 제복모에는 대대의 지휘관임을 암시하는 세 개의 작은 별이 추가로 매달려 있었다.


"감사합니다, 지휘관님."


"그럼, 전장에서 보지."


그 순간, 한 쌍의 하얀 날개가 지휘관의 등 뒤에서 솟아올랐고, 그는 빠른 속도로 날아올라, 구름 밑으로 사라졌다. 


타카이시 타케루는 조용하고 평화롭기 그지없는 이 궁전 아래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셀 수도 없는 시간이 흘렀어도 변하는 것은 없었다. 그는 이 모든 것이 지겨울 뿐이었지만, 천사들의 군대인 능천사로써 그가 해야할 일은 자명했다. 


곧이어 그의 등에서 펼쳐진 새하얀 날개.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는 금발을 가린 제복모를 더 푹 눌러쓰고, 붉은 넥타이를 고쳐맨 그는, 허리춤에 차고 있는 두 자루의 산탄총을 조심히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깊은 한숨과 함께, 그 또한 날아올라 구름 너머로- 그 영원의 전쟁터로- 향했다.



***



그곳은 지옥도, 천국도 아니었다. 


천공이 붉게 물들고 대지가 검게 타오르는 이 전쟁터에서, 그들은 영겁의 시간을 싸워왔다- 누가 먼저 싸움을 시작했는지, 왜 싸워야 하는지조차도 잊어버릴만큼. 하지만 하늘에선 날개를 단 천사들이 끊임없이 내려와 정의의 심판을 내렸고, 땅에선 뒤틀린 모습을 한 악마들이 계속해서 기어올라와 지상과 천상을 모두 불태우려 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 그가 있었다.


막 다림질한 듯 빳빳하던 제복도, 눈부실만큼 새하얗던 날개도 지금은 붉은색으로 얼룩져 있었다. 그의 지휘관이 뒤에서 지시를 내리는 동안, 타케루는 돌격대장처럼 악마들에게 가장 먼저 달려들곤 했다. 허리춤에 찬, 빛나는 자수가 놓여진 소드 오프 샷건 두 자루를 들고 전장을 누비는 그에게는 많은 별명이 붙었었다- 하지만 역시 그 중 단연 으뜸을 꼽자면, 붉은 눈의 타카이시.


가차없이 적들의 숨통을 끊어버리고, 빛과 같은 속도로 전장을 종횡무진하는 그에게 그런 별명이 붙은 것은 바로 다름아닌 그의 무자비함 때문이었으니. 자신보다 몇 배는 더 거대한 악마의 공격을 손쉽게 피하고, 그 무기를 잽싸게 타고 올라가 에어로빅을 하듯 매끈한 동작으로 적의 머리를 날려버리는 그의 눈에는, 연민도, 죄책감도, 희열도, 승리감도-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시원한 바다를 연상시키는 푸르른 두 눈동자를 가진 타케루였지만, 그의 죽은듯한 무표정한 눈길에 모든 악마들이 지레 겁을 먹었기에 그들은 그를 활활 타오르는 붉은 눈이라고 부르는 것이었으리랴.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시체의 산 위에 살포시 안착한 타케루는, 조용히 뺨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그런 그에게, 고통스런 목소리가 들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으어어..."


시선을 내려보니, 발 밑에는 고통스런 표정을 하고 있는 형체가 살려달라는 듯 손을 뻗고 있었다. 악마도 아니고, 그렇다고 천사도 아닌 존재.


인간.


대부분의 인간은 멸종한지 오래였다. 남아있는 존재들은 대부분 서로 치고박고 싸우다가 알아서 자멸하거나, 아니면 악마의 꾐에 넘어가 그들의 종으로 부려먹힐 뿐. 천상과 지옥의 싸움에서, 그들은 그저 소모품에 불과했다.


자신을 향해 알 수 없는 외침을 하는 인간을 파랗지만 붉게 타오르는 그 눈으로 내려다본 타케루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그녀를 발견했다.


이 전쟁에서, 악착같이 살아남은 한 명의 인간. 악마의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은 듯, 순수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는 그녀는, 붉은 대지 구석에 허름하게 지어진 집에 혼자 살고 있는 듯 했다. 다가오는 악마들을 위협하거나 가끔은 쏴죽이기까지 하며, 그렇게 어떻게든 살고 있는... 인간.


천사들의 규율에 따라, 악마의 꾀임에 쉽게 넘어갈 수 있는 인간은 발견하는 즉시 보고하거나 제거하는 것이 옳은 일이었지만, 그는 그녀를 지켜보기로 했다.


처음에는 호기심으로써... 그 다음에는 연민의 감정으로써.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녀의 수호천사로써.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그녀를 더 많이 지켜보게 되었고, 계속해서 알게 모르게 그녀를 도와주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자신은 악마도 천사도 믿지 않는다며 그를 쫓아내려 했지만, 환한 미소를 지은 그는 그저 그녀에게 계속해서 되도않는 말을 건네며 (악마랑은 다르게, 난 아무리 쏴도 맞출 수가 없다구, 인간?) 그녀 주위에서 시간을 때우곤 했다.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결국 그녀가 그에게 마음을 연 것은 어느날, 악마들을 처치하며 인간을 만나러 오는 타케루가, 집 밖에 서있는 그녀를 총을 들고 있는 악마들이 둘러싸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였다.


모든 것을 체념한 듯 눈을 감은 그녀, 그리고 방아쇠를 당기는 악마들.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녀를 향해 날아든 타케루는, 자신의 날개로 그녀를 감쌌다.


실로 오랫만에 느껴보는 고통. 마지막으로 자신의 날개가 다른 존재의 피가 아닌 자신의 피로 얼룩진게 얼마만일까? 하지만, 지금은 고통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며 놀란 표정을 한 그녀가 무사함을 확인한 그는, 짧게 그녀의 뺨을 쓰다듬고는,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까지 그녀를 바라보던 푸른 눈은, 다시 붉게 타오르고 있었고- 붉은 눈의 타카이시의 등장에 악마들은 줄행랑을 쳤지만, 그의 분노 앞에 그들은 곧 목숨을 내놓았다.


"괜찮아, 인간?"


"당신이야말로 괜찮아요? 그... 그 날개. 나 때문에-"


"걱정하지 마."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제서야 몰려오는 고통에 그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렸다. 그것을 알아차린 듯, 그녀는 그의 손을 잡아끌어 집 안으로 데려왔고, 자신이 직접 만든듯한 약초와 붕대를 꺼내들어 그를 치료해주었다.


"이렇게까지 안해줘도 되는데, 인간."


"히카리."


"뭐?"


"히카리. 내 이름이에요."


이해하지 못한 듯 자신을 쳐다보는 천사의 눈을 마주본 그녀는, 잊지 말라는 듯 또박또박 자신의 이름을 읊었다.


피식 웃은 타케루는, 다시 자신의 상처를 돌보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반가워. 나는 타카이시 타케루. 제 2 대대 부지휘관이다."


"이름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어요. 붉은 눈의 타카이시."


"그냥 타케루라고 불러줬으면 하는데."


다시 타케루와 눈을 마주친 히카리는, 그의 눈동자를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보이지 않는 그 붉은 눈. 어쩌면 그가 이런 자신의 진실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히카리 자신 앞에서 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녀의 생각은 곧 그의 질문에 잊혀져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히카리 쨩. 넌 여기서 혼자 사는거야?"


"네." 


"다른 사람은 없고? 친구라던지, 부모라던지."


"제 부모님은 이 싸움 속에서도 저를 낳고 악착같이 키워주셨지만, 제가 어른이 되기도 전에, 천사들을 만나 끌려가셨어요- 그 와중에도, 용케 저를 숨기시면서요. 그 이후로는 혼자 여기서 살고 있죠."


"거, 미안하구만."


"당신 탓은 아니니까요. 날 도와주기도 했고."


"음."


그 이후로 둘은 특별한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치료에 대해 감사의 표시를 전한 타케루는 다시 전쟁 속으로 발걸음을 내딛었고, 히카리는 흰 날개를 펄럭이며 사라지는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또 오라는, 따뜻한 말 한마디와 함께.



***



그들은 그렇게 점점 더 가까워졌고, 타케루가 히카리와 보내는 시간 또한 자연스레 늘어만 갔다. 가끔은 그녀의 일을 도와주기도 하고, 장난도 치면서, 타케루는 점점 더 삶의 의지를 되찾았다. 더 이상 붉은 눈의 타카이시는 없었다- 악마와의 싸움에서마저, 그의 눈에는 생기가 넘쳤다.


"자네, 요즘 눈에 띄게 활발해진 것 같은데."


"아, 그렇습니까, 지휘관 님."


"천하의 붉은 눈이 그런 미소를 띄고 있는 게 얼마나 큰 가십거리인지 자네는 모를게야."


"저에 대해서 그렇게 많은 얘기가 오고가는 줄은 몰랐는데요."


상관의 말을 웃어넘긴 타케루였지만, 정작 지휘관의 얼굴은 심각했다- 마치 구겨져 펴질 줄을 모르는 종이처럼.


"설마, 숨기고 있는게 있거나 하진 않겠지."


"예?"

"인간이라던지, 악마라던지. 그들과 교감 이상을 나누는 것은 천계의 법에 어긋나는 짓임을 잘 알텐데."


"... 설마 그럴리가 있겠습니까."


"역시 그렇겠지, 타카이시. 자네는 우리의 붉은 눈이니까."



***



쾅-


약초를 빻고 있던 히카리는, 집의 문이 거칠게 열리자 저도 모르게 총을 집었다. 하지만 눈부신 빛 앞에 익숙한 천사가 모습을 드러내자, 안심하고 총을 내려놓은 그녀는, 그를 향해 미소를 지어보였다.


"무슨 일이에요, 타케루?"


"널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겠어."


"그게 무슨 소리에요?"

"천사도, 악마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



히카리는 빛조차 잘 들어오지 않는 어딘가에 있었다. 축축하고 어두컴컴한 이 곳은 그녀가 살 곳이 못되었지만, 그녀는 그를 믿었다. 


"내가 어떻게든 너를 천상으로 데려갈테니까, 조금만 여기서 버텨줘."


그의 약속을 믿고, 히카리는 그곳에 머물렀다. 가끔씩 모습을 드러내며 자신을 사랑해주고, 또 먹을 것도 가져다주는 타케루를 하염없이 기다리며.


그 동안 타케루는 어떻게든 인간을 천계로 데려오기 위한 방법을 모색했다. 인간이란 본디 쉽게 악이 될 수 있지만, 동시에 선이 될 수도 있는 존재니까. 그리고, 히카리는 그가 본 그 어떤 천사보다도 선에 어울리는 그런 존재였다.


그리고 몇 달만에 마침내 고대 서적에서 찾아낸 천사가 된 인간의 이야기- 타케루는 그 책을 집어들고 행복한 표정으로 궁전을 나섰다. 모든 것이 잘 풀릴 것이라는, 히카리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채로.


지휘관이 그의 앞에 소름끼치는 미소를 지으며 나타난 것은 바로 그 때였다.



***



"인간이라고요?"


"그래. 우리쪽 천사 한 명이, 어느 조그마한 굴에서 나와 약초를 찾는 여자 인간을 보았다고 하더군. 악마에게 넘어가지 않은 순수한 인간은 정말 오랫만인 것 같아서, 내가 직접 가려고 했지."


히카리. 타케루는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그렇게 나오지 말라고 했는데도-


"직접 가신다니, 차라리 제가-"

"아, 그래, 자네도 따라오는게 어때? 착한 인간이라면, 천계로 데려올 수도 있지 않겠나?"


"그- 그렇다면야-"


"그래, 그래, 우리끼리 가 보자구."


상관에게 이끌려 지상으로 내려가는 타케루는 히카리에 대한 걱정과, 천계로 그녀를 데려올 수도 있다는 기대감이 섞인 채로, 하늘을 날았다. 그녀가 있는, 익숙한 동굴을 향해.



***



"나는 육품 능천사의 지휘관, 니시타니 신이치다. 인간이여, 모습을 드러내라."


뿜어져 나오는 빛, 낮게 깔리는 목소리. 그 장엄함에 조심스럽게 모습을 드러낸 히카리는, 불안에 휩싸여 있었다. 결국 자신의 부모님과 같이 알 수 없는 곳으로 끌려가는 것이 아닐까 했지만, 뒤에 서있는 타케루를 보고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실소를 지으며 권총을 꺼내든 신이치 지휘관은, 총구를 그녀에게 겨눴다.


"그럼, 천계의 법에 따라, 너를 말소하겠다. 잘 자라, 인간."


"이게 무슨 짓입니까, 지휘관 님!"

"본보기로 삼으려는 것 뿐이다, 타카이시. 네가 이 하등한 인간과 놀아나는 것을 모를 줄 알았나?"


그 말에, 지휘관을 말리려던 타케루의 손이 우뚝 멈춰섰다.


"인간에 대해 알아보고, 미소를 짓고, 그 붉은 눈이 행복하다는 듯 궁전 내를 쏘다니고... 내가 그렇게 바보로 보였나보지, 타카이시?"


대승을 거두기라도 한 듯, 뒤틀린 미소를 지은 그는 제복모 아래로 타케루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타케루는 그곳에 묵묵히 서있기만 할 뿐이었다. 이 모든 것은 결국 그의 탓이었다. 괜히 자신이 그녀를 안전하게 해주겠다고 했기에, 자신이 그녀에게 희망을 주었기에, 부주의했기에- 이제 그녀는-


하지만 타케루가 자신을 원망의 눈빛으로 바라볼 히카리의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으면서도, 마지막으로 한번 더 그녀를 보고 싶다는 생각에 얼굴을 들었을 때 본 것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지만 다 이해한다는 듯, 괜찮다는 듯 따뜻하게 웃고 있는 그녀였다.


"그럼, 마지막으로 할 말은, 인간?"


"... 타케루 군, 나-"


철컥.


히카리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타케루는 신이치 지휘관의 관자놀이에 산탄총을 겨눴다.


"그 총, 내려놓으시죠, 지휘관 님."


"인간 하나 때문에 이럴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총을 내려놓으라고 말했을텐데요, 니시타니."


"... 이게 무슨 뜻인지는 네가 더 잘 알겠지? 같은 천사에게 총을 겨눈다는 것?"


자신의 목숨이 달린 일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는 듯, 몸을 돌려 타케루를 바라본 신이치가 냉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는 타카이시 타케루가 자신을 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와 몇백년을 같이 싸워온 사람이 아니던가?


"... 우리 모두, 선택을 할 때가 오는 법이니까요."


"하. 악마와 계약을 했구나, 타카이시!"


"아니요."


조심스럽게, 하지만 재빠르게 방아쇠는 당겨졌고, 놀란 표정도 잠시, 니시타니 신이치의 제복은 피로 붉게 물들었다. 땅으로 힘없이 쓰러진 그의 시체와, 손에서 떨어진 권총을 바라본 타케루는, 히카리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자신 또한, 눈물을 흘리면서.


"... 인간과 사랑을, 했습니다."


뭐라고 입을 열려는 히카리에게 쉿- 이라고 말한 타케루는, 자신의 제복모를 그녀에게 푹 씌워주었다. 


"울지 마, 괜찮아."


"하지만- 나 때문에- 날개가!"


처음 통성명 할때도 그런 말을 들었었지. 얼굴에 호선을 그린 타케루의 한때 눈부시게 빛나던 날개는, 검게 타들어가며 떨어져 나갔다. 떨어져 나간 깃털들은 땅에 닿기도 전에 산화해버렸고, 흉측하게 부서지는 날개는 그의 흰자와 함께 짙은 검은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괜찮대도."


"타케루-"


"끝까지 살아남아야 해?"


울먹임 때문에 더 이상 말을 하기도 벅찬 듯, 히카리는 떨리는 숨만을 내뱉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그녀와 이마를 맞댄 타케루는, 마지막으로 미소를 지었다.


"내 눈을 기억해 줘, 히카리 쨩. 너 덕분에, 마침내 되찾을 수 있었던- 나의, 푸른 눈동자를."


그 말과 함께, 부서지는 대지는 타케루를 잡아 끌었고, 한없이 나락으로, 지옥으로 떨어지는 그는 마지막으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천천히 손을 흔들었다. 


잘 있어, 내 사랑.

'연성 > 장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23.5 - 한여름, 그대는.  (0) 2017.07.22
타케히카 - Lovemental Up!  (0) 2016.02.07
디지몬 x 킹스맨 - Roundabout  (0) 2016.01.16
다이켄카이저 - Psychosis  (0) 2015.12.30
타케히카 - The Persistence of Memory  (1) 2015.12.03
Posted by Doctor Box
l

타케히카 - Lovemental Up!

2016. 2. 7. 16:48 by Doctor Box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내용을 보시려면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

히카미야 - 생머리
2016년 1월 20일


"히카리-!"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본 야가미 히카리는, 자신과 같은 하늘색 마이를 입고 조금 더 어두운 다른 학교의 교복을 입고 있는 남자 아이의 팔짱을 끼고 있는 이노우에 미야코를 발견했다. 멋쩍은 듯 웃으며 히카리에게 인사하는 이치죠우지 켄에게도 고개를 끄덕이며 안부 인사를 건넨 히카리는, 미야코에게로 다가갔다.

"오랫만이에요, 미야코 상."

"고등학교 들어오고 나서 얼마만이야? 거의 몇 달은 됐는데, 잘 지냈어?"

여전히 커다란 안경을 치켜쓴 미야코가 웃으며 히카리를 껴안고는 말했다. 미소를 지어보이는 히카리의 시선은 곧이어 미야코의 긴 머리에 다다랐다. 부드럽게 길게 뻗은 연보랏빛 생머리- 그래, 그녀는 초등학교 때부터 완벽한 머리를 가지고 있었지.

"그러고 보니 히카리 쨩, 머리 길렀네?"

"아, 좀 다른 스타일을 도전해보려고요."

"훨씬 더 예쁘다야-!"

자신의 머리를 부드럽게 훑는 미야코의 손길에, 히카리는 그저 얼굴에 호선을 그리고만 있었다. 그저 스타일을 바꾸기 위해서 머리를 기른 것은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단발을 고수하던 그녀에게, 긴 머리는 여간 귀찮은 것이 아니었다.

"미야코 상, 늦겠어요-"

먼저 말한 것은 켄임에도 불구하고, 히카리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달려가는 미야코에게 끌려가다시피 하는 켄을 바라보는 히카리는, 미야코의 머리가 바람에 하늘하늘 휘날리는 것을 지켜봤다.

어깨 밑으로 내려오는 자신의 마호가니 색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들어올려본 히카리는, 그 자리에 서서 두 눈을 꼭 감았다.

"이렇게라도, 추억하고 싶었어요."


'연성 > 단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야마소라 - 꽃말  (0) 2016.04.06
다이켄 - 새벽  (0) 2016.02.21
켄미야 - 머리끈  (0) 2016.01.19
켄타케 - 바람 부는 날  (0) 2016.01.19
타이야마 - 담배  (0) 2016.01.18
Posted by Doctor Box
l

켄미야 - 머리끈
2016년 1월 19일


"아 글쎄, 이거면 껌뻑 넘어갈거라니깐-!"

백화점 진열대에 서서 팔짱을 끼고 눈을 질끈 감고 있는 보랏빛 머리의 아이 옆에 서있는 삐죽 솟은 붉은 머리의 남자아이가 그를 부추기듯이 말했다. 그 옆에서 모자를 고쳐쓰며 "다이스케 군- 이치죠우지 군이 알아서 결정하게 내버려두래도," 라고 금발의 아이가 말했지만, 다이스케는 켄이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것에 대해 진절머리가 난 것 같았다.

"하여간에, 맨날 여자애들이 쫓아다녀서 쉴 틈도 없으면서 이런건 정작 쑥맥이라니까?"

머리띠 하나를 들고 거의 40분동안 고민하고 있는 켄을 쳐다보며 머리를 절레절레 흔든 다이스케는, 그 옆에서 미소를 짓고 있는 타케루를 향해 물었다.

"타케루, 너도 인기 많잖아? 그 많은 여자애들을 꼬시는 방법이라도 켄한테 좀 알려줘봐."

"그건 타케루랑 켄이 엄청나게 잘생겨서 그런거지~"

말도 안된다는 표정을 지은 다이스케를 포함한 아이들 셋이 뒤를 돌아보자, 그 곳에는 윙크를 하며 켄에게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는 미미가 있었다. 옆에서 웃으며 그들에게 인사하는 소라를 뒤로 하고, 진열대에서 가장 반짝이는 머리끈을 하나 집은 미미는, 빛의 속도로 그것을 계산하고는 켄의 손에 쥐여주었다.

"미야코랑 소라 상이랑 쇼핑하다가 그만 엿들었지 뭐야. 미야코는 저쪽에 있으니까, 얼른 가봐!"

너무나도 빠르게 일어난 일에 어안이 벙벙한 타케루와 다이스케를 뒤로 하고, 미미에 의해 반쯤 떠밀쳐진 켄은 쭈뼛거리며 반대쪽에서 정신없이 무언가를 구경하고 있는 미야코를 향해 조심스레 다가갔다.

"저- 미야코 상-"

"어- 어? 아니, 켄 쨩? 여기서 뭐하는거야?"

쓰고 있던 모자를 벗으며, 긴 머리를 풀은 미야코가 반갑다는 표정으로 말하자, 이미 얼굴이 홍당무처럼 변해버린 켄은 말을 더듬다가 손에 들린 선물을 내밀며 고개를 푹 숙이고는, 아무렇게나 외쳤다.

"생일 미리 축하해요! 좋아해요 미야코 상, 그- 사- 사귀어 주세요!"

벌벌 떨며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는 켄과, 얼굴이 급격히 새빨갛게 달아올라 알아들을 수 없는 단말마를 내뱉는 미야코를 바라보는 아이들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뭐, "에에에에에?! 지금 여기서 고백하는거-" 라고 외치려다가 미미에게 반 강제로 입이 막혀 버둥거리는 다이스케를 제외하고.

떨리는 켄의 선물을 조심스레 잡은 미야코를 켄은 올려다보았고- 시선이 마주친 그 둘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가만히 있었다. 부끄러워도 차마 돌릴 수 없는 눈길... 서로에게 그렇게 홀려.

 


'연성 > 단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이켄 - 새벽  (0) 2016.02.21
히카미야 - 생머리  (0) 2016.01.20
켄타케 - 바람 부는 날  (0) 2016.01.19
타이야마 - 담배  (0) 2016.01.18
이오켄 - Sleeping Beauty  (0) 2016.01.15
Posted by Doctor Box
l

켄타케 - 바람 부는 날
2016년 1월 18일


쉬이이이잉-

바람 소리가 귀를 찢는 어느 추운 밤, 타카이시 타케루는 건물 안에서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따뜻한 코코아 한 잔을 손에 쥐고 내려다보는 풍경은, 바람에 맥을 추지 못하고 허공에서 춤을 추는 나뭇잎과, 그들을 은은하게 비추는 조명같은 달빛으로 가득했다.

남자 아이들끼리 여행을 가자며 들떠있던 것도 잠시, 급작스럽게 몰아치는 장마 덕에 아이들은 큰 맘 먹고 빌린 캐빈 안에서 꼼짝없이 앉아있어야만 했다. 비는 그나마 그쳤지만 잠잠해질 생각은 추호도 없는 듯한 바람을 보며 나가기를 포기한 아이들은, 술을 마시거나 포커 게임을 하다 하나둘씩 나가떨어졌다.

모두가 잠든 듯한 이 새벽에,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타케루 옆에, 자신과 비슷한 키의 그림자 하나가 가까이 다가오며 그의 이름을 조용히 불렀다- "타케루 군?"

고개를 돌리자, 목까지 올라오는 폴라티를 입고 손에 뜨거운 홍차가 담긴 듯한 컵을 쥐고 있는 단발머리의 남자가 서 있었다. 자신을 보며 싱긋 웃는 그의 꺾인 고개에 따라, 고운 자수정빛 머리가 살짝 흔들렸다.

"아, 켄 군. 안녕."

"늦었는데, 뭐해?"

"아, 그냥. 잠이 안와서."

"타케루 군도 안 자고 있을 줄은- 의외인걸. 난 바람 부는 날이 좋아서. 그냥 밖이나 좀 구경하려고 했지."

"특별히 바람을 좋아하는 이유라도 있어?"

타케루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밖을 바라본 켄은, 홍차를 한입 마시며 멋쩍은 듯이 웃었다.

"아니 뭐, 특별한 건 아니고. 그냥- 바람 소리를 듣고 있으면, 모든게 안정되는 느낌이야. 어렸을 때에는, 내 머릿속에서 울려퍼지는 나쁜 목소리들이 바람 소리에 씻겨져 나가듯 묻혀버리곤 했거든. 지금은 그런게 있진 않지만, 내 모든 문제를 바람이 보듬어주는 것 같달까."

타케루는 자신의 옆에 서있는 남자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자신이 한때 주먹다짐도 했었고, 또 무척이나 껄끄러워 하던 존재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켄 또한 착한 사람이고, 그리고 자신이 했던 일을 속죄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결단력 있는 남자임을 깨닫게 되었었다. 서로가 서로를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했던 것도, 타케루가 마음을 열기 시작한 그 때부터였을까.

"좋다, 그치?"

"응."

각자 손에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컵을 들고 있는 둘은, 말없이 바람 부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연성 > 단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히카미야 - 생머리  (0) 2016.01.20
켄미야 - 머리끈  (0) 2016.01.19
타이야마 - 담배  (0) 2016.01.18
이오켄 - Sleeping Beauty  (0) 2016.01.15
다이이오 - 라면  (0) 2016.01.14
Posted by Doctor Box
l

타이야마 - 담배
2016년 1월 17일


닫히기 직전의 입술 사이로 담배 한 개비를 물고, 끝이 빨갛게 달아오른 그 유독성 물질을 턱을 이용해 위아래로 흔들며 추운 밤길을 걸어가는 타이치의 뒤에는, 마치 그가 걸어온 자리를 표시라도 하는 듯 불투명한 담배연기가 그를 따랐다.

고등학교 즈음이었을까, 타이치가 담배를 피게 된건. 친구 때문이었는지, 호기심 때문이었는지는 별로 기억나지 않았다. 어쩌면, 같은 시점에서 피기 시작한 야마토의 권유였을지도 모른다. 

뭐, 그게 무슨 상관이겠냐마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타이치는 정처없이 아파트 주위를 배회하고 있었다. 아파트 난간에서 펴도 냄새가 다 밴다고 히카리에게 쫓겨나다시피 한 타이치가 특별히 갈 곳이라곤, 입에 물린 담배를 흔들며 가로등이 빛나는 길을 무작정 걷는 것 뿐이었다.

그 때, 그는 가로등이 노랗게 비추는 벤치에서 자신과 비슷한 하얀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고 주머니를 뒤적거리는 익숙한 금발 머리의 남자를 발견했다.

저도 모르게 지어지는 미소에 소중한 마지막 담배가 입에서 떨어질 뻔 하는 것을 간신히 엄지와 검지로 낚아챈 타이치는, 하늘을 향해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입김과 섞여 하늘을 메운 따뜻한 그 연기는, 곧이어 허공 속으로 흩어졌다.

"여어, 야마토."

손가락을 움직여 담배를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운 타이치가, 야마토 옆에 털썩 주저앉으며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 타이치."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든 야마토가, 타이치의 얼굴을 보고 안심하는 듯 치켜올렸던 눈썹을 누그러뜨리며 말했다.

"히카리 말로는 오늘 너 타케루네 집에서 자고간다던데, 왜 밖에 나와있냐."

"담배 한 대 피운다니까 냄새난다고 쫓겨났지 뭐."

"아주 동생한테 잡혀사시는구만?"

"너도 히카리한테 쫓겨나온 게 뻔하거든."

"크핫, 들켰나."

"하여간, 우리 가족 둘 다 누가 형이고 오빠인지 모르겠다니깐."

말이 끝남과 동시에 크게 웃음을 터트린 둘은, 어두운 하늘을 바라보며 같이 뜨거운 입김을 내뿜었다.

타이치가 얘기를 하느라 타들어간 담뱃재를 털어내며 피지 못한 담배를 아까워하는 동안, 그제서야 다시 자신이 여기에 나온 이유를 깨달은 듯 다시 주머니를 뒤적거린 야마토는, 남은 담배 한 모금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깊게 들이마쉬는 타이치를 향해 물었다.

"타이치, 혹시 불 있냐."

"아? 어어, 잠깐만."

곧이어 입고 있던 갈색 코트 안주머니에서 오렌지색 라이터를 꺼낸 타이치는, 입에 담배를 물고 자신을 바라보는 야마토의 담배 아래에 라이터를 대고, 오른손으로 바람을 가리며 라이터를 켰다.

칙- 칙-

"어, 이거 왜이러지. 다 됐나."

몇번을 시도해도 스프레이를 뿌리는 듯한 소리만 날 뿐, 불이 켜지지 않자, 얼굴을 찌푸린 타이치가 입에 담배를 문 채로 라이터를 흔들었다.

"아, 뭐, 됐어. 오늘은 담배 피는 날이 아니구만."

야마토가 쯧- 하고 혀를 차며 말했지만, 그는 그래도 아쉬운 듯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쉬이 집어넣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담배 끝을 잘근거리며 어두운 구름이 잔뜩 낀 밤하늘을 가만히 쳐다보는 야마토를 바라보고 있던 타이치는, 좋은 생각이 난 듯 장난 가득한 미소를 짓고는, 자신의 담배에 있던 재를 털어내곤 다시 입에 물었다.

"야마토."

고개를 다시 돌려 자신을 바라보는 야마토의 턱을 오른손을 이용해 딱 잡은 그는, 왼손을 이용해 자신의 담배 끝을 야마토가 물고 있던 담배 끝과 맞붙였다.

타이치의 담배가 서서히 멀어지자, 야마토의 담배가 빨갛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뭐하는 짓이야,"

야마토가 벌개진 얼굴로 자신의 턱을 잡고 있던 타이치의 손을 쳐내자, 타이치는 어깨를 으쓱하며 얼굴에 큰 호선을 그려보였다.

"뭐긴 뭐야, 담배키스지."


'연성 > 단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켄미야 - 머리끈  (0) 2016.01.19
켄타케 - 바람 부는 날  (0) 2016.01.19
이오켄 - Sleeping Beauty  (0) 2016.01.15
다이이오 - 라면  (0) 2016.01.14
타이야마타이 - 온천  (0) 2016.01.09
Posted by Doctor Box
l



디지몬 x 킹스맨 - Roundabout

2016년 1월 16일

정장을 입은 타케루 사진은 콩다 (@bean2810) 님의 그림입니다.

다시금 감사드립니다!



***



후-


겉보기에도 값이 꽤 나갈 것 같은 가죽 의자에 앉아 오른다리를 자기 얼굴 앞까지 올려놓고 있는 남성이, 지금 막 자신이 손질을 끝낸 검지 손톱을 엄지로 찬찬히 훑고는, 남아있는 가루를 날려보내려는 듯 조용히 입김을 불었다. 


자신의 사파이어빛 눈을 연상시키는 청색 줄무늬 정장을 입고, 검은 넥타이를 맨 이 남자는 쓰고 있던 네모난 안경을 치켜올리곤 의자 옆, 쟁반에 놓여져 있는 집게로 얼음 몇 개를 잔에다 하나 하나 떨어뜨렸다. 얼핏 보면 칙칙할 수도 있는 그의 정장은, 오른쪽 가슴에 차고 있던 밝은 노란색 뱃지 덕분에 한층 화사해 보였다- 곧이어 각양각색의 무늬가 새겨져 있는 유리 위스키 병을 집어든 그는, 자신의 뱃지처럼 빛나는 금빛 머리를 한번 더 쓸어넘기며 잔에 위스키를 따랐다.


손가락으로 잔의 끝부분을 조심스레 잡고 자신의 얼굴 앞에서 천천히 흔들어보이는 그의 몸짓에, 하얀 셔츠를 고정시키기 위해 착용한 검은 멜빵이 조심스럽게 외투 아래로 모습을 드러냈지만, 그러든 말든 이 푸른 정장의 신사는 조용히 위스키를 음미했다.


다른 손의 검지만을 뺨으로 올리고, 나머지 손가락은 턱 밑으로 하여 턱을 괴고 있던 그는, 자신이 바라보고 있던 양복점 안 탈의실의 문이 마침내 열리자 눈썹을 치켜올렸다.


"기다리다 지치는 줄 알았다고, 야마토 형."


그의 투덜거리는 말투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파란빛 넥타이를 고쳐매며 자신의 검은 외투 단추를 잠군 남자는, 자신을 웃으며 바라보는 동생과 같은 금발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동생과 다르게, 그의 머리는 무언가라도 바른 듯 하늘을 향해 솟아있었다.


"임무 중에는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을텐데, 갤러해드 (Galahad)."


새로이 입은 정장이 어떤 느낌인지 보려는 듯 전신 거울 앞에서 천천히 자기 자신을 훑어보던 야마토가,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하여간, 깐깐하다니깐. 알겠어요, 시정하겠습니다, 퍼시벌 (Percival)."


놀리는 듯한 말투로 야마토의 코드네임을 부른 그의 동생, 타케루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자신의 형을 바라보았다. 늘 들고 다니는 검은 우산을 향해 손을 뻗으려던 순간, 타케루는 야마토의 구두에 눈을 고정시켰다.


"촌스럽게, 그게 뭡니까? 풀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쿼터 브로그라도 신던지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은 야마토는, 주인장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타케루에게 가자는 손짓을 하며 말했다.


"브로그 없는 옥스포드가 가장 신사다운 법이야."



***



양복집 비밀통로를 통해 본부로 내려가는 엘레베이터 안에서, 휘파람을 불며 자신의 우산을 빙빙 돌리던 타케루는, 입을 굳게 다물고 팔짱을 끼고 있는 형을 잠깐 쳐다보더니, 곧이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번엔 뭐랍니까?"


"암살."


"우리가 언제부터 맘에 안드는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쏴죽이고 다니는 집단이 됐습니까?"

"아서(Arthur)의 지령이야.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


"하."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을 굴린 타케루는, 자신의 은빛 롤렉스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오후 5시 55분- 아슬아슬하게 회의 시간을 맞출 수 있을 터였다.


"그럼 오늘 회의 주제는 그 타겟에 대한겁니까?"


"그렇겠지."


"아니 근데, 왜 퍼시벌은 이걸 다 알고 있는데 난 모르고 있던건지가 이해가 안되는데요."


"아서가 날 통해 너한테 얘기하라고 했으니까."


"아니 근데 왜 이제까지 기다린겁니까? 거 참, 미리 얘기해주면 되지. 그래서, 타겟이 누굽니까?"


투덜거리는 타케루를 돌아본 야마토는, 무언가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연민의 감정인지, 아니면 단순히 형으로써의 눈빛인지. 타케루는 전에도 몇번 야마토가 아서와 대화 후 저런 표정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때 야마토가 왜 그랬는지를 떠올려보기도 전에, 야마토의 단말마가 그의 생각의 허리를 베어냈다.


"야가미 타이치."


계속해서 빙글빙글 돌아가던 타케루의 우산이, 우뚝 멈춰섰다.


"동명이인이지?"


임무 중이고 무엇이고 상관없이, 제발 그렇다고, 그저 동명이인일 뿐이라고 말해달라고 반말로 자신의 형을 캐묻는 타케루의 눈빛은 절박 그 자체였다. 냉혈한이라고 불리던 이시다 야마토마저도, 동생의 그 눈빛은 차마 감당하기 힘든 듯 고개를 돌렸다.


묵묵부답이었다- 그리고 타케루는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



"아서!!!"


문을 부수다시피 박차고 회의실에 들어온 타카이시 타케루는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씩씩 거친 숨을 내쉬는 그 뒤에 서있는 야마토는, 원탁을 훑어보았다- 그는, 아서를 제외하면, 자수정 빛깔의 단발 머리를 깔끔하게 뒤로 넘기고, 몇백미터 밖에서도 빛날만한 분홍색 반지를 낀 손으로 턱을 괴고 있던 란슬롯 (Lancelot)- 이치죠우지 켄만이 있음을 알아차렸다. 물론, 붉은 머리와 잘 어울리는 보랏빛 커프스를 만지작 거리며 홀로그램으로 참석할 요원들을 정리하고 있는 멀린 (Merlin)- 이즈미 코시로를 포함해서.


그 뜻은 회의가 곧 시작될 것이라는 얘기였다- 아직 회의가 시작하기 전에 타케루가 문을 박차고 들어온 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야마토는 가늠할 수 없었다. 특히, 동생이 지금부터 무슨 짓을 할지 아주 잘 알고 있었기에.


"갤러해-"


타케루의 얼굴을 보고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푹 숙인 란슬롯이나, 일부러 모른 척 홀로그램에 열중하는 멀린과 달리, 묘하게 야마토를 닮은 송곳같은 갈색 머리를 한, 검붉은 정장의 아서는 타케루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곧이어 그가 무미건조한 말투로 입을 열었지만, 타케루의 외침에 곧 묻혀버리고 말았다. 


"야가미라니!!"


"갤러해드. 회의가 곧 시작된다. 일단 앉-"


"빌어먹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야가미 타이치라니!"


끓어넘치는 듯한 분노로 아서를 몰아붙인 타케루였지만, 아서는 눈 한번 깜빡이지 않았다. 


"우리가-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흥분한 상태로 자신에게 손가락질을 하는 타케루의 몸짓에, 문을 닫고 가만히 서있던 야마토는 순간 움찔했다.


"당신의 가장 친한 친구라고 야가미 스스무 상을 소개시켜준건 바로 당신이었잖아!"


"갤러해드-"


"스스무 상이 죽고 기울어가던 가문을 타이치 상이 어떻게 간신히 살려놨는데, 그렇게 얘기해도 도움 하나 주지 않았으면서, 이제와서 방해된다고 죽여버리겠다고?!"


"..."


"친구의 아들을 그렇게 막 죽여버린다고 말하고도 아무 죄책감도 들지 않습니까? 예? 아, 그렇지, 그 빌어먹을 임무 때문에 어머니도 버리셨었죠? 안그래요, 아버지?!"


쾅-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던 타케루는, 말을 끝맺음과 동시에 책상을 있는 힘껏 내려쳤다. 야마토는 그저 뒤에 서서 동생을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아서라는 이름으로 이 조직을 이끌고 있는 자신들의 아버지, 이시다 히로아키에게 난생 처음으로 반기를 드는 동생을.


그들은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에게 킹스맨 요원이 되는 훈련을 받은 존재였다. 그때만 해도, 가정은 행복했고, 아서라는 중책에도 불구하고 히로아키는 늘 웃고 장난끼 넘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는 변하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웃음이 끊이지 않던 가정은 비가 내리는 어두운 길거리처럼 어둠에 젖어갔고, 히로아키는 아이들에게 엄격하게 변했다. 결국 더 이상 그의 행동을 인내할 수 없었던 그들의 어머니 나츠코는 타케루를 데리고 집을 떠나버렸다- 야마토가 타케루를 다시 본 것은, 많은 시간이 흘러 타케루가 자신의 의지로 다시 킹스맨에 돌아왔을 때였다.


생각해보면, 어렸을 때에도, 그리고 커서 거의 무례하기까지 할만큼 엄격해진 아버지에게 훈련을 받을 때도, 늘 그에게 반발했던 건 다름아닌 야마토 자신이었다. 타케루는 묵묵히- 때로는 웃으며, 때로는 농담을 건네며 맡은 바를 수행했고, 그 덕에 얼마 안가 갤러해드라는 이름을 받고 정식 요원이 될 수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런 타케루가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었다. 히로아키는 야가미 스스무와 친했다- 그 둘은 뗄레야 뗄 수 없는 친구 관계였으니까. 그리고 그렇기에 자연스레, 야마토는 자신과 동갑내기인 스스무의 아들, 타이치와 깊은 유대관계를 쌓았다. 그것은 그의 동생인 타케루와 타이치의 여동생 히카리도 마찬가지였을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너무 어렸고, 제대로 된 친구가 되기도 전에 타케루는 어머니 손에 끌려 자취를 감췄었다.


히로아키도 타이치를 아꼈지만, 스스무가 죽고 나서 그들의 관계는 소원해져만 갔다. 생각해보면, 히로아키가 지금의 성격이 된 것도 스스무가 죽고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타케루와 야마토는 타이치와의 관계를 계속해서 이어갔다- 아니, 애초에, 저번주만 해도 야마토와 타케루는 타이치네 집에서 저녁식사를 하지 않았던가. 당연하게도, 그렇기에 이 지령은 야마토에게도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이번 회의에서 아버지가 정확히 무슨 의도를 갖고 이런 말을 한건지 캐물으려고 했는데-


타케루가 이렇게 반응할 줄은.


"그 계집애 때문이냐?"


자신만의 생각에서 빠져나온 야마토는, 숨을 고르고 있는 타케루를 향해 아서가 말을 하는 것을 보았고,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타케루가 두 주먹을 뼈가 부서질 만큼 부들부들 떨며 쥐고 있음을 깨달았다.


"계집이라고, 하지 말란-"


"야가미 가문의 동태를 알아보라고 보냈더니, 한심하게 사랑에나 빠져 오고는. 쯧."


그제서야 야마토는 아서가 타이치의 동생, 히카리를 얘기함을 알아차렸다. 분명히 몇달 전, 타케루가 그들의 새 사업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히카리에게 접근하는 임무를 받았긴 했었다- 야마토 자신에게는 타이치와 가까운 사람들을 미행하라는 임무가 떨어졌고 말이다. 그때만 해도 두 형제는 야가미 가문을 굳이 감시하는 아서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임무를 어찌 되었든 수행해냈던걸로 기억했는데-


"... 그럼 한가지만 물어봅시다, 아서."


타케루의 떨리는 목소리는, 그가 한계점에 다다르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임무에, 친한 사람을 암살하라는 지시, 게다가 그의 짝사랑까지... 야마토는 지금이라도 당장 타케루를 토닥여주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야가미 가문이랑 그렇게 친했으면서 왜-"


타케루의 질문은, 안경을 벗은 아서가- 아니, 히로아키가 나즈막하게 말한 한마디에 길을 잃고 말았다.


"내가 스스무를 죽였으니까."



***



보시다시피 여기서 끝날 이야기는 아닙니다- 실은 콘티도 구상도 더 있습니다만은, 후편이 언젠가 나올지, 나오지 않을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

'연성 > 장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타케히카 - Falling For You  (4) 2016.02.18
타케히카 - Lovemental Up!  (0) 2016.02.07
다이켄카이저 - Psychosis  (0) 2015.12.30
타케히카 - The Persistence of Memory  (1) 2015.12.03
다이타케 - Lather, Rinse, Repeat  (0) 2015.11.15
Posted by Doctor Box
l

이오켄 - Sleeping Beauty
2016년 1월 14일


중학교라고 달라진 점은 하나도 없었다- 선택받은 아이들 중에서 가장 막내였던 만큼 그와 그나마 가장 나이차가 덜 났던 다이스케들은 중학교때처럼 고등학교로 가 선배들이 입던 하늘색 교복을 입고 있었고, 아이들은 혼자 중학교에 남겨진 그를 위해 종종 그를 찾아오곤 했다.


그래, 중학교라고 달라진 점은 하나도 없었다. 

히다 이오리는 이치죠우지 켄이 싫었다.


디지몬 카이저로써 사람을, 디지몬을 괴롭히고 온갖 악행을 저질렀으면서 어둠의 씨앗 때문이었다고 얼버무린다고 해서 그의 죄가 씻어지는 건 아니었다. 그는 아직도 중죄를 저지른 죄인이었고, 그 짐을 평생 안고 살아가야 할 터였다- 그리고 이오리는 그게 당연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듯 했다. 하다못해 자신을 제외하고 가장 켄과 껄끄러운 사이를 유지하던 타케루조차도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그를 켄 군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제, 디지털 세계에서 그가 한 짓을 아는 사람들 중에 그를 아직도 성으로 부르고 있는 건 이오리 혼자였다.


"좋은 아침이에요, 타케루 상, 다이스케 상."


"여어, 이오리!"


"이오리 군도 좋은 아침~"


등교길에 만난 다이스케와 타케루를 향해 반갑게 웃어보인 이오리는, 조금 전까지 그들과 대화하며 웃고 있던 켄이 우물쭈물하는 표정을 짓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은 이오리는, 곧이어 그에게로 다가가 팔을 내밀었다.


"반가워요, 이치죠우지 상."


"어, 어어. 안녕, 이- 이오리 군."


당황스런 표정으로 자신의 손을 맞잡고 천천히 흔드는 켄의 어쩔 줄 몰라하는 그 모습이 얼마나 통쾌한지. 그가 켄을 당황스럽게 만든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모두들 대신 그에게 내리는 벌처럼, 속죄하라는 채찍질처럼, 이오리는 계속해서 켄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를 계속해서 쫓아다니고, 불편해하는 그와 일부러 단 둘이 대화를 할 기회를 노리는 나날들이 이오리에겐 만족스럴 따름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이 자신이 켄을 싫어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여름날, 다들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에 일찍 도착한 이오리가 먼저 도착해 꾸벅꾸벅 졸고 있는 켄을 만나기 전까진.


정단하게 교복을 차려입은 자수정 빛깔의 그 남자아이는, 나무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시원한 벤치에 한쪽 다리를 끌어안고 조용히 졸고 있었다. 까딱이는 그의 고개는 그의 보랏빛 머리카락이 반쯤 가리고 있었고, 천천히, 하지만 깊게 숨을 내쉬는 그는 무척이나 평온해 보였다.


그런 그를 가만히 보고 있자니 이오리는 다시금 화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저렇게 편안하게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저렇게- 저렇게나- 예쁘게-


예쁘게?


한 발자국 더 켄에게 다가간 이오리는, 오뚜기같은 그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날카로운 듯 온화한 눈매, 오똑 솟은 코, 축구를 하면서도 남들과는 다른 새하얀 피부, 그리고 앵두같이 꼭 닫혀있는 입술...


홀린듯 천천히 그에게 다가는 이오리는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느 순간부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분홍빛이 가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애증일까, 아니면 단순한 호기심일까? 


"이... 이치죠우..."


이제 이오리는 허리를 숙여 켄의 코 앞에 있었다. 마른 침을 삼키며 그의 이름을 내뱉어 보았지만, 입 안에서 맴돌기만 하는 그 이름은 차마 바깥 세계의 빛을 보지 못했다. 빠르게 움직이는 이오리의 눈동자는 계속해서 켄의 얼굴을 훑고 있었다- 그의 어여쁜...


"켄 상."


나즈막한 한마디와 함께, 이오리의 입술이 켄의 입술에 살포시 닿았다. 온 몸으로 퍼져나가는 달콤한 맛에 그는 감히 입술을 뗄 수 없었다. 첫키스 상대가 자신이 싫어하던 사람이라니- 그것도 남자와의 입맞춤이라니! 


하지만, 그래도. 조금만 더-


잠에서 깬 듯 천천히 눈을 뜬 켄이, 놀란 표정으로 황급히 고개를 뒤로 뺀 것은 바로 그때였다.


"이- 이- 이오리 군?"

'연성 > 단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켄타케 - 바람 부는 날  (0) 2016.01.19
타이야마 - 담배  (0) 2016.01.18
다이이오 - 라면  (0) 2016.01.14
타이야마타이 - 온천  (0) 2016.01.09
타이코시 - 우연  (0) 2016.01.07
Posted by Doctor Box
l

다이이오 - 라면
2016년 1월 13일


"필요한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이 모토미야 님을 부르라고!"


자신만만하게 엄지를 치켜들어 보이는 이 성게 머리의 형에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보인 이오리였지만, 그는 힘을 쓰는 일이라면 몰라도 조언을 구하러 다이스케를 만나러 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진지한 문제라면 타케루 상이 있었고, 기계와 관련된 것이라면 미야코 상과 코시로 상이 있었다. 학교에 대해선 켄 상이나 (이오리는 아직도 그를 이름으로 부르는 것에 대해 조금 껄끄러워했다) 죠 상이 있고, 패션이나 좋아하는 여자 문제라면 히카리 상, 소라 상 그리고 미미 상이 있었으니까. 그도저도 아니라면, 다이스케 상보다는 훨씬 더 경험을 많이 쌓은 타이치 상과 야마토 상이 있었다.


모토미야 다이스케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사람을 이끄는 리더십을 가진 남자였고, 이오리 또한 그를 따르고 존경하고 있었다.


그저, 무언가 의지할만한 타입은 아닐 뿐인거지.



***



특목중 시험을 보고 나온 이오리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디아블로몬의 농간에도 불구하고 무사히 시험을 합격한 수재 키도 죠의 과외에도, 제대로 풀지 못한 문제가 너무 많았고- 땅이 꺼질 듯 내뱉는 한숨에는 실망감과 한심함만이 가득차 있었다.


모토미야 다이스케가 이오리 앞에 풀어헤쳐진 녹색 중학교 교복을 입고 모습을 드러낸 건 바로 그때였다.


"이오리! 시험 본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었지! 어때, 잘 봤어?"


묵묵히 냉랭한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이오리의- 어쩌면 무례할수도 있는- 눈빛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다이스케는, 주머니에 넣고 있던 손을 빼고는 조용히 이오리의 등을 두들겨 주었다.


"괜찮아, 괜찮아. 다음에 잘 하면 되니까."


새빨간 석양빛에 빛나는 강가를 따라 집을 향해 걷는 그들 사이에는 적막만이 감돌았다. 혼자 생각할 시간을 원했던 이오리의 원망스런 눈빛을 아는지 모르는지, 휘파람을 불며 걷는 다이스케는 평온해 보이기만 할 뿐이었다.


둘 사이의 고통스런 시간이 마침내 끝나고, 다이스케의 집 앞에서 인사를 하고 마침내 혼자 고독을 씹을 시간이 주어지려는 순간, 다이스케는 이오리의 팔을 잡아끌었다.


"가기 전에 잠깐 들어와봐."


"그냥 집에 가면 안될까요?"


이오리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지만, 다이스케는 억지로 그를 집 안에 들이고는 식탁 앞 의자에 앉혔다. 헤실헤실 웃으며 무언가를 준비하는 그의 뒷모습이 얼마나 열받던지.


뭐라고라도 한번 쏘아붙여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다이스케가 그에게 내민 것은 라면 한 그릇이었다.


"오늘 힘들었지?"


"..."


"대답 안해도 돼, 괜찮아. 따뜻한 라면 한 그릇 먹고 집에 가서 푹 쉬어. 내가 켄처럼 똑똑하거나 타케루처럼 똑부러지진 않아서 다음 시험을 도와주거나 할 순 없지만, 가끔 다 잊어버리고 편안하게 있고 싶으면 언제든지 얘기해, 알았지?"


"고.. 고맙..."


고마움과 미안함, 서운함과 죄책감- 그 모든게 섞여 목이 메인 이오리는 차마 고맙다는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아까부터 계속 짜증만 내던 자기에게 라면을 내민 그 남자는, 다 이해한다는 듯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라면 국물에 비친 울먹이는 자신을 바라보며 우겨넣은 그 한입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라면이었다.



'연성 > 단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타이야마 - 담배  (0) 2016.01.18
이오켄 - Sleeping Beauty  (0) 2016.01.15
타이야마타이 - 온천  (0) 2016.01.09
타이코시 - 우연  (0) 2016.01.07
타이코시 - 술  (0) 2016.01.04
Posted by Doctor Box
l

타이야마타이 - 온천
2016년 1월 9일


글을 시작하기 전에:

수위물을 가장한 개그물입니다만, 적나라하진 않더라도 성적 표현에 대한 이야기가 무척이나 암시되는 만큼 캐붕 및 수위물을 안좋아하시는 분들은 뒤로 가기를 눌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아... 시원하다."


온천에서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안개 속에 모든 것이 뿌옇게 보이는 겨울밤, 눈이 살짝 내려 주위가 하얗게 물든 야외 온천에 몸을 담그고 있는 야마토는 저도 모르게 깊은 숨을 내쉬었다. 허리까지 올라오는 물의 따뜻함과 추울 듯 춥지 않은 시원한 바람- 천국 그 자체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대학 방학을 맞아 단체로 온천에 놀러온 아이들은 눈이 오는 것에도 개의치 않고 온천을 즐기기로 했고, 그 중 옷을 벗는 둥 마는 둥 하면서 가장 먼저 뛰쳐나온 야마토는 문 밖 너머에서 어렴풋이 들리는 다른 아이들의 목소리를 뒤로 하며 적막을 즐기고 있었다.


그 때, 드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탄탄한 상반신 아래에 타올을 걸치고 있는 타이치가 콧김을 내뿜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여어, 나이프 오브 라멘."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지."


눈을 굴리는 야마토를 보며 웃음을 터트린 타이치는, 타올을 벗어던지고는 알몸으로 천천히 물에 몸을 담갔다. 자신의 반대편에서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물 속으로 들어가는 타이치를 보고 있던 야마토는, 타이치를 빠르게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실소를 내뱉었다.


"큭- 하이고."


"왜 웃냐?"


"아무것도 아냐."


야마토의 입가에 퍼지는 괜한 승리감에 도취된 듯한 저 미소를, 그리고 왜 그가 그런 미소를 지었는지를, 타이치가 알아차리지 못할리가 없었다.


"하, 나 참, 진짜. 야, 아까 다 봤거든? 인간적으로 내가 너보단 낫다."


입가에 만연한 미소를 잃지 않은 야마토는, 타이치를 바라보며 맞받아쳤다.


"아 그러셔? 근데 왜 여자친구가 없는걸까?"


"그거랑 뭔 상관이냐? 애초에, 누가 봐도 최소한 넌 내가 이길 수 있거든?"


"진짜 혼혈을 이길 수 있을거라고 생각해?"


첨벙- 하는 소리와 함께 몸을 일으킨 타이치는, 습기 찬 머리를 쓸어 넘기면서 얼굴에 야마토를 비웃는 듯한 곡선을 그렸다. 


"데비몬 때 기억해? 내가 초딩 때부터 너보단 컸어."


응수하듯 물 속에서 몸을 일으킨 야마토 또한, 타이치를 향해 한 발자국 다가가며 고개를 흔들었다.


"헛소리도 작작 하셔야지, 이 유년기야."


"이 녀석이-"


그 순간, 드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어색한 표정을 지은 타케루가 머리를 긁으며 그들의 매치에 난입했다. 뒤에서 고개를 슬쩍 내밀며 그들을 쳐다보고 있는 나머지 남자 아이들을 보건대, 싸움을 벌이는 타이치와 야마토를 중재하기 위해 타케루를 떠밀어 넣은 것이 분명해 보였다.


조용한 온탕의 적막을 깬 것은 허리춤에 묶고 있던 타올을 주섬주섬 풀며 탕으로 걸어오던 타케루였다.


"뭔 일이에요, 타이치 상, 야마토 형?"


"아니 그-"


스르륵- 하고 타케루의 타올이 풀린 순간, 동시에 입을 열었던 타이치와 야마토는 말을 삼켰다. 가만히 자신들보다 어린 동생을 빠르게 훑은 그 둘은, 조용히 탕 속으로 다시 몸을 숨겼다.


"... 아무것도 아니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타이치와 야마토 반대편에 몸을 담근 타케루가 노곤노곤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감고 따뜻함에 만취하는 동안, 타이치는 야마토가 가만히 자신의 동생을 바라보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나머지 아이들이 싸움이 잦아든 것처럼 보이자 그제서야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는 동안, 타이치는 아무 말 없이 야마토의 어깨를 조용히 토닥여주었고, 야마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연성 > 단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오켄 - Sleeping Beauty  (0) 2016.01.15
다이이오 - 라면  (0) 2016.01.14
타이코시 - 우연  (0) 2016.01.07
타이코시 - 술  (0) 2016.01.04
타케히카 - The Disintegration of the Persistence of Memory  (0) 2015.12.23
Posted by Doctor Box
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