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몬'에 해당되는 글 49건

  1. 2015.11.15 코시로 - 이름 by Doctor Box
  2. 2015.11.15 죠고마 - 미래 by Doctor Box
  3. 2015.11.15 타케히카 - 적월 (赤月) by Doctor Box
  4. 2015.11.15 다이타케 - 양말 by Doctor Box
  5. 2015.11.15 켄히카 - 정학 by Doctor Box
  6. 2015.11.15 켄다이 - 선공후사 (先公後私) by Doctor Box
  7. 2015.11.15 타케히카 - 그와 나 by Doctor Box
  8. 2015.11.15 다이스케 - 용기를 이어받은 아이들에게 by Doctor Box
  9. 2015.07.26 오다이바 메모리얼 - The Olden Days by Doctor Box 1

코시로 - 이름

연성/단편 2015. 11. 15. 04:11

코시로 - 이름

2015년 6월 2일


자신이 입양아임을 알게 되었을 때부터, 코시로는 자신의 이름에 대해 묘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이즈미 코시로.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이지만, 만약 그가 자신의 친부모 밑에서 자랐다면, 그는 이즈미도, 코시로도 아니었을 테였다.


그럼, 그들 밑에서 자란 자신은 과연 어땠을까?


어쩌면, 오다이바와는 전혀 관계없는 곳에서 살고 있었을 수도 있었다.

괜히 방에 틀어박힐 일도 없었을지도 모르고, 컴퓨터와 친해질 계기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지금처럼 모든 것에 질문과 관심을 가지는 아이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그랬다면- 모두와 함께 디지털 세계에 가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그래, 자신이 지금 소중하게 여기는 모든 것들- 지식, 친구, 텐토몬... 이것들은 그가 이즈미 코시로였기 때문에, 이즈미 코시로이기 때문에 손에 쥘 수 있는 것들이 아닐까.


생각이 거기까지 다다른 코시로는, 자신의 노트북을 조용히 닫았다. 

더 이상 자신의 이름에 대해 묘한 감정을 느끼지 않았기에.


오늘은 부모님한테 사랑한다고 말씀드려야지.


그는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을 사랑하는 부모님 밑에서 자란 이즈미 코시로였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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죠고마 - 미래

연성/단편 2015. 11. 15. 04:02

죠고마 - 미래

2015년 6월 2일


「잘 지내니, 고마몬?


내가 너를 보고 기겁하여 도망친 게 정말 엊그제 같은데, 눈을 떠보니 어느샌가 너는 내가 절대 놓을 수 없는 단짝이 되어있었지...」


늦은 밤, 점점 길어지고 있는 푸른 머리를 뒤로 쓸어넘긴 키도 죠가 펜을 움직이는 것을 멈췄다.


땅이 꺼질듯한 한숨을 내쉬며 의자를 다시 끌어당겨 글을 쓰기 시작하는 그의 뒤에는, 이미 몇번 시도했다 던져버린 듯, 구겨진 종이들이 어지러이 놓여져 있었다.


약 일년 전, 코시로, 타이치 그리고 금발 형제가 아이들에게 오메가몬과 디아보로몬에 대한 이야기를 해줬을 때, 그들에게 세계를 구했다며, 자랑스럽다며 웃어보인 죠였지만, 그 또한 내심 고마몬을 만났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떨쳐낼 수 없었다.


그랬기에, 코시로가 겐나이와의 연락을 통해 파트너 디지몬들에게 짧게나마 메세지를 전송할 수 있다고 했을 때, 내심 가장 기뻐했던 것 또한 죠였다.


하지만- 편지 하나 쓰는 게 이러헥 어려울 줄 누가 알았겠는가.


「거긴 언제나 같을까? 난 벌써 중학생이 되었어. 디아보로몬 덕에 시험을 못볼 뻔 했지만, 다행히도 좋은 중학교에 들어갔어. 해야할 공부가 더 많아진 것 같아. 하지만 말야, 고마몬, 난 널 위해 열심히 공부할거야. 의사가 되고 싶거든. 사람도, 디지몬도 모두 고칠 수 있는 의사가 되서, 다시는 내가 다친 존재를 속수무책으로 지켜보기밖에 할 수 없는 그런 상황이 다시 오지 않도록...


미래. 죠는 자신이 선택할 미래에 대해 구구절절 써내려가고 있었지만, 그가 생각하는 미래에는 고마몬이 그의 곁에 있었다. 그렇지만, 그런 미래가 오긴 할까? 이렇게 종종 메세지를 보내는게 다는 아닐까? 고마몬의 그 손인지 발인지 모를 (저도 모르게 죠는 미소를 지었다) 것을 다시는 쥘 수 없는걸까?


거기까지 생각이 다다르자, 안경을 잠시 벗은 죠는 흐릇해지는 눈을 애써 닦아내며 글을 계속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꼭 다시 의연한 모습으로 만날 수...


뚝-


눈물 한 방울이 그의 코를 타고 내려와 종이 위에 툭 떨어졌다.


번져버린 '다시' 라는 단어.

운명도 가혹하시지.


꾸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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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케히카 - 적월 (赤月)

2015년 6월 2일


새까맣게 타들어가는 하늘을 밝히는 거대한 보름달. 모두가 잠자리에 들었을 새벽에, 타카이시 타케루는 아파트 난간에 기대 밝은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예로부터 적월 (赤月)은 불행의 상징이라 하던가. 지금 그의 상황이 그와 딱 맞아떨어지는 것 같았다. 메말라버린 웃음. 뜻대로 풀리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게-


"타케루 군?"


그 때, 아파트 밑에서부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달에게서 눈을 뗀 타케루는, 아파트 밑에서 손을 흔드는 히카리를 보았다. 이 밤에 왜 그녀가 밖에 있는지 궁금해 한 그였지만, 곧이어 어깨를 으쓱하고는, 윗옷 하나를 걸치고 그녀를 만나러 달려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 밤 늦게까지 뭐하는 거야, 히카리 쨩?"

아파트 문을 박차고 나온 타케루가 히카리에게 미소를 지어보이며 물었다.

"그냥, 보기 힘든 붉은 달이 떴다길래, 구경이라도 좀 할까 해서. 타케루 군은?"

"아. 뭐, 나도."

그렇게 사소한 담소를 나누며, 그 둘은 자연스레 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새들도 자러 간듯 아무도 없이 조용한 공원에 도달하자, 히카리는 잔디밭에 벌렁 누웠고, 자신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타케루를 끌어당겨 자신 옆에 눕혔다.

"누워서 바라보고 있으면, 하늘이 다 보이거든. 별부터, 저 가루다몬처럼 붉은 달까지."

하지만, 타케루가 바라보고 있던 것은 달도, 별도, 하늘도 아니었다- 그 옆에서 그 어떤 빛보다 환하게 미소 짓고 있는 아이의 미소에 그만 정신이 팔려.

"... 붉은 달이 불행의 상징이라고 하던데, 타케루 군은 어떻게 생각해?"

"... 타케루 군?"

그녀의 목소리에 갑자기 정신을 차린 타케루는, 자신을 마주보고 있는 히카리의 마호가니 색 눈을 가만히 바라보다, 몸을 일으키고는 다시금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니."

조심스레 자신의 손을 그녀의 손 위에 포갠 타케루는, 천천히 깍지를 끼고 히카리의 손을 꽉 잡았다.

"너랑 같이 있잖아."


유난히 더 달이 밝게 빛나는 것 같은 새벽-

오늘만큼은, 적월은 그에게 있어서 행운의 상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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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타케 - 양말

연성/단편 2015. 11. 15. 03:27

다이타케 - 양말

2015년 6월 2일


딩동-


한참 퍼질로 자고 있어야 할 토요일 아침에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붉은 머리의 남자 아이는 속으로 욕을 내뱉으며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오후에 있을 축구 시합을 위해 실컷 퍼질러 자야할, 부모님도, 누나도 없는 이 금같은 아침에 도대체 누가-


"안녕, 다이스케 군."


다이스케가 눈을 비비며 현관문을 열었을 때에는, 아침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는 금발의 남자아이 하나가 곤란한 표정을 짓고 서 있었다.


"타케루?"


"내가 깨운 것 같네. 미안."


미안하면 아침에 찾아오질 말라고.


퉁명스럽게 대답을 하려던 다이스케에게, 타케루의 옷차림이 눈에 들어왔다. 그 놈의 벙거지 모자부터 시작해서, 이 아침부터 어디를 가려는지 단정하게 차려입은 그였다. 깨끗한 셔츠부터, 주름 하나 없는 반바지, 그리고 흙탕물로 더럽혀진 신발-


더럽혀진 신발?


말없이 자신을 훑어보는 다이스케의 무언의 질문을 알아차린 듯, 멋쩍은 미소를 지은 타케루가 다시 입을 열었다.


"실은, 야마토 형을 만나러 가던 도중에 웅덩이에 실수로 빠져버리고 말았지 뭐야. 마침 가던 길이 다이스케 군 집 앞을 지나기도 하고 해서... 혹시 말야, 양말 한 짝만 빌려줄 수 있어?"


양말이라니.


하긴, 그러고 보면 유난히도 깔끔 떠는 녀석이었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다이스케는, 방 안으로 들어가 자신의 옷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가 한번도 신지 않은 깨끗한 양말들이 서랍장 속에 가지런히 놓여져 있었지만, 다이스케는 무언가 다른 것을 찾고 있는 듯 했다.


곧이어, 다이스케는 서랍장 가장 깊숙한 곳에서부터 녹색 양말을 꺼냈다. 누나한테 생일 선물로 받고 자신은 절대 이런 거 신지 않는다며 쑤셔넣어놨던 녹색 양말을 가만히 바라보던 그는, 얼굴에 희미한 호선을 그리며 다시 현관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빌려줄 거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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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히카 - 정학

연성/단편 2015. 11. 15. 03:18

켄히카 - 정학

2015년 4월 5일


"정- 정학이라니-!"


학교 교단 밖에 앉아있는 보랏빛 단발머리를 한 남자아이에게 전손력으로 달려온, 고글을 낀 붉은빛 머리의 남자아이가 숨을 고르며 그 사이사이로 간신히 하고 싶었던 말을 내뱉었다.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야! 너- 너 임마, 그 천하의 천재 소년이- 다음 주에 우리 축구 시합 있는 거 뻔히 알-"


생각할 겨를도 없이, 하고 싶었던 말을 홍수마냥 쏟아내던 다이스케가,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 이치죠우지 켄의 얼굴과 팔이 울긋불긋한 상처로 가득했음을, 그리고 자신이 잘 아는 누군가가 그 상처에 약을 발라주고 있었음을 깨달은 건 바로 그 때였다.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헉헉대며 서있는 다이스케를, 야가미 히카리가 돌아보며 말했다.


"정말, 정말 미아냏 다이스케 군- 그 게임이 얼마나 중요한지 나도 잘 알고 있는데- 실은, 마코네 패거리가 또 타케루 군이나 다이스케 군이 없는 사이에 날 괴롭히려고 하는 바람에- 내가 거기서 그러지만-"


소독약이 묻은 솜을 들고 있던 그녀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거의 울먹일듯이 말하는 히카리의 변명은 켄이 그녀의 손을 꼭 잡음으로서 급작스럽게 끝을 맺었다.


"미안, 다이스케 군. 하지만 그렇다고 거기서 히카리 쨩을 내버려둘 순 없었는걸."


곧이어 다이스케에게서 히카리로 시선을 옮긴 켄은,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을 조심스레 놓고, 말을 계속했다.


"그리고, 아까부터 얘기했지만, 히카리 쨩, 미안해 할 것 하나 없어."


자신을 올려다보는 히카리의 눈을 마주친 단발의 천재 소년이, 얼굴에 호선을 그려보였다.


"이래뵈도 나, 친절의 문장의 소유자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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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다이 - 선공후사 (先公後私)

2015년 3월 30일


드르륵—


다사다난한 몇주가 지나고, 다시 평화를 찾은듯한 다이스케가 텅 빈 자신의 포장마자를 닫으려는 무렵, 문이 열리더니 한 남자가 재료를 정리하다 우뚝 멈춰선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목까지 잠긴 셔츠. 직접 현장에서 뛰느라 우락부락해진 손과 그 손이 잡아당기고 있는 검은 넥타이. 그 팔에 들려있는 푸른색 외투, 그리고 붉은 노울이 반사되어 마치 영롱한 자수정처럼 빛나고 있는 청아한 보랏빛 머리—


“이치죠우지.”


성게같이 삐죽빼죽 튀어나온 어릴적 헤어스타일 대신, 깔끔하게 잘린 붉은색 머리를 쓸어넘기며 입술을 깨물고 있던 다이스케가 조용히 말했다. 그는 차마 자신 앞에 서있는 사람을 쳐다볼 수 없었다. 아니, 쳐다보고 싶지 않았다. 요 몇주간 자신의 모든 것을 무너뜨릴 기세로 자신을 파헤치려 했던 그 사람을. 과거의 친구를, 과거의—


“우리가 성으로 부를 사이는 아닐텐데. 이거 섭섭한 걸.”


누가 먼저 그랬는데. 혼자 생각하다 그제서야 고개를 든 다이스케는, 씁쓸한 미소를 짓고 서있는 이치죠우지 켄의 얼굴을 마주했다.


“그럴려고 그런게 아닌 건 잘 알잖아.”


한 걸음, 두 걸음.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그 보랏빛 머리의 남자에 대한 분노가 머리 끝까지 차올랐다. 그럴려고 그런게 아니라는 것이야 잘 알고 있었다. 그게 그의 직업이니까. 그의 사명이니까. 하지만, 하지만— 친구를, 믿음을—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켄은, 외투를 옆 자리에 올려놓고는, 입술을 깨고 땅을 내려다보는 다이스케를 턱을 괴고 말없이 쳐다보았다.


“친구 말도 못 믿는 주제에, 여기까지 찾아오다니 배짱도 좋지.”


마침내 고개를 든 다이스케가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공은 공이고 사는 사일 뿐이야, 다이스케 군.”


자신을 보며 얼굴에 호선을 그리고 있는 그를 바라보던 다이스케는, 또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원래 같았으면 화라도 내고, 성질이라도 부렸을 그였겠지만—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소용일까.


“... 늘 먹던걸로?”


켄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다이스케는 라면을 준비하러 부엌으로 사라졌다.



***



그 이후로 그 둘 사이엔 아무 말도 없었다. 다이스케는 켄이 좋아하는 숙주나물 듬뿍 들어간 라면을 그의 앞에 가져다 놓았고, 켄 또한 조용히 머리를 귀 뒤로 넘기고 라면을 먹을 뿐이었다.


끼익—


켄이 라면을 먹는 동안, 포장마차의 문을 닫고 테이블과 의자를 정리하고 있던 다이스케가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을 때엔, 라면을 깨끗이 비운 켄이 의자에서 일어나 주섬주섬 외투를 입고 있었다.


턱.


옮기던 것들을 모두 내려놓은 다이스케는 그런 그의 뒷모습을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오묘한 감정. 어렸을 때 느꼈던 그 감정 비슷한 것이 몇십년만에 그의 차디찬 가슴을 찔렀다. 이미 잊었다고, 묻어두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바람 앞에 떨어지는 꽃잎처럼 하나둘씩 그의 심금을 울리는 것 같았다.


“잘 먹었어, 다이스케 군.”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며 켄이 말했다.


“...”


“개새끼.”


지갑을 열던 켄의 손이 우뚝 멈췄다. 


“이 빌어먹을 새끼야.”


몸을 돌린 켄은 고개를 푹 숙이고 뛰어오다시피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다이스케를 보았고, 눈을 감았다. 혼자 자책하며 쓰디쓴 맥주를 들이키다 이곳에 다시 오기로 결정했을 때부터 예상한 일이었다. 주먹이라도 날려야 다이스케 답지, 속으로 켄이 생각했고, 다이스케의 발소리가 바로 앞에서 들렸을 때—


켄을 맞이한 것은 주먹이 아닌, 뼈가 으스러지다시피 자신을 껴안는 다이스케의 팔이었다.


툭.


켄의 손에서 지갑이 빠져나가 땅에 떨어졌다.


고개를 들썩이며 자신을 껴안고 있는 다이스케를 내려다 본 켄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을까. 공사를 구별하긴, 빌어먹을. 여태까지 담담한 척 하고 있던 켄의 손이 떨렸다. 자신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다이스케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던 켄은, 자신 또한 그에게 몸을 맡겼다. 


조용한 포장마차 한가운데서, 그 둘은 아무 말 없이 서로를 껴안고 있을 뿐이었다.



***



그 둘이 서로를 놓은 것은 긴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렇게 울어놓고, 눈물로 얼룩진 홍조 띈 얼굴을 보여주긴 싫었는지, 등을 돌리고 서있는 다이스케를, 켄은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


어쩌면, 아무 말도 필요 없었을지도 모른다. 자기 자신보다 서로를 더 잘 이해한 그 둘은, 이미 서로의 진심을 확인했을 터였다. 그 어떤 말보다 더 따스한 행동으로.


“여기 꼼짝말고 있어.”


떨리는 목소리로 한숨을 내쉰 다이스케가, 고개를 홱 돌리고는 켄을 쳐다보며 말하더니, 부엌으로 뛰어들어갔다.


곧이어, 한손에는 이슬이 송글송글 맺힌 술병을, 또다른 한손에는 술잔 두개를 들고 온 다이스케가, 바로 옆의 테이블에 그것들을 쾅 하고 내려놓았다.


“돈 따위 안내도 돼. 난 너랑 달라서 말야,”


아직도 눈에 맺힌 눈물 한방울을 쓱 닦아내며, 다이스케가 말했다.


“공과 사 따위 구분 못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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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케히카 - 그와 나

2015년 2월 15일


타케루 군은 자기 형의 요리 실력을 이어받지 못한 게 확실했다.


"우와아앗!"


"타케루 군! 그걸 맨손으로 만지면 어떡해!"


"하지만 히카리 쨩-!"


아이처럼 내게 입을 삐죽 내밀고는 차가운 물로 손을 씻고 있는 그를 보며 난 키득거렸다.



***



오늘은 타이치 오빠의 생일이었다.


여느때랑 다름 없이 축구하느라 바쁠 오빠를 위해, 아이들은 깜짝 파티를 계획했다.

케익을 만드는 것은 내 담당이었지만, 어느때처럼 우리 집에 놀러온 타케루 군은 조수를 자처했다.


"그렇다면야.. 자! 여기 앞치마 입어, 타케루 군!"


"에엑? 앞치마라니?!"


"케익 만들건데 옷에 다 흘리면 어쩌려구!"


"하지만 그래도 남자한테 앞치마는 좀..."


"조수는 요리사 말을 들어야지~!"

"게다가.. 앞치마 입은 남자.. 귀엽기도 하고."


내 속삭임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타케루 군은 웃으며 고개를 젓더니 곧 앞치마를 입었다.


그리고 그렇게, 케익을 만들기 위한 우리의 길고 험난한 여정이 시작되었다.



***



"그래도 얼추 모양은 잡혔는데?"


"정말.. 빵 하나 만드는데 몇시간을 허비한거야!"


"헤, 그래도 귀여운 앞치마 두른 조수님 덕에 재밌지 않았어, 히카리쨩?"


엑, 뭐야, 들었었구나.

난 내 얼굴이 귓볼까지 빨개지는 걸 느끼며, 빨리 화제를 돌리기로 결심했다.


"그, 그래, 그럼 이제, 생크림으로 장식을..."


"내가 한번 해봐도 돼?"


타케루 군이 생크림이 가득차 있는 짤주머니를 집으며 말했다.


"그거 어떻게 쓰는지는 알아, 타케루 군?"


"글쎄..."


타케루 군이 짤주머니를 요리조리 돌리더니, 구멍을 눈으로 보다가 잘못해서 생크림을 쭉 짜내버리고 말았다. 깜짝 놀란 타케루 군의 코에는, 생크림이 한가득 묻어있었다.


눈썹을 모으며 얼굴을 찡그린 타케루 군은 곧 자신의 코를 보려고 눈을 모았는데, 그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웃겨서 난 그만 웃음보가 터지고 말았다.


"뭐야, 왜 웃는거야 히카리쨩?"


"아니, 그냥, 타케루 군 사시로 코 쳐다보려는게 너무 바보같아서-"


타케루 군이 내 말을 듣고는 얼굴을 찡그렸다. 하지만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그의 얼굴엔 장난끼 가득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곧, 그는 코에 생크림을 묻힌 채 그대로 나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뭐라고 할 새도 없이, 그는 내 어깨를 잡고 내 얼굴을 자신의 얼굴 바로 앞까지 데려왔다. 난 타케루 군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얼굴이 또다시 새빨개지는 것을 느꼈지만, 뿌리칠 수도, 뿌리치고 싶지도 않았다. 


내 앞에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타케루 군의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갓 구워진 빵의 달콤한 향기가 온 집을 뒤덮고 있었지만, 마치 그것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우릴 감싸돌고 있는 것 같았다.


간신히 고개를 든 나를 버선발로 맞이한 것은 맑은 바다만큼 새파란 그의 눈이었다.

그 순간이 영원 같았다. 심장은 이렇게나 빨리 뛰는데, 시간은 왜 멈춰버린 걸까.


그리고 시간은, 멈춰버린 것 만큼 갑작스럽게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날 바라보던 타케루 군이 씨익 웃더니, 생크림이 묻은 자기 코를 내 코에 비볐다.


"에에엣?"


망상에서 빠져나온 나는 한발짝 뒤로 물러섰고, 곧 내 코에도 생크림이 묻었음을 깨달았다.

아직도 얼굴이 새빨개진 상태로, 나 또한 무의식적으로 내 코를 내려다보려고 애썼다.


웃음을 참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타케루 군이 푸핫- 하고 크게 웃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내가 타케루 군을 놀리던 그 행동을 내가 그대로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타케루 군-!"


홍당무처럼 벌개진 내 얼굴을 생크림을 닦을 타월 뒤에 허겁지겁 숨겼던 나는, 곧 눈에 눈물을 머금고 웃고 있던 타케루 군을 바라보았다.


무슨 연유에선지 난 그런 타케루 군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아니, 생각해보면 알 것 같았다. 저 장난기 가득한 희망찬 웃음은, 내 기분이 아무리 얼음장 같은 날이라도 따스한 여름 햇빛처럼 날 녹이곤 했으니까.


타케루 군이 곧 웃음을 멈추더니, 나를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이쪽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는 그를 바라만 보고 있을 수 밖에 없는 나. 어쩌면 나, 이 금발의 천사에게 홀린 게 아닐-


"너네 둘 거기서 뭐하냐?"


현관문을 열고 부엌에 서있는 우리를 보고 묻는 타이치 오빠의 목소리에, 나도 타케루 군도 그 자리에서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내가 어버버거리며 할 말을 찾는 동안, 타케루 군이 빠르게 몸을 돌려 타이치 오빠에게로 다가갔다.


"타이치 형! 안그래도 형이랑 얘기하려고 왔죠. 어제 축구 경기를 봤는데..."


"네가 언제부터 축구에 관심을 가졌다고 그래?"


"에이, 다이스케랑 친구 먹은지가 몇년인데, 보기 싫어도 보게 되는걸요!"


타이치 오빠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하게 빠르게 말을 내뱉던 타케루 군이, 나를 바라보며 윙크를 했다. 곧이어, 거의 끌려가는 오빠와 아직도 말을 멈추치 않은 타케루 군은, 오빠의 방 안으로 사라졌다.


그런 그를 보고 있자니, 웃음이 터져나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정말, 못말린다니까."


나, 어쩌면 홀려버린게 맞을지도.


비록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타케루 군, 나, 용기를 내 볼게.

타케루 군이 내 앞길을 밝혀주는 희망의 등불인 것 처럼,

타케루 군을 비춰주는 하나의 빛이 될 수 있도록.


그와 나- 

너와 나.


함께 나아갈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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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스케 - 용기를 이어받은 아이들에게

2015년 2월 5일


가끔 타이치 형은 그런 말을 한다- 자기는 이미 한 물 간 몸이라고.


물론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타이치 형은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의 표본인걸.


형처럼 되고 싶어서 고글을 썼고, 

형과 친해지고 싶어서 축구를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의 모험이 시작된 그 날- 

타이치 형은 형의 고글을 나에게 물려주었다.


형의 뒤를 이어 이 세계를 구하기 위해 선택받은 아이.

그때는 좋아라 하고 무작정 쓰고 다녔지만,

그 고글의 의미는 단순히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형은 고글을 통해 나에게 형의 역할만을 물려준 게 아니었다.

리더로써의 자질, 친구들을 생각하는 마음... 


그리고 그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용기.


그 고글은 알게 모르게 모두에게서 배운 모든 것을 상징하는 물건이었다. 


언젠가 미래에 내가 아들을 낳는다면, 그 아이에게도 이 고글을 물려주고 싶다.

형이 이 고글을 통해 내게 가르쳐 준 것을 내 아들에게도 가르쳐 주고 싶은 걸.


타이치 형은 한 물 간 사람이 아니다.

우리를 위해 길을 내어준, 선구자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나 또한, 다음 아이를 위해 그 길을 열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어느 세대든, 어느 시간이든.

뒤는 생각하지 마. 우리에게 맡기고, 너희는 앞만 보고 달려라.


용기를 이어받은 아이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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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이바 메모리얼 - The Olden Days

2015년 8월 1일



시끌벅적한 집을 뒤로 하고창문 밖을 바라보는 야가미 타이치는 감상에 젖어있었다시끄럽게 울어대는 매미와 푸르디 푸른 여름 하늘을 새빨갛게 불태우고 있는 노을지나가는 사람들은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아내며 바삐 걸음을 옮기고 있었지만타이치만은마치 이 더위마저도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 없다는 듯느긋하게 바깥을 바라봤다-


오빠계속 거기 멍하니 있을거야오븐에 있는 거나 좀 꺼내줘!”


바라보고 있었다, 겠군.

 

야가미 타이치의 자취방은 주로 무척이나 조용한 편이었다특히대학생까지 같은 집에 살던 그의 친구이시다 야마토가 졸업 후 얼마 되지 않아 결혼을 한답시고 떠난 이후로 말이다사사건건 쓸데없는 것 가지고 말다툼하는 것도어떤 스포츠 경기를 볼 것인지 리모콘을 두고 싸우는 것도야마토가 유난히 깔끔을 떨며 축구 경기에서 돌아온 타이치를 억지로 화장실에 밀어넣는 것도가끔은그리울 정도로 조용해진 자취방에는 타이치만이 남아있었다.


아구몬이 있었다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겠지.


허나 디지몬의 존재가 전 세계에 알려지고 디지몬과의 삶이 조금씩 더 일상화되고 있었다 하더라도현실 세계에서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그들은 끊임없이 디지털 세계와 왕래를 해야만 했고모든 시간을 그들의 인간 파트너와 보낼 수 없었다.


그렇기에 타이치의 일상은 조용하고 지루한 편이었다-


오늘을 제외하고.



***



오빠청소는 다 한거야?”


타이치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쿠키를 오븐에 꺼내서 식탁 위에 올려놓고몰래 쿠키 하나를 집어먹으려 하는 그 순간담청색 앞치마를 하고 있던 그의 여동생야가미 히카리가 돌아보며 말했다.


.. 아아대강...?”


또 그냥 옷 같은거 대강 침대 안에다가 쑤셔넣은 건 아니지?”


...”


정말사람이 몇명인데최소한 깨끗한 척이라도 해야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히카리가앞치마를 벗고는 부엌을 나섰다그녀를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한 타이치는 다시 쿠키에 손을 대려고 했지만갑자기 히카리가 얼굴을 쑥 내밀더니입을 열었다.


아참오빠오므라이스라도 좀 해줄래그런 건 오빠 전문이잖아?”


재빠르게 손을 다시 등 뒤로 숨긴 타이치는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냉장고를 열어 계란을 서너개씩 꺼내기 시작했다.


원래 히카리는 타케루 그리고 미야코와 함께 다른 사람들처럼 8시에 도착했어야 했다하지만 아이들이 모이기로 한 곳이 타이치의 집 차례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만만했던 타이치는정작 당일이 되자 패닉에 빠져 동생에게 구조 요청을 했고결국 히카리가 먼저 와서 준비를 도와주고 있었다.


초등학교 때 이후로 전혀 실력이 녹슬지 않은듯한 솜씨로 능숙하게 오므라이스를 준비하던 타이치는좌르륵 차려져 있는 음식들과 몇달만에 깨끗해진 집을 보며얼굴에 호선을 그릴 수 밖에 없었다.


모두가 한 자리에 모이는 게 얼마만이던가.



***



딩동-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은다름아닌 시간 약속 잘 지키기로 유명한 히다 이오리였다이제 훤칠한 남자가 되어있는 그는법대생답게 각이 맞춰진 깔끔한 정장을 입고 문 앞에 서 있었다.


아직 7시 반밖에 안됐는데 말이지,”


한손에는 후라이팬을한손에는 전화기를 들고 있던 타이치가 흔들리는 눈으로 아직 정리가 덜 된 집을 둘러보며 말하자이오리는 웃음을 터트렸다.


걱정 마세요타이치 상저도 도와드릴게요.”


외투를 벗어 걸어놓고 가방을 내려놓은 그는곧이어 가방에서 샴페인을 꺼냈다.


어머이게 뭐야이오리 군?”


멍하니 있다가 올려놓은 볶음밥을 태울 뻔한 타이치가 허겁지겁 부엌으로 돌아간 사이이오리를 맞이하러 나온 히카리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이거요돔 페리뇽(Dom Pérignon) 이라고 해서요아는 선배가 선물로 준건데- 1999년산이래요선배들이 처음 모험했던 년도에 만들어진 샴페인이라니괜히 딱 맞는 거 같아서요.”


그러게어울리는 걸.”


딩동-


히카리와 이오리가 그렇게 소소한 잡담을 나누는 동안도어벨이 다시 울렸고그들이 돌아보기도 전에 후라이팬을 든 타이치가 거의 미끄러지듯이 다시 뛰어나왔다마지막까지 해야할 일이 많음에도집 주인인 자신이 문을 열어줘야 한다는 강박관념이라도 있는 것처럼.


하하하... 꼴이 왜 그래타이치 오빠.”


늘상처럼 화려한 옷을 입고 있는 갈색 머리의 여성과동그란 안경을 쓰고 긴 보라색 생머리를 곱게 단장하고 온 조금 더 어린 여성타치카와 미미와 이노우에 미야코.


그게-“


얘기도 하기 전에신발을 벗고 타이치를 빠르게 지나친 미미는히카리를 꼬옥 껴안고 큰 소리로 뭐라고 말하기 시작했다멍하니 서있던 타이치는곧이어 미야코에게 인사를 건네고는다시 부엌으로 사라졌고한바탕 웃음을 터트린 미야코도 집 안으로 들어와 이오리히카리 그리고 미미가 모여있는 거실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까타케루 군은?”


뭘 사갖고 온다고 나갔는데 줄이 길어졌다나봐그래서 먼저 오는 와중에 미미 상을 만났지 뭐야!”


그래 그래사갖고 온다고 하니까 말인데나도 뭘 갖고 왔거든-“


미미가 꺼내든 것은아이들에게 맞게 화려한 포장지로 뒤덮혀져 있는, 자신의 친필 사인이 일일히 적혀져 있는 그녀의 요리책이었다.


미미 상-“


어머머내가 아무한테나 사인을 해주는 줄 아니?”


미미가 이오리의 등을 장난스럽게 때리며 웃었다.


이렇게 젊을 때 요리로 성공한 사람 많지 않다구다들 우리 어머니의 비법을 정말 좋아하더라니까다음 달에는 TV 쇼에도 나가는 걸이왕 이렇게 된 거나도 연예계나 진출해 볼까?”


모두가 한바탕 웃은 후에간신히 숨을 고른 히카리가 미야코에게 다시금 물었다.


아참켄 군이랑은 요즘 어때?”


얼굴이 확 붉어진 미야코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세번째로 도어벨이 울렸다.


좀 8시 딱 맞춰서들 오면 어디 덧나냐!”


왜인지 입에 김을 물고 있는 타이치가투덜대며 뛰쳐나와 문을 열자그 앞에는 그의 소꿉친구 타케노우치 소라와 (아니이젠 이시다 소라겠지),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있던 그의 옛 룸메이트이시다 야마토가 씨익 웃고 있었다.


이야여기 오랜만인걸?”


야마토 데리러 올때랑 어쩜 바뀐 게 없어타이치.”


소라가 웃으며 말하자타이치는 눈을 굴리며 물고 있던 김을 입에 쑤셔넣었다.


일찍도 왔네.”


그럼요리고 뭐고 다 맡겨두라고 자신감 넘치던 네가 얼마나 잘 하고 있는지 일찍 와서 봐줘야 하지 않겠어,”


야마토가 집안을 둘러보며 말하고는장난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그렇게 자신만만하더니만신창이가 따로 없구만타이치.”


다시 한번 눈을 굴린 타이치는말 없이 그들을 거실로 안내했다.



***



"다들 정말 오랫만이야,"


자신을 보고 한걸음에 뛰쳐나온 미미를 껴안은 소라가 자신을 보고 반가워하는 다른 아이들에게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했다.


"거의 반년 만인가요,"


막 미야코와 인사를 나누던 야마토에게 이오리가 얼굴에 호선을 그려보이며 다가가자, 야마토는 머리를 긁으며 멋쩍은 표정으로 답했다.


"그러게 말야. 결혼식 이후로 처음이지? 신혼생활이라는 게 쉽지가 않네."


"하하, 아무래도 그렇죠. 별 탈 없으시구요?"


"뭐, 여기 나타난 거 보면 모르겠어?"


야마토와 이오리는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고, 간신히 미미를 떼어놓은 소라가 그들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짜증이 얼굴에 가득한 타이치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이봐, 일찍 와서 빈둥거리고 있는 사람들, 이거 식탁 차리는 거랑 청소랑 좀 도와줘."


"어머? 빈둥거리다니, 우린 손님 아니었어?"


"그래 오빠, 게다가 이오리 군이 오기 전까지 빈둥거리고 있었던 건 오빠였잖아?"


미미의 일침과 그녀를 뒷받침해주는 히카리의 말에 타이치는 뭐라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가 뭐라고 했는지 묻기도 전에, 타이치의 패닉 상태를 가장 먼저 알아차린 소라가 대신 나서 아이들을 정리해주었다.


"자 자, 그러지 말고.여자들은 집 청소 마무리하는 걸 도와주고, 남자들은 타이치를 도와서 부엌 세팅을 도와주는 게 어때?"


아이들은 제각각 고개를 끄덕이거나 알겠다는 말을 중얼거렸고, 곧이어 각자 도맡은 일이 있는 곳으로 흩어졌다.


"아참, 저 가방은 뭐에요, 소라 상?"


쓰레받기를 집어든 미야코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아, 저거? 안그래도 전에 얘기했던 것 같은데, 어머니의 꽃꽃이 학원을 물려받게 되었거든. 계속 패션 쪽을 공부할 생각이지만, 틈틈이 꽃꽃이도 배운 김에, 너희들에게 꽃이나 선물할까 하고."


꽃이라는 말에 들뜬 미미와 미야코가 청소는 뒷전으로 미루고 뭐라고 얘기하는 동안, 히카리는 소라에게 다른 질문을 했다.


"그럼 둘이서 꽃을 골라온 거에요?"


하. 하고 콧바람을 내뿜은 소라는 대답 대신 야마토가 가져온 기타를 가리켰다.


"저게 야마토 오빠가 가져온 선물...?"


"그래!"


식탁을 차리던 야마토가 한 손에는 칼을, 다른 한 손에는 그릇을 쥐고 있는 상태로 얼굴을 내밀며 외쳤다.


"내 노래야말로 가장 최고의 선물 아니겠어?"


"허이고, 가수 때려치고 물리 공부한다던 놈이 노래는 무슨."


쟁반을 들고 부엌에서 나오던 타이치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와인 잔을 사람 수에 맞게 내려놓던 이오리가 큿 하고 웃음을 터트렸지만, 곧이어 야마토가 다시 식탁 쪽을 바라보자 헛기침을 하고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와인 잔에 열중했다.


"다 기억하고 있네? 날 그렇게 그리워하는 줄은 몰랐는데."


야마토가 씨익 얼굴에 호선을 그려보이자, 타이치는 그런 그를 바라보며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워하긴, 너 없어서 얼마나 조용한지 몰라."


"결혼식 때 울었던 게 누구였더라?"


"안울었거든?!"


"그냥 인정해, 타이치. 너 이런 시끌벅적한 일상을 그리워하고 있었잖아?"


하지만 타이치가 야마토의 다 알겠다는 말투에 뭐라고 반박하기도 전에 또다시 도어벨이 울렸고, 타이치는 고개를 저으며 현관문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리워했던 게 확실하네요."


이오리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어..."


할말을 잃은 듯 쟁반을 들고 서 있는 타이치 앞에는, 하얀 밀가루 비슷한 것을 뒤집어 쓰고 있는 죠와 한 손에는 케잌을, 한 손에는 노트북을 들고 있는 코시로가 있었다.


"안 들여보내줄 거에요, 타이치 상?"


"아, 응, 아니, 이게 무슨 상황인가 머릿속에서 정리가 안되서..."


하지만 대답 대신 돌아온 것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코시로의 무언의 "물어보지 마세요" 였다.


"오 코시로, 안녕! 오랫만이다. 그리고 죠...?"


현관문 앞의 인물을 맞이하기 위해 나온 야마토마저도, 멍하니 죠를 쳐다보기만 했고, 이어 나타난 여자아이들도 다들 "어떻게 된거야?" 따위의 단말마만을 내뱉을 뿐이었다.


결국, 청소를 끝마친 여자 아이들과 마지막 세팅을 하는 타이치를 제외한 남자 아이들이 옹기종기 마루에 모여 죠의 자초지종을 듣기로 했다. 


죠의 이야기와 코시로의 부연 설명을 듣고 나니, 죠는 이 날을 위해 베이킹 레슨을 받았던 것 같았다. 그리고 배운 대로 케잌을 만드려 했으나 무언가 잘못돼도 엄청 잘못되었고, 결국 밀가루 폭탄이 된 집을 청소하느라 시간을 보낸 죠는 늦을까봐 샤워도 하지 못하고 나왔다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케잌을 사러 간 그는 마침 디저트라도 사가려고 줄을 서 있던 코시로와 만났고-


"그렇게 50분에 아슬아슬하게 세이프했다- 이 얘기야.. 어이, 듣고들 있어?"


죠가 되물었지만, 아이들은 모두들 숨 넘어갈 듯 웃느라 그의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했다. 모두가 진정되고 나자, 야마토가 일어나며 너스레를 떨었고-


"흰 가운 입으려고 공부하는 건 알겠는데 말야, 죠, 머리까지 흰색으로 염색할 필요는 없잖아?"


- 아이들은, 죠를 포함해서, 모두들 다시 웃음바다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


모두가 웃음을 멈추는데는 꼬박 5분이 넘게 걸렸다.


여자 아이들은 죠에게 씻으라며 그를 화장실로 밀어넣었고, 그 순간 도어벨이 오늘만 다섯번째 울렸다.


죠가 사온 케잌까지 모든 준비를 딱 8시 정각에 끝낸 타이치가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일어섰지만, 정작 문을 연 것은 야마토였다.


그리고 그 열린 문 앞에는,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친절과 희망의 소유자, 이치죠우지 켄과 타카이시 타케루가 서 있었다.


"안녕, 형. 딱 8시네- 아슬아슬했어."


그들을 맞이하려는 야마토와 무언가를 말하려는 켄이 동시에 입을 열었지만, 가장 먼저 말을 한 것은 타이치였다.


"뭐 하는 거야, 야마토, 문은 내가 연대도!"


"큭, 너 그 책에서 읽은 집 주인이 꼭 손님을 맞이해야 한다인지 뭔지를 아직도 따르고 있는거냐? 내가 한번쯤 열 수도 있지!"


"그럼 집주인이 문을 열지 그럼-"


"나도 전에 여기 살았었었다고? 그렇게 치면, 나도 집주인이거든-"


"집주인 였었다 겠지."


"저..."


그 둘의 말다툼이 마침내 멈춘 것은, 고개를 흔들고 있는 타케루 옆에서 머리를 긁적이고 있던 켄이 마침내 입을 열었을 때였다.


"언제까지 둘을 문 앞에 세워놓을 거에요, 타이치 상, 야마토 상?"


보다못해 일어난 코시로가 벌떡 일어나 모세의 기적을 행하듯 그 둘을 갈라놓았고, 도착한지 5분만에 켄과 타케루는 간신히 집 안에 들어올 수 있었다.


"이게 뭐야, 타케루 군?"


마루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아이들 사이로 타케루가 앉고서는 쇼핑 백을 내려놓자, 히카리가 물었다.


"아, 이거. 이걸 사오느라 늦었는데 말이지. 실은-"


하지만 타케루의 다음 말은 미미의 목소리에 곧 파묻히고 말았다.


"자리도 많은 데 굳이 미야코 옆에 앉네? 이야, 좋을 때다 좋을 때야~"


그녀의 말에 모두들 켄과 미야코에게로 시선이 쏠렸고, 급격하게 붉어지는 커플의 얼굴에 아이들은 또다시 폭소를 터트렸다.


웃음소리가 조금씩 잦아들고 나자, 타케루는 다시 자신이 늦은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여하튼, 그게, 백화점에서 아주 맘에 드는 목걸이들을 봐서. 각자의 디지바이스 색깔로 내가 하나씩 맞춰왔지."


타케루는 별이나 각기 다른 문양이 새겨져 있는 형형색색의 목걸이를 하나씩 아이들에게 나누어 줬고, 아이들은 목걸이를 차 보며 타케루의 패션 초이스를 칭찬했다.


"물론, 초등학교 때의 그 벙거지 모자는 빼고 말야."


히카리가 한쪽 눈을 찡긋하면서 얘기하자, 아이들은 누구랄 것 없이 웃음을 터트리며 각자 어렸을 적의 패션 센스에 대해 얘기하며 웃기 시작했다-


자신의 오렌지색 목걸이를 들어보이며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타이치를 제외하고 말이다.


"음식 다 식겠는데, 다이스케 놈은 어딨는거야?"



***



모토미야 다이스케가 타이치의 집에 도착한 것은 약속 시간이 무려 15분이나 지난 후였다.


"좋았어! 무사히 시간 안에 도착!"


머리에 쓰고 있던 고글을 목에 걸쳐놓고는 땀을 닦은 붉은 머리의 남성이 말했지만, 그가 문 앞에서 받은 대답은 싸늘한 타이치의 표정 뿐이었다.


"너 왜이리 늦었냐."


"아? 아니 뭐, 맞춰 왔잖아 선배-"


"15분이나 늦었잖아!"


"에이 뭐 다 온 것도 아닌데 마지막만 아니면 됐.."


다이스케는, 타이치 뒤로 마루에 옹기종기 앉아있는 사람들의 수를 빠르게 세 보더니, 자신이 마지막임을 알아차리자 말끝을 흐렸다.


"내가 언제부터 준비를 끝마치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너 8시 정각에 아슬아슬하게 끝냈잖아, 타이치."


웃음을 참지 못한 아이들을 뒤로 하고, 타이치는 죠를 돌아보며 무표정한 눈길을 보냈지만, 죠는 그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멍하니 서있는 다이스케를 돌아보며 한숨을 쉰 타이치는, 곧 호탕하게 웃으며 헤드락을 걸고는 그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하여간, 짜식, 변한게 없어!"


아,아,아- 하고 고통에 몸부림치던 다이스케는, 타이치가 웃음을 멈출 때까지 타이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그러면, 사과의 의미와 내 선물로, 이 몸의 특제 라멘을 만들어줄게!"


쓰라린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이스케가 말하자, 그의 실력을 익히 알고 있던 아이들은 환영의 박수로 대답을 대신했다.



***



켄의 라멘과 코시로의 라멘이 바뀌는 불상사를 제외하고는 (둘은 맛의 특별한 차이를 못 느끼겠다고 했지만, 다이스케는 모두에게 딱 맞는 라멘을 만들었다며 그 둘이 라멘을 바꿀 것을 박박 주장했다.) 아이들의 저녁은 순조롭게 흘러갔다. 히카리가 만든 반찬들과 타이치 표 오므라이스 및 각종 음식들, 그리고 다이스케의 "특제" 라멘은 굶주렸던 아이들의 배를 채우는 데 충분했다.


각자 서로와 만나지 못한 동안의 갭을 추억과 웃음으로 채우는 동안, 밥은 빠르게 사라졌고, 히카리의 쿠키, 코시로의 과자와 죠의 케잌을 먹으며 왁자지껄 떠들고 있을 때, 샴페인을 따서 한명씩 따라준 타이치가 포크로 자신의 샴페인 잔을 두드리며 아이들의 관심을 모았다.


"어디서 본 건 있으시네요."


"시끄러, 코시로. 에헴, 여하간에. 우리가 올해에도 매년처럼 8월 1일에 모였고, 이오리 덕에 이 날을 기념할 수 있는 술도 있겠다, 모두 건배하기 전에 한마디씩 하는게 어떨까 해서."


아이들이 다들 좋은 생각이라고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타케루 옆에 앉아있던 히카리가 그를 보며 말했다.


"우리 글 쓰는 타케루 군, 이럴 때 쓸만한 뭐 멋진 말 없어?"


아이들의 시선이 타케루에게 쏠렸고, "선생님 답네," 라고 말하며 웃은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잔을 올리며 말했다.


"우리의 관이 100년 된 참나무로 만들어지기를, 그리고 우리가 그 나무의 씨앗을 내일 심을 수 있기를."


"멋진 말이네,"


소라가 말하자, 씨익 웃은 타케루는 "아일랜드에서 건배할 때 하는 말이에요. 우리의 모든 것이 오래가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라고 말하고는 자신의 오른쪽에 앉아있던 다이스케를 바라보았다.


"자, 그럼 다이스케 군부터 한명씩 해보는게 어때요? 시계방향으로 돌아서 타이치 형이 마지막으로 끝내면 되겠네."


"왜 내가 처음이야? 지는 멋진 말만 다 해놓고."


다이스케가 투덜거렸지만, 곧이어 그의 잔을 치켜들었다.


"우리의 변치 않을 우정을 위하여."


"우리의 건강을 위하여."


죠가 안경을 고쳐쓰고, 잔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우리의 미래를 위하여."


이미 반쯤 취한 듯한 표정의 미미가 외쳤다.


"우리의 아이들을 위하여."


소라와 야마토가 서로를 바라보며 웃으며 말했다.


"디지털 세계를 위하여."


미소를 잃지 않은 코시로가 잔을 들어올렸다.


"절대 잊을 수 없는 모험을 위하여."


샴페인의 주인인 이오리가 나지막하게 얘기했다.


"우리의 사랑과-"


미야코가 말을 시작하자,


"- 인연을 위하여."


켄이 문장을 끝마쳤고, 그 둘은 잔을 천천히 들었다.


"디지몬들을, 우리의 파트너들을 위하여,"


히카리가 말했고, 모든 시선은 이제 타이치에게로 옮겨갔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우리 모두를 위하여. 건배!"


타이치의 말과 함께 아이들은 모두 샴페인을 일제히 원샷하기 시작했다- 무언가에 시선이 고정된 미미를 제외하고.


샴페인을 마시고 켄을 바라보며 웃고 있던 미야코는, 곧 컵을 입에 반쯤 가져다 대고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미미를 발견했다. 허겁지겁 자신의 손을 뒤로 숨긴 그녀는, 불안한 표정으로 미미를 바라봤지만, 이미 늦은 듯 했다.


"없었었는데."


탁! 하고 잔을 내려놓은 미미가 중얼거리더니, 미야코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거 맞지?"


 "하.. 하하, 뭐가요 미미-"


"아냐?"


모두의 시선이 미야코에게 쏠렸고, 그들은 그녀의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리며 이 상황을 벗어나려 애쓰는 것을 보았다. 그녀의 눈의 종착지는 켄이었고- 그의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한 손짓을 본 미야코는 마른 침을 삼키더니 미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미가 소리를 지르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 미야코를 끌어안는데는 채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곧이어 소라 또한 당황스런 표정을 하고 있는 야마토를 내버려두고 환하게 웃으며 미야코에게 다가갔고, 서로 눈길을 주고받던 타케루와 히카리는 일어나선 켄에게 다가가 그를 반쯤 자리에서 끌어올리다시피 해서 껴안았다.


"왜 일찍 얘기 안했어!"


"이럴 줄 알았으면 뭐라도 사오는건데!"


여섯명이 그런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나머지 여섯명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있었다. 


타이치는 이 상황을 설명해줄 사람을 찾고 있었지만, 그의 여동생과 소꿉친구는 켄과 미야코를 붙잡고 있느라 바빴다- 곧 그의 눈길이 다이스케를 향했지만, 그는 타이치 자신보다 더 당황해 하는 것 같았고, 죠, 코시로 그리고 이오리를 지나 야마토에게 시선이 다다랐으나, 야마토 또한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도대체 세 마디 하고 뭘 어떻게 알아차린거야?"


타이치가 미미를 향해 물었지만,  그녀 대신 대답한 것은 이제 소라와 미미와 자리를 바꿔 미야코를 축하하고 있던 타케루와 히카리였다.


"다들 참, 왜 이렇게 눈치가 없어."


히카리가 웃으며 말하자, 타케루는 "형." 이라고 말하고는 조그마한 다이아가 박혀있는 반지를 약지에 끼고 있는 미야코의 손을 들어올려 보였다.


멍하니 있던 죠, 이오리와 야마토는 그제서야 알아차렸다는 표정과 함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지만, 타이치, 다이스케 그리고 코시로는 아직도 무지의 어둠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했다.


"그래서, 반지가 뭐? 야마토, 도대체 뭔데? 설명이라도 좀 해줘봐!"


"저게 아무 반지로 보이냐? 켄도 끼고 있잖아!"


"그래서 뭐?"


그 때, 미야코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서- 서프라이즈..?"


하지만 삼총사는 아직도 감을 잡지 못한듯 했고, 죠와 악수하고 있던 켄이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그들을 향해 얘기했다-


"저희 내년에 결혼해요."



***



"왜 얘기를 안해준거야?"


마지막으로 일어나 켄과 미야코를 껴안은 타이치가 물었다.


"그게, 뭐, 실은 오늘 얘기하려고 했거든요."


"그래서 깜짝 놀래켜줄라고 반지도 안끼고 왔는데. 샴페인 다 마시고 할라고 생각해서 일찍 꼈다가 그만 미미 상한테 들켜버리고 말았지 뭐에요."


"역시, 그래야 미미답지."


크게 웃은 타이치가 말하고는, 두 커플을 다시금 축하해주었다.


"이제 우리 내에 부부가 두 쌍이나 되는건가,"


샴페인을 들고 있던 야마토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러게. 너희가 대학 졸업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결혼한다고 했을 때 적잖이 놀랐는데 말이지."


과자를 집어먹은 죠가 웃으며 입을 열자, 다이스케와 타이치 또한 동의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우리들도 얼마 안남았으려나,"


켄 옆에 서있던 타케루가 웃으며 말했고, 그런 타케루를 바라보며 짖궃은 표정을 지은 야마토가 뭐라고 말하려 했으나, 곧 소파에 앉아 열심히 노트북을 두드리던 코시로의 외침에 묻히고 말았다.


"여러분, 잠깐 이리로 모여보실래요?"



***



아이들이 모두 마루에 모인 것을 확인한 코시로는, 노트북을 소파 옆에 내려놓고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켄과 미야코의 결혼 축하 기념, 그리고 우리의 첫 모험 기념으로, 제가 준비한 깜짝 선물을 공개할까 하는데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아이들을 뒤로 하고, 노트북에 무언가를 입력한 코시로는, 엔터 키를 눌렀다. 그러자 노트북이 환한 빛을 내기 시작했고-


"코로몬!"


"플롯트몬!"


"치비몬!"


-디지털 세계로 가는 문이 열리더니, 그들의 디지몬 파트너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어떻게 된 거에요, 코시로 상?"


토코몬을 끌어안은 타케루가 묻자, 모티몬을 쓰다듬던 코시로가 웃으며 말했다.


"오늘을 위해서 겐나이 상한테 연락했죠. 서로 못본지 몇 달 되기도 했구요. 이런 날에 만나지 않으면 또 언제 만나겠어요?"


그랬다. 지금 이들이 이 곳에 있는 이유도, "선택받은 아이들"로써 디지털 세계에 가게 된 것도 결국은 모두 그들의 디지몬 파트너가 있었기 때문이었으랴. 그러니 그들의 모험을 기념하는 오늘같은 날에- 디지몬들이 없어서야 되겠는가?


"수고했다, 코시로."


늘상처럼 자신의 얼굴에 달라붙은 코로몬을 간신히 떼어낸 타이치가, 코시로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별 말씀을요."


다시 미미의 얘기를 들으려 고개를 돌리는 코시로를 뒤로 하고, 타이치는 자신의 거실을 둘러보았다. 자신까지 열두명의 아이들과 열두명의 디지몬들. 조용하기만 했던, 축구 경기 해설만 흘러나오던 그의 거실이 지금은 북적대며 각기 자신들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었다.


평생 변치 않을 친구들, 그리고 생사고락을 함께한 파트너들. 모두들 용기로, 우정으로. 사랑으로, 순수로. 지식으로, 성실로. 빛으로, 희망으로, 친절로- 하나되어 역경과 고난을 뚫은 둘도 없을 존재들.


타이치는 요 근래 이렇게 기분 좋았던 적이 없었다. 세상만사 모든 것이 잘 풀릴 것 같은 느낌. 마치 포근한 구름을 침대삼아 하늘이라는 사파이어빛 바다를 유유히 떠다니는 것 같이, 들뜬 기분은 정말 오랫만이었다.


마치, 초등학교 때의, 중학교 때의, 고등학교 때의 자신들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것만 같은 이 밤은, 그에게 절대 잊지 못할 하루가 될것만 같았다.


"뭘 그리 골똘히 생각해, 타이치?"


타이치의 품에 안겨 있던 코로몬이 묻자, 자신만의 생각에서 벗어난 타이치가 코로몬을 내려다보았다.


"아니, 그냥. 옛날 생각도 나고, 좋아서."


"모두가 모이는게?"


"그래. 이게 얼마만인지... 다들 보고 싶었는데 말야."


"나도 보고 싶었어, 타이치!"


자신의 얼굴에 또 달라붙으려는 코로몬을 간신히 막은 타이치는, 웃으며 잔에 샴페인을 한 잔 더 따랐다. 


완벽한 날이로군.


"야마토."


츠노몬에게 남은 밥을 먹이며 켄과 대화하고 있던 야마토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봤고, 거기엔 머리를 쓸어넘기고 있는 타이치가 서 있었다.


"네가 맞았어."


"내가 뭘?"


얼굴에 큰 호선을 그린 타이치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내가 이 모든 걸 그리워했다는 거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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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octor B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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