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몬'에 해당되는 글 49건

  1. 2018.08.16 타이야마 - 애칭 by Doctor Box 1
  2. 2018.06.01 야마토 - Space Oddity by Doctor Box
  3. 2017.08.02 타케히카 - 지금 여기서 by Doctor Box
  4. 2017.07.22 23.5 - 한여름, 그대는. by Doctor Box
  5. 2017.06.25 타이야마 - 눈치게임 by Doctor Box
  6. 2017.05.12 타이야마 - 달 by Doctor Box
  7. 2016.10.15 겹사돈 - 놀이공원 by Doctor Box
  8. 2016.08.14 [디오케/06b] 타케히카 소설북「23.5」 by Doctor Box 37
  9. 2016.04.06 야마소라 - 꽃말 by Doctor Box
  10. 2016.02.21 다이켄 - 새벽 by Doctor Box

"대화 좀 하자."


입이 찢어질 듯 하품을 하며 강의실을 나선 이시다 야마토는 무슨 일이냐고 물을 새도 없이 남자친구에 손에 이끌려 학교를 떠났다. 늘 웃는 모습을 보이던 천하의 야가미 타이치가 저렇게 심각한 표정으로 자신을 데리고 가고 있으니, 무슨 일이 나도 단단히 난 모양이었다. 설마-


"우리, 애칭이 필요해."


는 개뿔, 이게 뭔 개소리야?



***



"그러니까, 꽁냥거리고 싶으신데 내가 성격이 더러워서 못했었으니 이 기회에 좀 해보자?"


"어우, 돌직구 너무 묵직한 거 아니냐?"


그럼 그렇지.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타이치는 동생들의 연애가 부러운 모양이었다. 케루 군이니, 나의 천사라느니, 듣기만 해도 괜히 소름이 끼치는 호칭들로 서로를 부르는 걸 보고 있자니 자기도 그런 연애를 내심 해보고 싶었던 건지 뭔지. 한 때는 자기네들도 손만 잡아도 얼굴이 벌개지는 시절이 있었더랜다-- 그런데 이제 연애한지 5년이 다 되어가는데, 이제 와서 무슨 애칭이란 말인가.


그렇지만 사귄 시간이 긴 만큼 야마토는 타이치가 어떤 녀석인지 잘 알았다. 매사에 진지한 구석이라고는 없어 보이지만 속은 깊고, 진중할 때는 진중한 놈. 한 번 꽂힌 것은 어떻게든 해내고자 하는 놈. 그러니까 문제였다. 그나마 애칭에 꽂힌 게 다행이지-- 동생들이 하는 다른 짓에라도 꽂혔으면 어쩔 뻔 했나.


"하... 그래, 그래서, 뭐, 무슨 애칭을 원하는데? 자기야 라고 불러주랴?"


"에이, 그런 건 너무 식상하잖아. 뭔가 우리끼리만의 그런 게 없을까? 그래, 히카리가 타케루를 줄여서 케루라고 부르고 막 그랬잖아, 그럼 너는 야마 어때?"


"너 때문에 야마 돈다 진짜..."


"그럼 네가 뭐라도 좀 생각해봐!"

"아니 네가 다짜고짜 시험 공부때문에 밤을 샌 사람을 끌고 나와서는 헛소리를 했는데, 왜 내가 그걸 생각해내야 하는건데?"


"야마토니까, 음, 야.. 마토... 매튜는 어때? 바다 건너에서도 잘 먹히던데."


"네타 발언 하지 마라..."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지났다-- 시간 없다고 나중에 얘기하자고 그 자리를 뜬지 나흘. 하지만
타이치는 굴하지 않았다. 일본이 한 때 해가 뜬다는 뜻의 야마토라는 이름의 왕국이기도 했으니, 나의 세계는 어떻겠냐는 소리를 했다가 두들겨 맞았는데도, 저 놈의 고집은 굽히질 않았다.


게다가 이 빌어먹을 고집은 더 이상 자신들만의 이야기로 끝나질 않았다. 이틀 전에는 새벽에 미미가 갑자기 "생각났다! 야'가미'() 니까 나의 신님이라고 부르는거지" 라고 오질 않나, 어제는 타케루와의 저녁 약속에서 타케루가 도통 말을 하지 않고 있길래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더니, 형의 애칭을 히카리랑 함께 계속 고민하고 있었다고 말하지 않던가.


"아예 한 글자로 줄여서, 타이치 형은 타고, 형은 얌이면 어때? 커플링 표기도 그렇게 하잖아."


"나만 빼고 무슨 단체로 네타 발언 약속이라도 잡았니 너넨?"


대체 타이치가 누구한테까지 다 얘기를 하고 다닌건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니 원. 둘이서 이러고 있어도 쪽팔려 죽겠는데, 모두의 힘을 합쳐 이딴 건 다크 마스터즈랑 싸울 때로 족하다고, 진짜.


그래서 오늘. 야마토는 기필코 오늘 어떻게든 승부를 볼 생각이었다.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점심데이트였지만, 분명 타이치는 이 주제를 어떻게든 끌고 올 테니까.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 볼 심산이었다.


"오래 기다렸어, 다이와 군?"


하?


멋쩍은 듯 뒷머리를 긁은 타이치는, 한자로 적은 야마토 (大和)를 음독으로 읽으면 다이와 라고 발음을 하지 않느냐며, 새벽 내내 네 심기를 건드리지 않을 애칭을 생각해 왔다고 했다. 그래, 장하다 장해. 근데 있지...


"내 이름은 가타카나라고 (ヤマト)----!!!!"


"아악 그랬지!!!!!!"


방금 얻어맞은 머리를 쓰다듬은 타이치는 결국 데이트 내내 축 처진 기분을 유지하고야 말았고, 야마토는 괜히 죄책감이 드는 자신을 막을 수 없었다. 그래도 남자친구랑 투닥이는 거 말고도 좀 연인같이 행동해 보겠다고 하는 건데, 너무 화만 낸 게 아닐까? 그래, 이런 게 다 싫은 건 아니니까. 내가 뭐라도 애칭을 하나 생각해보면, 타이치도 기분이 좀 풀리지 않을까.


"그럼 있잖아, 타이치. 그... 우리 문장이 있으니까. 나의 우정, 나의 용기 이런 건 어떠냐?"


"와, 존나 구리다."


아 씨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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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토 - Space Oddity

2018년 6월 1일


노래랑 같이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lton John - Rocket Man



--



She packed my bags last night, pre-flight
그녀는 비행 전날인 어젯밤, 내 짐을 꾸렸어


출발하는 우주선은 늘 바쁜 법이다- 몇 번째 비행이니 익숙해질 법만 한데도 다른 우주 비행사들은 모든 것이 제대로 작동하도록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다양한 버튼을 누르고 있었고, 같이 떠나는 파트너인 가부몬마저도 다른 사람들을 도와 능숙하게 제 할 일을 해내고 있었다.


Zero hour, 9 A.M. and I'm gonna be high as a kite by then
아침 9시가 되면, 난 연처럼 높이 떠 있을거야


이제 어느덧 30대 중반에 접어든 이시다 야마토 또한 첫 비행은 아니었고, 화성에 도착할 때까지 할 일은 너무나도 많았다. 그렇지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동료 비행사에게 다가가기 전에, 야마토는 창문 너머를 흘겨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저 밑에 자신의 배우자가, 친구들이, 아이들이 있을 것이리라. 보이지도 않을, 어쩌면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르는 자신에게 열심히 손을 흔들며.


I miss the Earth so much, I miss my wife
난 지구가 몹시 그립고, 내 아내가 보고 싶어


우주는 경이로운 곳이었다. 대기권을 지나 순조로이 올라가는 로켓 속에서, 야마토는 다시금 그 위대함에 숨을 죽일 수 밖에 없었다. 가만히 옆에 다가와준 가부몬의 손을 잡고, 창문 밖을 내려다 보면 보석처럼 희고 파랗게 빛나는 창백한 별이 보였다. 그들이 반 년동안 돌아가지 못할 고향- 지구.


It's lonely out in space on such a timeless flight
시간을 알 수 없는 비행 속에서의 우주는 외로워


지금쯤 다들 무엇을 하고 있을까? 검은 바다에 수놓아진 밝은 별들을 바라보며 야마토는 사색에 잠겨, 손에 쥔 디지바이스를 계속 만지작 거리고만 있었다. 처음 우주로 떠날 때는 이 공허한 마음을 달래려 기타를 쳐보려도 했지만, 무중력 속에서는 손이 기억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더라. 


And I think it's gonna be a long, long time
내 생각엔 오랜, 오랜 시간이 될 것 같아


부모님이 어릴 적 이혼한 이후로, 야마토는 어린 나이에 어른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디지털 세계에서 모험을 겪으며 성장하고 홀로 설 필요가 없다는 것을 배웠으나, 동생처럼 가족에 대한 열망과 공포를 동시에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시간은 흘렀고, 야마토는 자신의 가정을 꾸렸다. 같이 모험을 겪은 친구와 연인이 되고, 배우자가 되어 이제는 어엿한 아빠가 되었으니.


Til touchdown brings me 'round again to find
다시 집으로 돌아와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제는 추억이 된 고등학교 졸업 시절에는 우주 비행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펼쳐 모두를 놀라게 했었다. 뼈를 깎는 노력을 해야 했지만, 디지몬과 함께 우주로 떠나 새로운 세상을 꾸리고, 그 길을 개척하려 했다. 인류가 천천히 걷고 있던 우주로의 여행에 선두로 서서. 


I'm not the man they think I am at home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때까진 말야


영웅이 되고 싶었냐고 묻는다면, 어쩌면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디지털 세계에서 배운대로 혼자일 필요는 없으니까. 이번에는 자신의 불안함, 외로움을 숨기기 위해 모두를 이끄는 척 하는 것이 아닌, 진정으로 모두를 이끄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Oh, no, no, no, I'm a Rocket Man
절대 아니지, 나는 로켓맨이야


우주는 그런 그에게 무한한 개척지가 되어주었다. 디지몬을 토대로 하는 엄청난 기술력으로 인류는 빠른 발전을 이루었고, 지금 로켓을 타고 화성을 향하는 야마토는 다른 몇 명의 사람들과 함께 화성에 인류의 첫 기지를 세울 예정이었다. 아이들은 아빠가 화성에 간다는 것에 신나했고, 야마토 또한 친구들에게 술잔을 기울이며 자랑스러워 해도 좋다고 너스레를 떨곤 했다. 


Rocket Man, burning out his fuse up here alone
이 위에서 홀로 휴즈를 다 태워 없애는, 로켓맨이야


참 이상하지, 몸을 기대고 꾸벅이는 가부몬을 바라보며, 야마토는 가부몬한테 말하는 것인지, 자신한테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는 듯 중얼거렸다. 지구에 있을 때는 우주에 나오고 싶었는데, 우주에 나오면 지구에 돌아가고 싶으니까 말이야. 입술을 씰룩거려 보지만 코를 통해 내쉬는 숨은 한숨에 가까웠다.


Mars ain't the kind of place to raise your kids

In fact, it's cold as hell
화성은 애들을 키울만한 곳은 아니지- 

사실, 엄청나게 춥기만 해


두려움도, 외로움도 모두 극복해서 가족을 꾸리고 그 가족을 위해 자랑스런 직업을 가지고 하늘 너머로 떠났다 모두 믿겠지만, 점점 멀어만 가는 푸른 별을 바라보는 야마토는 복잡한 심정을 점심과 함께 꾸역꾸역 집어 삼켰다. 외롭기 싫어서 가족을 꾸리지만, 자신의 야망을 위해 선택한 진로로 가족들을 위하려면 다시 외로워져야만 한다. 


And there's no one there to raise them if you did

그렇게 하고 싶어도 아이들을 키워줄 사람도 하나 없어


그래도 가부몬이 있어 다행이었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모든 일을, 모든 행동을 모두 따르겠다고 파트너는 말했다. 그런 그와 함께라면 어떤 임무도 마냥 외롭지만은 않았다. 그렇지만, 가끔, 아주 가끔, 자신을 바라보는 가부몬의 눈동자에서 거울을 보는 듯 쓸쓸함을 읽어낼 때면, 야마토는 가만히 가부몬을 안아주고는 했다.


And all this science, I don't understand
그리고 이 과학들은 다 전혀 모르겠어


우주 비행사란, 경험하지 못한 곳으로 떠나는 존재이다. 삶이 어디로 자신을 데려갈지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인생처럼, 우주 비행사는 반짝이는 도형들과 숫자들을 믿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으로 깊숙히 날아간다. 남들에겐 어쩌면 대단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우주 비행사도, 정치인도, 가수도, 아이들도, 디지몬도 다 같은 존재일 뿐이니까.


It's just my job, five days a week
난 그저 일주일에 5일만 일하면 되지


새로운 별, 새로운 행성. 디지몬들의 도움을 받아 화성 표면에 천천히 기지를 세우며, 야마토는 저 멀리서 파랗게 빛나는 지구를 향해 또다시 눈을 흘렸다. 로켓이 출발할 때처럼, 집을 찾아 돌아가는 철새처럼 그는 계속 그쪽을 향할 뿐이었다. 우주복 신발 밑에서 바스라지는 붉은 토양은 야속할 만큼 빛나기만 했다.


A Rocket Man, a Rocket Man
로켓맨, 로켓맨


따뜻하지만 슬프고, 안락하면서도 우울함이 묻어나는 나날. 외로움이란 술잔을 같이 기울이지만 혼자 앉아 들이키는 것보다는 낫다는 노래 구절을 속으로 읊으며 야마토는 가부몬을 데리고 오늘도 하모니카를 부른다. 이 아름답지만 한없이 두려운 세상에 너와 함께 있어서 그래도 다행이야, 가부몬.


And I think it's gonna be a long, long time

내 생각엔 오랜, 오랜 시간이 될 것 같아


Til touchdown brings me 'round again to find
다시 집으로 돌아와 사람들이 생각하는


I'm not the man they think I am at home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때까진 말야


Oh, no, no, no, I'm a Rocket Man
절대 아니지, 나는 로켓맨이야


Rocket Man, burning out his fuse up here alone

이 위에서 홀로 휴즈를 다 태워 없애는, 로켓맨이야


야마토.
응?

난 야마토와 함께라서 행복해.

나도.

그치만 가끔 모두가 그리울 때가 있지 않아?

응, 가부몬.


And I think it's gonna be a long, long time...
내 생각엔 오랜, 오랜 시간이 될 것 같아...


어서 집에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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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케히카 - 지금 여기서
2017년 8월 3일


*19금 주의*


"음..."


적막이 무겁게 내려앉은 호텔 방 안에서, 대충 걸치고 있는 수건 아래 젖은 래쉬가드를 입은 두 남녀가 어색한 듯 서로의 눈빛을 피했다. 그리고 그런 그들 앞에는, 침대에서 세네 걸음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떡하니 놓여있는 핫터브 느낌의 욕조가 있었다. 침대 옆 욕조라니, 도대체 누가 설계한 거야?


끈질긴 노력 덕에 마침내 타이치에게서 OK를 받아낸 타케루와 히카리의 첫 여행은 역시 바닷가였다. 따가운 햇빛이 내리쬐는 7월, 해수욕장은 비록 더위를 피하려 놀러온 사람들로 붐볐지만, 그마저도 그들에겐 신선하고 좋은 경험일 뿐이었다. 


그래도 성수기는 성수기였을까. 맘에 드는 호텔을 찾으면 방이 없고, 방이 있으면 맘에 들질 않고... 결국 중간에 누군가 취소한 듯한 호텔 방을 불과 여행 하루 전에 부랴부랴 잡았지만, 이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아 예, 죄송하지만 바꿔드릴 수 있는 방이 없어서... 성수기인지라."


참으로 좋은 호텔인데, 도대체 왜 욕조가 침대에서 별로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걸까? 목욕을 하고 나면 침대 및 방 자체가 습해질테고, 왜 애초에 화장실에 있지 않고 방 안에 있는거고, 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타케루는 이만한 방을 잡은게 어디냐는 히카리의 말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에어컨도 있고, 넓기도 하고, 냉장고도 있고, 게다가 무엇보다 바닷가 바로 앞이고. 


그래, 뭐, 신나게 놀다가 히카리 쨩이 먼저 씻게끔 하면 되겠지, 내가 화장실이나 어디 다른 데 가 있던지 하는 동안. 괜찮을거야.


그래서 괜찮을거라고, 괜찮겠거니 했는데-


바다에서 서로 신나게 놀다가 호텔에 들어온 시간은 그새 저녁. 바닷바람 때문인지, 젖은 수영복 때문인지, 수건을 둘러도 한명이 씻는 동안 화장실에 들어가 있던 복도에 나가 있던 하기에는 너무나도 추워져버린 날씨였다. 그렇다고 해서 씻지 않고 잘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아니, 아니지. 무슨 소리람. 차라리 내가 아픈게 낫지. 침묵을 먼저 깬 건 그런 생각에 다다라 굳게 결심한 타케루였지만, 히카리의 이름을 부르려던 그의 말은 고개를 푹 숙이고 카펫만을 바라보던 히카리가 불쑥 말해버린 한 마디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씻을래?"


아- 그래, 히카리 쨩이 먼저 씻고 싶어한다면 내가 기다려야... 히카리에게 알겠다는 듯 고개를 조용히 끄덕이고 돌아선 타케루는, 침대를 향해 두어 발자국을 내딛은 후에야 히카리의 말이 의문문이었음을, 그리고 그녀가 얘기한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깨달았다.


"잠, 잠깐만, 히카리 쨩-"


수건이 땅에 떨어지는 것도 잊은 채 몸을 돌린 타케루는, 이미 수건을 벗고 욕조에 물을 받기 시작하는 히카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남은 말을 삼켰다. 물론, 히카리와 사귄지는 벌써 1년을 웃돌고 있었고, 그들이 사랑을 나눈 적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그렇지만 모든 것은 어두운 방 안에서, 이불 속에서였지 않는가. 비록 저녁이라고는 하지만 불빛이 눈부시게 빛나는 방 한가운데에 떡하니 놓여져 있는 욕조 안에서 히카리와 모두 벗고 목욕을 같이 한다니...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띵해지는 걸 간신히 참으며 타케루는 다시 입을 열었지만, 조용히 말을 꺼낸 히카리에게 또다시 막히고 말았다. 이 짧은 시간 안에, 벌써 세 번째였다. 


"이렇게 하면 거품도 막 올라오네! 거품 목욕을 늘 해보고 싶었는데-" 


나즈막하지만 뭔가 신나는 듯한 목소리. 그렇지만 타케루는 히카리가 욕조의 가장자리를 비정상적으로 쎄게 쥐고 있음을, 그리고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떨리는 것을 알아차렸다. 다른 사람이라면 그냥 넘어갔을지도 모를 사소한 변화였지만, 타케루는 다른 사람이 아니었다.


말을 먼저 꺼낸 건 히카리였지만, 그녀도 떨리는 게 분명했다.


--


따뜻한 물이 다 차오르고, 넘쳐 흐를것만 같은 거품이 욕조를 뒤덮는데 걸린 시간은 고작 5분이었지만, 두 사람이 걱정 반 기대 반으로 기다리던 시간은 마치 반나절이라도 되는 듯 했다. 


"타케루 군."


아. 나즈막한 히카리의 목소리에 타케루는 이해했다는 듯한 목소리로 몸을 돌렸다. 히카리가 지퍼에 손을 대고 있는걸 봤으니까- 먼저 들어가고 싶은 거겠지. 그러면 나도 일단-


"이것... 좀 도와줄래?"


우뚝. 상의의 지퍼를 내리고 있던 타케루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히카리를 바라보았다. 자신을 돌아본 히카리는 어색한 표정으로 내려가지 않는 지퍼를 가리켰고, 타케루는 그녀를 향해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조심스럽게 힘을 두어번 주자 수월하게 내려가기 시작하는 지퍼. 떨리는 손으로 내리는 지퍼 너머로 히카리의 브라가 보였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보이는 그녀의 얼굴. 자신의 눈을 마주치는 히카리의 반짝이는 눈을 바라보던 타케루는 그녀가 천천히 손을 뻗어 자신의 지퍼를 내려주는 것을 거의 눈치채지 못할 뻔 했다.


거의. 


지퍼를 내려주기 위한 그녀의 몸짓은 히카리의 얼굴을 타케루에게 더 가까이 다가오게 했고, 서로의 숨소리를, 숨결을 느낄 수 있을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타케루는 히카리의, 그리고 히카리는 타케루의 래쉬가드를 조심스럽게 벗겨주었다. 조용한 적막, 하지만 더 이상 어색하지 않은 적막. 조금씩 가빠지는 듯한 숨소리 속에서, 둘은 서로의 눈동자만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적막을 깬건 다름 아닌 수도꼭지에서 떨어진 물방울 소리. 조그마한 소리에도 허겁지겁 놀란 둘은 옷을 마저 벗겠다고 횡설수설해댔고, 재채기를 한 타케루는 그제서야 지금이 추운 저녁임을 깨달았다. 


어서 들어가야지- 라고 생각하며 바지와 속옷을 한꺼번에 내린 타케루는, 히카리가 멍하니 자신의 뒷모습을 보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눈이 마주치고 서로 부끄러운 듯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린 둘. 마치 막 사귀기 시작했던 때로 돌아간 것만 같달까. 


"들, 들어갈께, 히카리 쨩."


부끄러운듯 다시 등을 돌린 히카리에게서 나즈막한 응. 을 들은 타케루는 기다렸다는 듯 바지와 속옷을 옆으로 치우고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거품 아래로 숨겨져 있던 뜨거운 물에 얼굴이 찡그려졌지만, 발부터 천천히- 허벅지를 지나, 배, 가슴, 목까지- 그 뜨거움은 곧 따뜻함이 되어 추위에 떨고 있던 그의 몸 전체로 퍼져나갔다. 


미끄러지듯 기울어지는 몸. 코 바로 밑을 간지럽히는 거품을 느끼며 저도 모르게 깊은 숨을 내쉰 타케루는, 천천히 눈을 뜨다 이내 팬티를 천천히 벗는 히카리의 모습을 보고 막힌 수로가 뚫리듯 날카롭게 숨을 들이마쉬었다.


코와 입을 따라 들어온 뜨거운 물 떄문에 재채기를 하며 기울어진 몸을 벌떡 일으킨 타케루는 히카리를 깜짝 놀라게 하기 충분했고, 후다닥 달려와 기침을 하는 자신에게 손을 뻗으며 괜찮냐고 묻는 히카리를 향해 타케루는 괜찮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자신에게 달려오느라 부끄러움도 순간 잊은 듯한 히카리는, 말문이 막힌듯 자신을 쳐다보는 타케루의 눈빛에서야 자신이 알몸이라는 것을 깨달은 듯 했다. 허겁지겁 타케루에게서 멀어진 히카리는 조심스레 그의 반대쪽으로 몸을 담구기 시작했고, 그녀를 위해 다리를 접은 타케루는 히카리를 가만히 바라만 보았다.


가만히 서로를 들여다보는 눈동자. 따뜻한 물에 몸을 녹이고 있자니, 부끄러움도, 어색함도 같이 녹아내린걸까. 누가 먼저랄 새도 없이 천천히 서로를 향해 다가간 그들은 어느샌가 물 속에서 서로를 깊게 껴안고 있었다.


--


풀어진 듯 편안한 물 속에서, 히카리는 타케루에게 조용히 머리를 기댔다. 다리를 쭉 펴고 있는 타케루의 사이에 앉아, 등을 그의 배와 가슴쪽에 대고 있던 그녀는 반쯤 기울어진 몸을 타케루만으로 의지하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 위에 턱을 조심스레 기대고 있는 타케루의 팔은 그녀의 허리에 휘감겨져 있었고, 목욕을 즐기는 동안 무언가라도 보자는 생각에 틀어놓은 티비는 무언가 시끄러운 예능으로 어두워진 방을 밝히고 있었지만 둘 중 어느 누구도 관심을 주진 않는 듯 했다.


가끔 서로를 바라보며 짧은 키스를 나누는 것 말고는 조용히 서로에게 기대어 노곤해진 몸을 조용히 풀고 있던 둘. 이렇게 피로를 풀고 씻으면 다 되겠지, 라고 타케루는 생각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그의 계획을 완전히 엇나가게 한 장본인은 바로 그였다.


자신을 조심스레 올려다보는 히카리를 보며 미소지은 타케루가 고개를 숙여 서로의 입술을 맞추려는 순간, 아무생각 없이 올라온 그의 손이 향한 곳은 다름아닌- 히카리의 가슴. 움찔- 하는 히카리의 몸짓에 화들짝 놀라 손도, 입술도 떼어버렸지만, 히카리는 그의 뒷통수를 붙잡고 타케루의 입술을 다시 끌어당겼다.


마침내 둘의 입술이, 그리고 얽히고 섥히던 혀가 떨어졌을때, 그녀는 천천히 몸을 돌려 타케루를 마주보았다. 타케루를 욕조 벽으로 더욱 더 밀어붙이며 다시 그의 입술을 탐한 그녀의 손은 가슴에서부터 미끄러져 자신이 기대고 있던 덕에 오므라지지 않은 그의 다리 사이로 향했고, 이미 단단해진 그의 물건을 조심스럽게 쥐었다.


입술을 떼고, 다시 히카리와 타케루는 서로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이미 티비에서 들리는 소리는 저 멀리 있는 듯 희미하게 들릴 뿐이었고,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지만 둘은 이미 서로가 서로를 원함을 알고 있었다.


히카리의 손이 천천히 위아래로 움직이고, 타케루의 손 또한 그녀의 가슴을 지나 엉덩이로, 그리고 그녀의 다리 사이로 훑어내려가는 동안, 그들은 무언의 욕망을 눈빛으로 교환했다.


지금 여기서?

지금 여기서.


묶여있던 사슬이 풀리듯, 서로를 탐하는 듯한 손길이 온몸을 훑었고, 거칠어진 숨은 더 거칠게 타케루 위에서 움직이는 히카리와 그런 그녀를 어루만지는 타케루의 신음소리가 되어 울려퍼졌다. 첨벙, 첨벙하며 흘러넘치는 목욕물처럼, 그들의 사랑도 계속 흘러넘치는 것만 같았다.


어쩌면 당연하게도, 예상보다 오래, 그리고 격렬해진 목욕은 피로를 풀어주기는 커녕 두 연인을 더 피곤하게만 만들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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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octor B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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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그대는


어느 화창한 여름날— 봄이 언제 왔었냐는 듯, 어느샌가 뙤약볕은 뜨거운 열기를 가득 내리쬐고 있었다. 마치 쑥을 연상시키는 녹색의 교복을 입고 하굣길을 걸어가는 두 남녀는 눈부신 태양 빛에 눈을 찡그렸지만, 쉬지 않고 움직이는 그들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날 줄을 몰랐다.


“그래서 결국 씩씩대는 다이스케 군을 풀어주느라 수학 시간을 다 날려버렸다니깐.”


오뚝한 이목구비의 남자아이가 이마를 간지럽히는 금빛머리를 쓸어 넘기며 오늘의 무용담을 늘어놓자, 색소 옅은 부드러운 갈색 머리를 머리핀으로 고정한 여자아이는 키득거리는 웃음으로 화답했다.


타카이시 타케루와 야가미 히카리— 아주 어렸을 때부터 친한 친구 사이인 이 둘은, 일상 같은 지루한 수업을 마치고 여느 때처럼 같이 집으로 걸어가는 길이었다. 비록 2학년이 되면서 반이 갈렸고, 타케루는 농구부에, 히카리는 신문부에 들어가 시간이 많이 엇갈렸지만, 그런데도 그 둘은 서로와 함께 하교하는 게 너무나도 당연했고, 늘 그래왔듯 서로를 기다리곤 했다.


그리고 오늘도 그렇게 별반 다를 것 없는 하루가 저물어 가고 있는 줄 알았다. 가까이 붙어 걸어가며 흔들리는 타케루의 긴 손가락이, 옆에서 같이 흔들리던 히카리의 손가락과 무심한 듯 닿기 전까진.


갑자기 등줄기를 타고 올라오는 찌릿한 느낌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팔을 확 뺐다. 덩달아 깜짝 놀라 그녀를 쳐다보는 타케루의 눈빛에, 히카리는 그제야 자신이 한 행동을 이해하고 얼굴을 붉혔다.


“히카리 쨩, 왜 그래? 괜찮아?”

“아— 아무것도 아니야. 갑자기 정전기가 일어나서.”


타케루는 히카리의 행동이 무언가 이상함을 눈치 챘지만, 곧이어 어깨를 으쓱하고는 가방에서 하얀 스냅백을 꺼냈다. 옆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모자를 쓰려던 타케루는, 히카리가 또 모자를 쓰냐며 핀잔을 줄 것이라는 생각에 다다랐는지, 움직임을 멈췄다.


히카리는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느라 타케루를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고,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던 타케루는 좋은 생각이라도 난 듯, 장난꾸러기 같은 웃음을 지었다.


푹— 하고 히카리의 머리에 갑자기 씌워진 모자. 깜짝 놀라 자신을 올려다보는 히카리를 보며 타케루는 다정하게 미소 지었다.


“예쁘다.”


그 말에 히카리는 말문이 턱 막혀버린 듯, 어쩔 줄 모르다 곧이어 모자를 더 깊게 눌러썼다. 
그 때문에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없어 히카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던 타케루는, 그녀의 앞에 서서 허리를 숙였다. 모자의 챙을 들어 올리며 그녀의 눈을 마주치려 한 타케루는 입을 열었지만—


“히카리 쨩? 혹시—”


—결국 말을 끝내지 못했다. 눈앞에 갑자기 나타난 타케루를 보고 놀라버린 히카리가, 저도 모르게 그의 옆구리를 꼬집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정말, 오늘 미야코 상 만나러 가는 거 알면서, 내 머리 어쩌려구.”

“아야야야야야— 하하, 미안해, 히카리 쨩.”


울음과 웃음이 섞인 듯한 목소리로 사과하며 크게 웃는 타케루를 보며,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모자는 내가 압수할 거야.”

“엣? 그런 게 어디 있어—?”


눈썹을 치켜세우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히카리. 모자를 머리 위에 살짝 걸친 그녀는, 그의 원망스런 눈길을 재밌다는 듯 쳐다보았다. 아무 일 없다는 듯, 여느 때와 다름없는 장난을 치고 있었지만, 내심 히카리는 왜 자신이 그렇게 깜짝 놀랐는지 고민하고 있었다.


오늘 무언가 자신을 예민하게 한 일이라도 있었는지 곱씹어봐도, 생각나는 것이 없는데— 결국 해답을 찾지 못한 채, 히카리는 옆구리를 쓰다듬는 타케루와 함께 계속 걸었다. 그가 혹시라도 고민하는 자신의 기분을 읽을까, 걸쳐 쓰고 있던 모자 밑으로 자신의 눈을 숨기며.




:::




뜨거운 햇살이 창문을 타고 모두를 환하게 비추는 도서관에서, 야가미 히카리는 책을 꺼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꽤 구석진 곳에 있어 누구한테 도움을 요청하기가 모호한 것도 있었지만, 닿을락 말락 하는 자신의 손가락이 책을 툭툭 건드리기만 하는 것에 오기가 생겼기 때문이기도 했었을 터였다.


그때, 어디선가 불쑥 다른 손이 나타나 책을 잡았다. 결국, 자신이 꺼내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고맙다는 말을 하려 고개를 돌린 순간, 그녀는 익숙한 얼굴을 마주했다. 자신을 웃으며 내려다보고 있는 높은 코와 푸른 눈동자—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파도처럼 하얗게 빛나는 머리— 타카이시 타케루.


“부르지 그랬어.”


웃으며 오래전 졸업한 선배가 남긴 신문부 스크랩북에 쌓인 먼지를 털어낸 타케루는, 히카리에게 책을 건넸다.


“아— 그냥, 혼자 꺼내볼까 해서. 고마워.”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마움을 표시한 그녀는, 얼굴에 큰 호선을 그린 타케루를 올려다보았다— 잠깐, 올려다보았다고?


여태까지 왜 자각하지 못했을까? 어느샌가, 히카리는 타케루를 올려다보고 있었음을. 남자아이들이 원래 더 키가 크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왜인지 히카리는 자신이 타케루와 키가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타케루 군, 언제 그렇게 키가 컸어?”

“응? 무슨 소리야, 난 늘 히카리 쨩보다 컸다구?”

“초등학교 때도 기억 못 하나 보네.”

“물론 기억하지. 5학년 때도 내가 더 컸었잖아.”


웃으며 히카리가 말을 꺼내자, 지지 않겠다는 듯 타케루 또한 얼굴에 호선을 그리는 것으로 화답하며 맞받아쳤다. 히카리는 그때를 말하는 게 아니라며 졌다는 듯 웃어 보였고 타케루 또한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를 지었다. 이윽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타케루의 손은 그녀의 머리를 향했고, 곧이어 그녀의 갈색 머리카락이 그의 손바닥을 간지럽혔다.


“타— 타케루 군?”


자신을 쓰다듬는 손에 당황한 듯 말을 더듬는 히카리와, 그런 그녀를 보고 되려 본인이 놀랐다는 듯 손을 멈칫했지만 이내 다시 웃는 타케루. 타케루가 히카리의 머리를 쓰다듬는 일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히카리는 타케루에게서 자신의 오빠인 타이치를 보곤 했었다. 마치 타이치가 그녀를 쓰다듬어줄 때처럼.


그렇지만 지금은 아냐. 자신을 마주 보며 쓰다듬어주는 타케루에게는 그 누구도 겹쳐 보이지 않았다.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환한 미소를 짓는 그의 바다 같은 푸른 눈동자가, 자기주장을 그녀에게 강력하게 펼치고 있었다— 타카이시 타케루라는 존재를. 그리고 그런 그에게 반응하듯, 무언가 찌릿한 감각이 그의 손으로부터 그녀를 감싸 내려갔다.


“그래도 지금은 내가 크니까—”

“타케루 군!”


타케루가 웃으며 말을 이어가려던 그 순간, 책장 뒤에서 검은 머리의 여자아이가 쑥 튀어나왔다. 그녀는 친한 듯 타케루의 팔을 아무렇지도 않게 잡았지만, 타케루는 재빠르게 그 팔을 빼내고는 무슨 용건이냐는 듯 눈썹을 치켜세웠다.


“모모가 빨리 오라고 부르는 걸!”


타케루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쉬이 발길을 돌릴 생각은 하지 않고 있는 듯했다. 이만 가볼게, 라는 한 마디와 함께 책장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도, 그의 눈길은 계속 히카리를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한 듯, 히카리는 그저 조심스레 그가 흩트려 놓은 머리카락을 다듬을 뿐이었다. 아무리 머리를 만져보아도 아까 같은 찌릿함은 느낄 수 없었다— 정전기라도 되었는지, 뭐였는지 알 순 없었지만, 곧 히카리는 그런 생각을 떨쳐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시계를 쳐다보고는 깜짝 놀란 히카리는, 그제야 빠르게 도서관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바로 두 명의 여자아이와 앉아 웃으며 떠들고 있는 타케루였다. 이상할 것은 없었다— 그는 늘 친절한 아이였다. 그 외모와 친절한 성품으로, 모두에게 인기 있는 아이— 그런데도, 그 누구 하나 소홀히 대하지 않는 아이. 하지만, 저 둘과 대화를 나누는 타케루가 오늘따라 왜 이리 행복해 보이는지.


‘무척 친한 아이들인가 보네.’


저도 모르게 씁쓸한 미소가 지어지는 것을 히카리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저, 무의식적으로 머리를 계속 어루만지며,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떴을 뿐.




:::




“쪄 죽겠다니깐, 정말.”


방과 후, 뜨겁게 내리쬐는 햇볕을 피해 학교 뒤쪽 벤치에 걸터앉은 타케루가 자신에게 부채질을 해주는 히카리를 보며 기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운동하다 나오니 더 그렇지, 라며 타케루에게 물을 건넨 히카리는 그가 그 자리에서 한 병을 모두 마셔버리는 것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늘 운동을 하곤 덥다며 집을 박차고 들어와 반쯤 풀어진 교복으로 물을 들이켜던 또 한 사람이 문득 떠오른 히카리는, 희미한 미소로 자신 쪽을 쳐다보던 타케루를 보며 입을 열었다.


“타케루 군, 이렇게 보니 정말 우리 오빠 같네.”


히카리는 순간 타케루의 얼굴에서 미소가 장맛비에 씻겨나가듯 사라지는 걸 본 것 같았지만, 눈을 깜빡였을 때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웃고 있었다.


“내가 타이치 상을 닮았어?”


머리를 긁적이며 자신에게 묻는 타케루의 눈빛에는, 진지함이 언뜻 숨겨져 있는 것 같았다. 그냥, 운동하는 거나 물 마시는 거나 여러모로 오빠가 생각나서— 라는 웅얼거리는 듯한 대답. 돌아온 건 가족 같고? 라고 무심한 듯 덧붙이는 타케루의 한 마디였다.


뭐, 그런 걸려나. 어깨를 으쓱인 히카리의 대답에 만족하지 못했는지, 고개를 꺾고 고민하는 표정을 짓던 타케루는 곧이어 다시 얼굴에 호선을 그렸다. 타케루의 그 표정,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기도—


“왜 그래, 타케루 군?”


타케루가 내심 대답을 해주길 바랐지만, 역시 그는 별 일 아니라는 듯 손사래를 칠 뿐이었다. 곧 그들의 대화는 다른 화제를 향해 달렸지만, 히카리는 그제야 그들이 어렸을 적 타케루가 자신에게 화를 냈던 것을 기억해냈다.


‘언제까지 타이치 상 타령만 할 거야?'


이번에도 비슷한 맥락이었을까? 그렇지만 그녀는 아직도 타케루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처음엔 자신이 타이치에게 너무 의존한다고 생각한 것이겠거니 했지만, 그렇다면 그는 왜 오늘도 굳은 표정을 지은 것인가?


히카리가 다시 시선을 돌렸을 때,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당연하게도 타케루였다. 하지만 당연하지 않아— 마치 도서관에서 있었던 일이 머릿속에서 재생되는 것처럼, 자신을 다시 바라보는 그의 모습에게서 히카리는 타이치가 아닌 타케루만을 보았다. 어쩌면, 이제야 말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그래, 넌 타이치 오빠와는 달라, 타케루 군.




:::




학교가 끝나가는 것을 암시하듯, 붉게 타오르는 태양은 높이 솟은 산 뒤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나무의 그림자 밑에 자리를 잡고, 흔들리는 나뭇잎들 사이로 비추는 햇빛을 바라보고 있던 야가미 히카리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다름 아닌 그녀의 친구 타카이시 타케루였다.


“자, 히카리 쨩.”


입에는 푸른 소다 맛 하드를 물고, 그녀가 좋아하는 편의점 아이스크림을 건넨 그는 곧이어 그녀의 옆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하아, 오늘 진짜 덥네.”


능숙하게 아이스크림을 뜯고, 숟가락으로 크게 푼 한 입을 입에 털어 넣은 히카리는 타케루의 말에 공감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를 찡하고 울리는 차가운 단맛이 혀에서 살살 녹는 그 느낌. 뜨겁다고 아우성치는 몸에 퍼지는 냉기에 히카리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고마워, 타케루 군. 타케루 군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 했네.”

“대신 나중에 나도 사주는 거다?”


하드를 베어 먹으며 자신의 말을 맞받아치는 타케루를 보며, 히카리는 미소를 지었다. 땀 때문인지, 습기 때문인지, 살짝 촉촉하게 젖은 그의 머리는 저번 주의 농구 경기를 연상케 했다.


늘 타케루를 응원하기 위해 농구 경기를 참관하던 히카리였지만, 저번 주만큼은 달랐다. 다름 아닌 다른 학교와의 결승전— 이번에는 친구로써가 아닌, 신문부의 기자로서 방청석에 앉아있던 그녀는, 타케루의 이름을 외칠 새도 없이 경기 장면을 사진으로 남기기에 급급했었다.


치열한 접전. 비록 아주 간발의 차였지만, 경기 종료 직전 타케루와 다른 팀원들의 훌륭한 연계 덕에 오다이바 중학교는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다ㅡ 그리고, 쉴 새 없이 셔터를 누르던 히카리의 입가에도 환한 미소가 번졌다.


늘 그랬듯 다른 친구들과 함께 타케루를 축하해주고, 방송실로 돌아간 그녀는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마주했다— 100장이 넘는 사진 중에 무려 80장 가까이가 타케루의 사진이라니. 공을 드리블하는 사진, 패스하는 사진, 슛하는 사진……. 심지어 마지막 연계마저, 슛을 넣은 팀원이 아닌 공을 패스하는 타케루가 찍혀있었다.


히카리는 그 사진들을 걸러내며 간신히 편집을 해내는 데 성공했지만, 그래도 학교 신문의 1면에 실린 것은 결국 타케루의 사진이었다. 그래도 여전히 그녀에게 남아있는 한 가지 의문. 80장에 다다르는 타케루의 사진들. 결국, 신문 1면에 실린 그의 사진. 왜 그랬던 것일까? 혹시—


찌잉—


그때를 곰곰이 생각하던 히카리는, 생각에 빠져 자신이 얼마나 많은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지를 자각하지 못한 듯했다. 파도처럼 몰려오는 차가운 두통에 그녀는 얼굴을 찡그렸고, 밀려온 파도가 빠져나가듯 그녀의 생각 또한 빠르게 머릿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 이후로, 히카리는 그저 타케루와 소소한 얘기를 나누며 아이스크림만을 먹었다.


컵에 든 아이스크림이 점점 줄어들수록 가장 밑에 보이는 브라우니. 히카리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었다.


마침내 녹아내리는 차가운 아이스크림들이 다 없어지고 마지막 남은 달달한 브라우니를 퍼 올렸을 때, 그녀는 왜인지 다시 농구 경기를— 타케루를— 생각하고 있었다. 왜 생각난 것일까?

가장 깊은 곳에 깔린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려면 그 위에 쌓여있는 다른 것들을 걷어내야 하는 법. 친구로서의 그들의 관계와 그들이 나눈 추억들을 모두 밀어놓고 나면, 히카리는 타케루에게 과연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이 아이스크림처럼, 위에 쌓여있는 것들이 모두 녹아 사라지면, 남는 것은 결국 한 조각 브라우니.


히카리가 가장 좋아하는 브라우니처럼 가장 단순한 감정.

히카리가 가장 좋아하는—?


“그럼 어머니 오시기 전에 그만 가봐야겠다, 히카리 쨩.”


먼저 천천히 일어나는 타케루를 보며, 히카리의 생각은 다시금 결론에 다다르지 못했다. 작별 인사를 하고, 자신에게 손을 흔드는 타케루가 골목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다, 히카리는 들고 있던 아이스크림 컵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직도 컵에는 브라우니가 남아있었다— 그녀가 브라우니를 남긴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평소 같으면 스스럼없이 먹었을 그것을, 퍼 올리다 말고 멈춰버린 채였다.


땅거미가 가라앉는 하늘을 바라보며, 히카리는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다른 모든 것을 걷어내고 보면, 과연 자신에게 타케루는 어떤 존재인지를 고민하며.




:::




따뜻한 토요일 아침, 야가미 히카리는 침대에 멍하니 누워있었다. 약속 시각은 3시였다— 조금은 늦잠을 자도 괜찮을 그런 주말이었지만, 히카리는 왜인지 새벽부터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고 있었다. 알람이 울리기만을 기다리며, 그녀는 그렇게 천장만을 바라보았다.


“히카리, 언제까지 누워만 있을 거야?”


자신의 허벅지를 쿡쿡 찌르며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을 때, 히카리는 자신의 파트너인 테이르몬을 발견했다. 부모님도 약속이 있어 나가시고, 오빠와 아구몬은 축구를 하러 가버린 만큼, 히카리 없인 놀 상대가 기껏해야 실 뭉치밖에 없던 테이르몬이 심심해하는 것도 당연하였을지도.


“빨리 타케루랑 파타몬 만나러 가자—”


테이르몬의 애교 아닌 애교에 미소를 지으며 일어난 히카리는, 테이르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빌려줬던 책도 돌려받고, 밥도 먹고, 시험공부도 같이 할 겸 타케루와 약속을 잡은 것이 엊그제— 늘 같은 일상이지만, 많은 생각 속에 히카리는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샤워를 하며, 이를 닦으며, 옷을 입으며 생각해봐도 쉽사리 결론지어지지 않는 생각. 히카리는 뚱한 표정으로 시리얼이 담긴 그릇을 휘적였다.


“히카리, 무슨 일 있어?”

“아무것도 아냐, 테이르몬.”


테이르몬에게 웃어 보이며 먹은 그릇을 설거지하는 히카리.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긴 했지만, 그녀에게는 확실히 고민이 있었다— 다름 아닌, 타카이시 타케루에 대한.


그는 확실히 그녀의 친구였다. 둘은 남들이 하지 못할 경험을 함께 공유해왔고, 그만큼 많은 시간을 함께했다. 그런 타케루는 과연 히카리에게 있어서 그저 친구인 걸까? 아니면 그 이상인 걸까?


그 이상이란 건 무슨 감정일까? 늘 특별한 사람이 없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히카리는 자신의 오빠인 타이치를 언급하곤 했었다. 물론 그 질문의 특별한 사람이란 그런 의미가 아니겠지, 히카리는 생각했다. 미야코가 좋아하는 사람 있냐고 물어본 건데 타이치 얘기 좀 그만 하라며 핀잔을 준 적도 있었으니 말이다.


타케루를 좋아하냐는 질문도 많이 받았었다. 그래, 히카리는 확실히 타케루를 좋아했다— 어쩌면 단순한 친구 이상으로써. 그렇지만 그가 남자로 보이냐 묻는다면— 글쎄. 둘이 사귀냐며 사람들이 장난기 섞인 말을 할 때마다, 히카리는 손사래를 치곤했었다. 둘은 친구였으니까. 그 이상은 아니라고 다른 사람에게 말하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에게도 얘기해왔었으니까.


철퍽—


“앗!”


생각에 푹 빠져 싱크대에서 물이 흘러넘치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히카리는, 허겁지겁 물을 잠그고 바닥을 닦았다. 걱정되는 듯한 눈빛의 테이르몬에게 괜찮다는 손짓을 하고, 그녀는 타케루를 만날 준비를 했다.


집을 나서며, 히카리는 타케루에 대한 생각을 떨쳐내려 애썼다. 설사 그를 좋아하더라도, 관계를 더 발전시키려다가 잘 풀리지 않아 깨지기라도 한다면? 그녀는 타케루가 없는 일상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위험한 외줄 타기를 하는 것보다, 튼튼한 친구로써의 관계가 훨씬 더 나았다. 최소한, 이 상태로는 그를 잃지 않을 테니까.


“타케루다!”


테이르몬의 말에 고개를 든 히카리는, 저 멀리서 비니를 쓰고 있는 타케루를 발견했다. 쓱 주위를 둘러보자, 아니나 다를까, 타케루 옆의 나무 위에서 주황색의 포동포동한 무언가가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그의 이름을 부르려 하는 순간, 히카리는 건물에 가려 보이지 않던 또 다른 사람을 발견했다. 타케루와 꽤 친한 듯이 보였던 여자아이. 얼핏 기억날 듯 말 듯한 이름— 아, 그래, 모모.


달려가려는 테이르몬의 입을 막고, 히카리는 둘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엿듣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왜인지 그녀는 타케루와 모모의 이야기가 너무나도 궁금했다.


“… 그래서 걔가 오기 전까진 혼자라는 거네?”


충분히 가까이 가자 들리는 모모의 목소리. 히카리는 그녀가 자신을 지칭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응, 뭐. 곧 올 거지만. 그래서 꼭 하고 싶다는 말이 뭐야?”


상냥한 미소로 그녀에게 답하는 타케루. 히카리는 나무 뒤에서 그런 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행복해 보이고, 친절해 보이는 그의 목소리에, 히카리는 저도 모르게 얼굴에 호선을—


“오랫동안 좋아해 왔어, 타카이시— 아니, 타케루 군. 사귀지 않을래?”


그 순간, 히카리의 미소도, 이 세상 다른 모든 것도, 순간 얼음이 된 듯 멈춰버렸다. 많은 것들이 머릿속에서 스쳐 지나가는 그 순간, 얼음을 산산이 부숴버린 것은 타케루의 대답이었다.


“그래, 그러자.”


환하게 웃는 타케루를 보며, 히카리는 온 세상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탸케루에 대한 자신의 감정도, 친구 사이가 더 나을 것이라는 생각도 마치 이젠 모두 소용이 없는 듯 소용돌이 속에서 잊혀졌다.


타케루가 마냥 그녀의 친구에 불과했다면, 이런 기분이 될 리가 없었다. 그렇지만— 히카리가 자신의 감정을 알아차렸다 한들, 이미 기회는 오래전에 놓친 후였다.


“앗— 히카리 쨩!”


히카리가 고민하는 사이에 모모와 행복한 표정으로 무언가 이야기를 하던 타케루는, 곧이어 히카리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지만, 고개를 푹 숙인 히카리는 곧이어 반대쪽으로 열심히 달리기 시작했다.


“히카리 쨩?”


타케루가 외쳤지만, 그의 목소리는 그녀에게 닿지 않았다. 히카리가 뛰는 방향은 그녀의 집도 아니었다. 당황한 테이르몬을 품 안에 꽉 안고, 히카리는 무작정 달렸다. 자신의 죄책감에게서, 후회에게서, 질투에게서—


타케루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




그 후로, 히카리는 타케루를 피해 다녔다. 시험공부도 혼자 하고, 타케루와 마주치지 않기 위해 학교도 다른 길로 돌아갔다. 가끔 마주칠 때면, 타케루는 걱정스러운 말투로 히카리에게 뭐라 말하려 입을 열었지만 히카리는 그저 미안, 타케루 군. 이라는 짧은 말만 남기고 그에게서 멀어져갈 뿐이었다.


그때 도망쳐 버렸던 사건이 있고 난 뒤 타케루와 편히 대화하는 것 자체가 왜인지 불편해진 히카리였지만,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바로 그에게 딱 붙어있는 모모의 존재였다. 늘 팔짱을 끼거나, 타케루에게 기대고 있는 모모를 볼 때마다, 히카리는 씁쓸함만을 느꼈으니까.


솔직히, 아직도 히카리는 자신이 타케루를 좋아하는 것이 맞는지 알지 못했다. 어쩌면 그저 모모가 타케루와 더 많이 시간을 보내는 것에 질투를 느끼는 것일지도 몰랐다. 아이러니하게도, 결국 마음의 정리도, 관계의 발전도 하지 못했음에도 히카리 자신의 걱정대로 그녀는 타케루와 예전 같은 친구 사이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건 그녀 자신의 탓이지, 타케루의 탓은 아니었다. 소꿉친구가 처음으로 애인을 사귀었는데, 축하는 해주지 못할망정 자신의 아니꼬운 감정에 휘말려서 그를 차갑게 대하는 꼴이라니. 이 얼마나 한심한가?


그런 서먹서먹한 관계가 된 지 몇 주가 지났을까. 쨍하게 내리쬐던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저녁, 부 활동을 마치고 집으로 걸어가던 히카리는 얼핏 타케루의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골목 너머에서, 모모가 타케루에게 뭐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타케루는 그런 그녀에게 소리치거나 하진 않았지만, 확실히 딱딱한 얼굴로 맞받아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싸우는 것일까? 무슨 연유로 다투는 것인지 호기심이 동했지만, 히카리는 곧이어 그냥 발길을 돌렸다. 무슨 일인지 내일 타케루 군에게 물어보면 되겠지— 라는 생각이 얼핏 들었지만, 히카리는 타케루와 제대로 된 아침 인사도 한 지 너무나 오래되었다는 차가운 벽에 다시금 부딪혔다.


그와 행복도, 고민도 모두 나누던 것이 너무 당연한 일이었었던 그 시절이 그리웠던 것이었을까. 그저 씁쓸한 미소를 지은 히카리는, 하늘을 붉게 물들이면서 산 뒤로 사라지는 태양을 바라보았다.


사라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따뜻함을 건네주는 태양. 그런 태양에서, 묘하게 히카리는 타케루의 미소를 겹쳐 보았다. 그 눈부신 태양과 늘 엮었던 타이치 대신 보이는 타케루의 빛. 그제야, 히카리는 그가 알게 모르게 은은히 자신을 비춰주고 있었음을, 늘 자신을 밝혀주고 있었음을, 그가 있었기에 이렇게 자신이 빛날 수 있었음을— 자신이 그의 태양 같은 빛을, 타케루를 얼마나 좋아했는지를 보았다.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는데 왜 이렇게 오래 걸린 걸까? 난 우리 사이가 변할까 봐 두려웠나 봐, 히카리는 뉘엿뉘엿한 태양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네가 변할까 봐, 내가 변할까 봐— 아냐. 그래. 난 우리가 변하지 않을까 두려운 거였어.


그 결론에 다다르자, 히카리는 푹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자신의 감정을 감추고 있었던 것에는 그런 두려움이 있었나 보다— 매일매일, 하루하루, 그들이 커가고 바뀌어 가도, 자신들의 관계는 더는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 그랬기에 꽁꽁 싸매고 있었는가 보다. 좋아한다는 것을. 오래전부터 타케루를 이성으로 보고 있었다는 것을.


다시 고개를 든 히카리 앞에는, 태양이 마지막 빛을 내뿜으며 산 너머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 붉은빛이 사라진 하늘에는 적막이 가득한 어둠만이 깔렸고, 그녀는 그런 밤하늘처럼 자신이 이미 늦었음을 알았다.




:::




“자, 마지막으로. 방학이랍시고 끝나자마자 삼삼오오 놀러 가지 말고, 폭우주의보가 내렸으니까 다들 바로 집으로 돌아가도록. 알겠지? 그럼, 좋은 방학 보내라!”


드르륵—


아이들이 모두 빠져나간 텅 빈 교실을 마지막으로 한 번 돌아본 히카리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 마지막 날이니만큼, 늘 그랬듯 이 교실 밖에 타케루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하는 욕심을 품었지만, 그곳에는 텅 빈 복도만이 그녀를 마주할 뿐이었다.


그럼 그렇지, 히카리는 생각했다. 타케루는 모모와 먼저 간 것이 분명했으랴. 그녀가 일방적으로 그를 피한지도 벌써 한 달— 지쳤으면 지쳤지, 이제 와서 타케루가 다시 히카리를 찾아올 리가 만무했다.


교문을 나선 히카리는, 가방에서 조그마한 우산 하나를 꺼냈다.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치고 있었지만, 그녀의 텅 빈 마음만 했을까? 눈조차 제대로 뜰 수 없을 폭우였음에도, 히카리는 씩씩하게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폭풍우에 휩싸인 그녀의 우산은 그 힘을 버틸 수 없다는 듯, 얼마 안 가 뒤집혀 버리고 말았다. 어떻게든 해보려고 용을 썼지만, 부서질 대로 부서져 버린 우산은 회생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젖는 교복을 뒤로하고 집까지 뛰어가기 위해 골목을 도는 그 순간, 그녀는 예상치 못하던 한 사람을 골목 끝에서 보았다.


불투명한 우산 밑으로 보이는 흐릿한 금빛 머리. 걱정된다는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푸른 눈동자. 그녀의 소꿉친구였던 그 사람, 타카이시—


“히카리 쨩?!”


—타케루.


“우산은 어디에다 두고 그러고 있어!”


자신이 젖는 것은 상관하지 않고 히카리에게 달려오는 그 아이. 그녀에 대한 걱정이 묻어나는 그의 낮은 목소리가 골목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런 타케루를 바라보며, 히카리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타케루 군은 바뀐 게 하나도 없구나.


한 달이 넘도록 그를 피해 다녔음에도, 제대로 된 인사조차 하지 않았음에도, 그는 여전히 자기보다 히카리 자신을 더 걱정하고 있었다. 너무나도 타케루 다운 행동— 왜인지 홀가분한 마음에, 히카리는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자신에게 다가와 뭐라고 하는 타케루의 얼굴을 바라보았지만,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비 때문이었을까? 하지만 그녀의 입이 조용히 속삭인 한 마디는, 그 어떤 폭우도 뚫고 타케루의 귀에 꽂혀버렸다.


“좋아해, 타케루 군.”


놀란 듯 커진 타케루의 눈은 많은 감정을 담고 있었다. 역시 변한 게 없는 듯, 히카리는 타케루의 복잡한 감정 변화를 읽어낼 수 있었다. 분명 그중에는 모모도 있겠지.


자신들이 변해도 관계가 변하지 않는다는 게 두려운 거였다면, 자신들이 변하지 않으면 역으로 관계는 변할 수 있는 걸까? 히카리는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떨리는 타케루의 눈동자를 보며 생각했다.


그러나 그러기엔 히카리 자신은 너무나도 변한 것 같았다. 이 철없는 고백으로, 그들의 관계 또한 영원히 바뀌리라는 것을 알았음에도.


미소 다음엔… 슬픔이었다. 뭐라고 말하려, 자신을 붙잡으려 하는 타케루를 뿌리치고 히카리는 그렇게 빗속을 달렸다. 그가 자신이 흘리는 후회의 눈물을 빗방울로 착각하길 바라며— 그녀가 방금 그들의 모든 관계를 한 줌 재로 만들어버린 것을, 빗물이 씻겨내 주길 바라며.




:::




공원의 나뭇가지 밑에서 비를 피한 히카리는, 집에 들어갈 생각은 추호도 하고 있지 않았다. 나뭇잎 사이로 빗방울이 떨어져 내렸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 곳에 있었다.


여태까지 그를 피해 니다가, 만나서 한 말이 고작 한심한 고백이라니, 이 얼마나 최악의 결정인지. 이제 그녀는 다시 그의 얼굴을 볼 수 없겠지, 그저 한때 알았던 사람처럼 데면데면한 채로 학교생활을 보내면서. 그는 그대로 모모와, 그녀는 그녀대로—


차가움이 느껴지지 않는 어깨. 언제부터 비가 그친 것일까?


고개를 들었을 때, 히카리는 비를 막아주는 하늘빛 우산 하나가 자신의 머리 위에서 흔들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곧이어 옆으로 돌아간 시선은, 그녀 옆에 무심한 듯 앉아 우산을 씌워주는 금발의 남자아이를 보았다.


히카리가 비를 맞지 않게 하려고 하느라 자신의 왼쪽 어깨가 다 젖어버린 것을 알기나 하는지, 타케루는 얼굴에 호선을 그리며 히카리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놀란 표정을 짓는 그녀를 바라보며, 그는 입을 열었다.


“감기 걸린다구.”

“타케루 군—”


히카리는 뭐라 말하려 입을 열었지만, 타케루는 다 알겠다는 듯 그녀의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뉘었다. 그런 그녀의 머리 위에 그는 자신의 머리를 조심스레 기댔고, 투둑투둑, 하고 쏟아지는 빗줄기를 들으며, 그들은 그렇게 한참을 있었다.


“미안해.”


적막을 깬 히카리의 사과. 타케루는 천천히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아니야, 미안해할 필요 없어.”

“하지만 한 달 동안이나 타케루 군을—”

“그리고 난 한 달 동안이나 히카리 쨩한테 상처를 줬는걸.”


고개를 돌려서 본 타케루는, 싱긋 웃고 있었다. 오랜만에 이렇게 가까이 보는 타케루의 푸르른 눈동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함을 담고 있는 것 같았다. 혹시라도 그가 자신의 바보 같은 고백을 받아들여 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에게는 모모가 있지 않았던가.


눈빛을 읽을 수 있는 건 그녀 뿐만이 아니었는 듯, 타케루는 깊은 한숨과 함께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모모랑은 헤어졌어— 그런 그의 씁쓸한 말투에 놀란 히카리였지만, 그녀는 그가 얘기를 계속하도록 입을 다물었다.


“나는 히카리 쨩이 나를 싫어하는 줄 알았으니까.”


“닿을 때마다 놀라고, 가끔 안절부절 못 해하고, 나랑 있을 때도 뭔가 다른 생각에 잠긴 것처럼 보일 때가 많다고 느껴서, 혹시 내가 불편한 걸까 라는 생각도 했었어. 그래서 모모의 고백을 받아줬던 거야. 기회가 없었다고 생각했었으니까.”


미안해— 히카리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지만, 타케루는 싱긋 미소 지으며 그녀를 토닥여 주었다. 히카리 쨩이 좋아한다고 해 줬으니까, 라고 말하며 윙크를 날리는 그의 장난스러운 모습에, 히카리는 마침내 그들이 옛날로 돌아갔다는 기분을 느꼈다.


“좋아해, 히카리 쨩. 먼저 말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괜찮아.”


미안하다는 듯 찌푸려진 타케루의 미간을 펴주듯 쓸어주고, 곧이어 그의 뺨을 어루만진 히카리는, 웃으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나도 좋아해, 타케루 군.”


옛날과 같아졌지만 동시에 옛날과 같지 않은. 가까이서 서로를 바라보며 웃는 그들의 감정이 마침내 서로를 향한 것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어두운 먹구름은 사라지고, 밝은 여름 태양이 그들을 비추고 있었다—


그런 따사로운 태양처럼 영원히 빛나라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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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야마 - 눈치게임
2017년 6월 25일


"아- 아- 아프다니까!"


"가만히 좀 있어, 임마, 약을 못 바르겠잖아!"


시퍼렇게 들은 멍부터, 여기저기 찢긴 듯한 상처에,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는 듯 남아있는 흉터들까지- 오늘밤도 야가미 타이치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도대체 어디서 뭘 하길래 이렇게 싸움을 하고 다니는건지. 타이치의 상처에 약을 발라주고 있던 이시다 야마토는, 자신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실실 웃고만 있는 타이치를 향해 차가운 눈빛만을 보냈다.


"뽀뽀라도 해주면 나을 거 같은데."


"헛소리 하지마라, 야가미."


히잉- 하며 얼굴을 찡그리는 타이치를 보며 한숨을 내쉰 야마토는, 약 뚜껑을 닫고 천천히 일어나며 짧게, 하지만 분명하게 타이치에게 입을 맞췄다. 이래야 내 남자친구지! 라고 하는듯한 타이치의 의기양양한 표정을 애써 무시하며 일어난 야마토는, 돌연 허벅지에 찌를듯한 통증을 느끼고는 그만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야마토! 라며 달려온 타이치에게 야마토는 애써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으나, 타이치는 이미 야마토를 반쯤 눕히고 바지를 걷어올리고 있었다. 무언가에 깊게 찔린듯한 상처- 대충 감은 듯한 붕대가 이미 새빨갛게 변해있을만큼 깊은 상처였다. 


이 상처는 도대체 또 어디서 난거야? 라고 묻는 타이치의 낮은 목소리. 그의 추궁하는 듯한 눈빛을 회피한 야마토는 학교에서 의자가 부서지는 바람에 나뭇조각에 찔려버렸다고 웅얼댔다. 그럼 양호실은 왜 안 갔어? 갔었어, 붕대 안 보이냐. 세상 어떤 의사가 붕대를 이렇게 그지같이 감냐? 그건...


"그러는 너는 도대체 그딴 상처를 어디서 얻어 온건데?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화제를 돌린 야마토의 말이 정곡을 찔렀는지, 조금 전까지 야마토를 노려보던 타이치의 눈빛은 갑자기 당황과 초조함으로 가득찼다. 아무리 다른 대학이라고 하지만 말야, 내가 없다고 이상한 애들이랑 어울리는 거 아냐? 그런 거 아냐. 누구랑 주먹다짐하는 게 아니라면 왜 이렇게 다치는데? 아니 그게, 주차장에서 차에 치였는데... 


말도 안되는 변명들. 헛소리도 작작 해야지 이 녀석을 그만 걱정할텐데. 타이치가 분명히 질이 안 좋은 녀석들과 계속 엮이고 있음을 야마토는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매일 저렇게 상처를 얻어올리가 없지. 매번 계단에서 미끄러졌다느니, 차에 치였다느니, 돌에 걸려 넘어졌다느니- 웃기고 자빠졌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야마토 자신도 자신이 타이치에게 변명이랍시고 하는 말들이 타이치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고 있음은 뻔한 일이었다. 하지만 타이치, 그 녀석에게 자신의 본업을 알려줄 수는 없었다. 이 도시를 활보하는 슈퍼 빌런, 가루루맨! 설령 타이치가 그 지명수배범 가루루맨의 남자친구인게 알려지기라도 했다간, 히어로 녀석들이 무슨 짓을 벌일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특히 그 녀석. 이 상처도 다 그 녀석 때문인데...


빌어먹을 워그레이맨.



***



타이치는 더 이상 야마토를 믿을 수 없었다.


타이치 자신도 자신의 바보같은 변명이 누구나 꿰뚫어 볼만한 거짓말임을 뻔히 알고 있었지만,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남자친구에게 자신이 맨날 자는 척 하며 창문을 통해 빠져나가 이 도시를 지키는 정의의 용사 워그레이맨임을 알려줄 순 없지 않는가!


그렇지만 야마토 녀석은 달랐다. 분명히 야마토는 무언가 말할 수 없는 비밀을 숨기고 있는게 분명했다. 그렇기 때문에, 타이치는 오늘 야마토의 대학에 놀러온 척 하며 남자친구를 피해 숨었다. 오늘이야말로 그 녀석이 뭘 하느라 그렇게 상처를 얻어대는지 알아낼 참이었다.


"그래서 내가 거짓말을-"


저기 있다. 이시다 야마토. 자신의 밴드부원들과 뭔가 신나게 떠드는 것을 들은 타이치는, 거짓말이라는 말에 자신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아하, 내 얘기를 하고 있는게 분명했-


"빌런이다!"


쾅! 하는 굉음과 함께 연기에 휩싸인 학교 앞. 눈 뜨기도 힘든 연기와 사람들의 비명 소리를 피해 타이치는 야마토가 조금 전까지 있던 곳에 도달했지만, 보이는 건 그의 밴드부원들 뿐이었다. 야마토가 혹시 잡혀간 건 아닐까? 불안해진 타이치는, 멀리 보이는 공중화장실을 향해 달렸다. 변신해야만 해-


"너는?!"


멈칫. 공중화장실 문 앞에서 마주친 것은 다름 아닌 타이치의 적수, 가루루맨이었다. 펄럭이는 푸른 망토, 어설프게 머리를 구겨넣은 듯, 금색 머리가 삐죽빼죽 튀어나와 있는 마스크. 게다가, 손에 들고 있는 익숙한 기타 케이스까지... 


설마...


"너 이 새끼, 야마토에게 무슨 짓을 한거야!"


자신의 앞에 있는 것이 빌런이라는 것도 잊은 채 타이치는 소리를 바락바락 지르기 시작했다. 당황한 듯, 가루루맨은 기타 케이스를 던지-려다 조심스럽게 옆에 두고는, 학교에 나타났다는 빌런이 자신이 아님을 열심히 어필하기 시작했다.


"나는 데블맨이랑 관련 없어! 그저 너희같은 선량한 시민이 다치게 하지 않기 위해 온 것 뿐이다!"


그런 말을 믿을쏘냐. 가루루맨 자신도 타이치가 그런 말을 믿을 사람이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이렇게 정의감 넘치는 남자친구였기에 말을 할 수 없었던 건데- 그렇지만 야마토가 생각을 끝내기도 전에, 타이치는 그를 밀치고 이미 화장실 안으로 뛰어 들어가고 있었다. 아차-


쾅. 또다시 들려오는 굉음에 잠시 몸을 숙인 야마토는, 자욱한 안개 속에서 닫혀버린 문을 더듬어 열었다. 그 때, 갑자기 변기 문을 박차고 뛰쳐나온 것은...


워그레이맨?


"방금까지 여기 있던 학생에게는 무슨 짓을 했지, 워그레이맨?"


워그레이맨이 뭐라고 말했지만, 야마토는 듣고 있지 않았다. 타이치를 찾아야 했다. 순간 워그레이맨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본 가루루맨은, 당장 변기 쪽을 향했다. 쾅. 쾅. 문을, 벽을 하나하나 부숴봐도 보이지 않는 사람- 대신, 그가 본 것은 조금 전 워그레이맨이 나온 곳에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는 교복이었다.


"하, 하하! 그 학생이라면 내가 이미 너에게서 멀리 피신시켜 놓았지!"


"그렇다면 왜 여기 그 녀석의 옷가지가 버려져 있는거지?"


"옷- 옷이 젖었다고 하길래 벗는 걸 도와줬- 아니, 이게 아닌데, 그, 아니,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냐, 빌런! 오늘이야말로 끝장을 내자!"


무작정 달려오는 워그레이맨의 공격을 막을 새도 없이, 야마토는 그의 발길질을 허벅지로 간신히 막는 데에 그쳤다. 하지만 바로 어제 타이치가 붕대를 감아줬던 그 허벅지의 상처- 그 상처가 다시 터진 듯, 가루루맨의 파란 바지가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걸 워그레이맨이 알아채지 못할리가 없었다. 자신이 아직 타이치로써 가루루맨을 마주보았을 때 그의 눈동자에서 봤던 당황스러움- 어쩌면 가루루맨은 정말 학생들을 도와주러 온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다면 야마토는? 야마토... 그러고 보니, 야마토도 오른쪽 허벅지에 상처가 있었는데...


가루루맨에게도 야마토와 정확히 같은 곳에 상처라니. 

이것은 필히...


"약점이다!!!"



***



타이치의 방. 타이치와 야마토는 가만히 앉아 서로를 노려만 보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걷어 차여진 듯 더 깊어진 야마토의 허벅지 상처와 분명히 무언가 날카로운 것에 찢기기 직전이었던 듯 긁혀있는 타이치의 눈가. 양쪽 다 서로의 상처에 대해 한창 말싸움을 끝낸 참이었다.


히어로가 되는 게 꿈이어서 빌런과 일 대 일로 맞붙었다는 야마토나, 지각을 해서 철조망을 넘다가 360도 굴러 얼굴을 찔렸다는 타이치나. 헛소리 경연대회도 아니고, 무슨.


"그... 래서, 히어로가 꿈이라고? 그런 말은 한번도 안해줬잖아."


침묵을 먼저 깬 타이치의 말에 야마토는 순간 몸을 움찔했다. 마른 침을 삼키며 입술을 핥는 야마토의 얼굴을 바라보던 타이치는, 그가 뭐가 숨기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바른 대로 말해. 라는 타이치의 나즈막한 목소리에 야마토는 다시금 몸을 움찔하고야 말았다.


이럴 때만 눈치가 좋아요, 빌어먹을.


"실은 내가 위험했을 때 날 구해준 게 빌런이었거든. 가루루맨. 그렇게 나쁜 녀석은 아닌가 봐. 솔직히, 그 흘러내리듯 매끄러운 금발에 탄탄한 몸매도 그렇고, 마스크를 끼고 있지만 꽤 잘생기지 않았어?"


이왕 거짓말을 할 거면 끝까지, 하지만 조금의 진실을 섞어서. 늘 속내를 알 수 없이 웃기만 하는 동생 타케루가 알려준 방법이었다. 물론 자기 자신을 저렇게 칭찬하는 건 좀 부끄러웠지만...


"뭐? 야, 다른 빌런도 아니고, 그 후줄근한 코스튬에 덜떨어지게 생긴 눈매에 바보같이 웃어대는 그 가루루맨?"


...이게 정말- 아니, 아니다. 이 녀석은 지금 그냥 질투하고 있는거야. 진정하고-


"빌런은 아니지만 잘생긴 걸 논하려면 역시 잇몸 미소로 모두를 빠지게 만드는 워그레이맨 아니겠냐."


-와 씨 아주 지랄을 하네 진짜!


"야, 어떻게 보는 눈이 없어도 그렇게 없냐? 그 잘난체하는 태도에 몸서리치게 만드는 피부에..."

"언제는 나같은 구릿빛 피부가 너무 좋다며?! 그리고, 그렇게 치면 가루루맨 놈은 너무 허얘서..."

"그놈 피부는 너랑 다르게 다 말라 비틀어졌다고! 애초에, 가루루맨의 쿨함에 비해서는 말야..."

"찌질함이겠지! 그놈이 그 개같은 하모니카로 야밤에 모두의 귓청만 테러해대는데도 걔가 좋아?!"


"아 됐어 그만해!"


씨익- 씨익. 왠지 진 기분. 타이치도, 야마토도 서로 자신의 남자친구가 자기 자신에 대해 저렇게 말하는 걸 듣고 있자니 열불이 올라 미칠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알려줄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내가 바로 그 가루루맨워그레이맨이라고! 눈치 좀 채라, 이 멍청한 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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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야마 - 달

연성/단편 2017. 5. 12. 12:17

겹사돈 - 놀이공원
2017년 2월 20일


아- 더워, 임마. 늦은 하굣길. 이미 건물들 뒤로 해가 얼굴을 숨기고 달이 어둠과 함께 기웃기웃 하늘을 수놓기 시작하는 저녁, 자신의 어깨에 올려진 타이치의 팔을 쳐낸 야마토가 짜증 섞인 말투로 말했다.


"부끄러워하긴-"


어이가 없다는 듯 자신을 노려보는 야마토의 눈길을 외면한 타이치는, 푸핫, 하고 웃음을 터트리며 뒷머리를 긁었다. 아아, 그래, 벌써 여름이었다. 특히나 자신은 축구를, 야마토는 밴드 연습을 마치고 집에 가는 길이었으니- 그 후끈함은 끈적이는 더위와 맞물려 서로에게서 극심한 열기를 뿜어내고 있을게 분명했다.


장난으로라도 이 녀석에게 손을 댈 수 없는 계절이 다시 돌아왔네. 타이치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지만, 야마토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 달이다."


우뚝 걸음을 멈춘 야마토는, 환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중얼거렸다. 저렇게 웃는 녀석을 본 것도 또 오랫만인 것 같았다. 달이 그렇게 좋냐? 넌지시 던진 질문에 야마토는 미소를 잃지 않은 채로 고개를 내려 타이치를 바라보았다.


"달이 뜨면 밤이 오고, 밤이 오면 찬 공기가 몰려들잖아. 지금 같은 더위에는 딱 아니야?"


아이고, 꼭 멋진 척이란 멋진 척은 다 해요, 열대야도 모르시나- 킬킬 웃으며 타이치가 지적하자, 눈을 굴린 야마토는 네가 뭘 알겠냐, 라고 맞받아치며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자신을 따라오는 타이치의 발걸음 소리를 듣던 야마토는 무언가 생각난 듯, 고개를 돌리진 않은 채로 손가락을 들어 한 마디를 덧붙였다.


"늑대들은 달을 좋아하잖아."


늑대라. 늑대는 달을 좋아한다- 그러고 보니 저 녀석은 자신을 늑대라고 표현하길 좋아했다. 오죽하면 중학교 때의 밴드 이름 또한 틴에이지 울브스였을까. 자신의 목울대를 조용히 만지작거리던 타이치는, 마치 한 때 자신의 목에 걸려있던 자신의 문장을 느낄 수 있을것만 같았다.


나는 태양인데. 


그 때 갑자기 울려퍼진 전화벨 소리. 전화를 받은 야마토는 얼굴에 만연한 미소를 띄고는, 타이치가 뭐라고 할 새도 없이 묵언의 인사를 보내곤 골목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뒤돌아보지 않는 그 녀석의 빛나는 금발을 바라보며, 타이치는 야마토를 비추는 달으로 시선을 돌렸다.


내가 바뀐다면.

내가 달이 된다면, 그 땐 나를 바라보면서도 그렇게 웃어줄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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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0월 12일


그들은 연인이다. 채 세 달도 되지 않은 풋풋한 관계. 타카이시 타케루와 야가미 히카리- 모두가 그들이 잘 어울리는 한 쌍이 될 것이라고, 실은 이미 사귀고 있는 관계임이 아니냐고 묻곤 했었지만, 정작 그들이 진짜 사귀게 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었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역시 그들의 손윗 형제들 때문이었으리라- 타케루가 히카리랑 사귄다는 것을 알게 된 타이치와 야마토의 표정은 상상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그러니 우리가 유리한 고지를 취하기 전까지는 비밀로 해두자, 그것이 그들이 이 놀이동산에 온 이유였다.


티켓을 구입하는 히카리와 타케루를 보며 어색하게 서 있는 타이치와 야마토. 타케루와 히카리는 그들이 서로의 손을 잡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있을거라 생각하며 서로 키득거렸다. 그래, 타이치와 야마토는 아주 어렸을 적부터 서로를 좋아했음이 틀림없었다. 늘 투닥거렸지만 그 이면에는 서로를 향한 감정이 없을리가 없었겠지- 그래서 늘 동생들은 타이치와 야마토를 놀리곤 했었다.


그렇지만 요즘 들어 부쩍 잦아진 그들의 이상행동. 이것이 타케루와 히카리가 노리는 유리한 고지였다. 모든 연인들이 한번쯤은 가보고 싶어한다는 놀이공원- 그랬기에 같이 가자는 제안을 타이치와 야마토도 수락한 것일테고, 동생들은 여기서 그 둘이 사귄다는 확실한 못할 증거를 찾을 셈이었다.


"그래서 뭐 할까?"


동생들을 따라오긴 했지만, 막상 어떻게 해야할 지 감을 못 잡곘는 듯 어색하게 서 있는 타이치와 야마토를 바라보던 히카리가 키득거리며 입을 열었다.


"저건 어때?"


전국구 급으로 흉악하기로 악명 높은, 최고 높이를 자랑하는 롤러코스터- 타이치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자 마자 얼굴이 팍 구겨지는 야마토를 보건대, 동생들은 왜 타이치가 저것을 선택했는 지 알 것 같았달까. 그렇게, 롤러코스터를 타는 내내 얼굴 거죽이 뜯겨나갈만큼 야마토한테 잡아당겨져 얼얼해진 뺨에 갓 사온 슬러시를 대고 있는 타이치를 필두로, 그들의 놀이공원 체험기는 막을 올렸다.


사격장에서 고작 열쇠고리 하나밖에 히카리에게 쥐어주지 못한 타케루를 보며 코웃음치고는 놀라운 사격 솜씨로 거대 곰인형을 따내 타이치에게 던져준 야마토. 타케루가 사온 구슬 아이스크림이 고작 두 개 뿐이라 한 컵을 가지고 네가 더 많이 먹었니 내가 더 적게 먹었니 투닥이는 둘. 광대가 히카리에게 건네준 고양이귀 머리띠를 그들이 기념사진을 찍으려 할 때 맞춰 야마토에게 씌여주기까지 한 타이치까지-


평생 추억으로 남아도 손색 없을 일들이 있었지만, 정작 아직도 히카리와 타케루는 저 둘이 사귄다는 명백한 증거를 찾지 못했다. 벌써 날은 저물어 가고 있었고, 결국 승부를 볼 곳은 단 하나- 귀신의 집 뿐이었다. 


"이야, 이거 꽤 으시시한데."


두 명이 짝이 되어, 각 팀마다 촛불 하나씩을 들고 각종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길을 지나가는 것이 목표. 먼저 출발한 타케루와 히카리는 뒤에서 따라오는 타이치와 야마토를 힐끔힐끔 바라보았지만, 하나도 안 무섭다는 듯 주머니에 손을 넣고 휘파람을 부는 저 둘은 허세만 가득할 뿐 사귄다는 티는 죽어도 내지 않을 듯 했다.


그 순간 갑자기 튀어나온 귀신 때문에 깜짝 놀란 히카리- 발을 헛디뎌 넘어질 뻔 했지만, 다행히도 타케루의 순발력 덕에 그녀를 잡을 수 있었다. 타케루 군 빠르네, 라고 웃는 히카리에게 누구 남자친구인데- 라고 말하던 타케루는 아차 싶어 황급히 입을 막았지만, 뒤돌아보며 뭐라고 하기도 전에 그가 들은 것은 달려오는 타이치의 목소리였다.


"으아아아아아-!!!!!"


마치 귀신 중의 귀신을 본 듯 뛰쳐오는 타이치를 보며 놀랐는지 야마토도 저도 모르게 뛰기 시작했고, 재빠르게 자신들을 지나 저 멀리로 사라지는 타이치와 야마토를 동생들은 간신히 따라잡으려 헉헉대며 뛸 뿐이었다.


"헉- 헉- 아니- 애인이 뛰어오는데 도망가는 놈이 어딨냐!!"


"헉- 이 네- 헉- 놈이- 눈에 불을 켜고 뛰어오는데 나보고 어쩌라고!!"


이거다! 차오르는 숨을 고르는 와중에도 티격태격대는 타이치와 야마토의 말을 주워담던 히카리가 생각했다. 한숨을 한번 깊게 내쉬고, 다 알았다는 듯 히카리가 자신만만하게 입을 열었지만, 야마토도 할 말이 있는 듯 마른 침을 삼키며 동생들을 돌아보았다.


"오빠들 사귀죠!"

"너네 사귀지!"


엣- 서로 놀란 듯 멍하니 서로를 쳐다보는 네 명 사이에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


그들은 연인이다. 사귀게 된지 이제야 반년을 바라보는 아직 파릇한 관계. 야가미 타이치와 이시다 야마토- 어릴 때부터 투닥이던 그들이, 방과 후 어느 날 타이치가 아무렇지도 않게 던진 널 좋아해. 라는 한 마디로 연인이 되었을 줄 누가 알았을까? 아니, 애초에 그들의 관계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이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자신들을 늘 놀리던 동생들 때문- 저 두 녀석이 서로를 좋아하고 있는게 분명할텐데, 저 녀석들을 역으로 놀릴 거리가 있어야 우리가 사귄다는 것도 얘기할 수 있지, 그것이 그들이 동생들을 따라 이 놀이동산에 온 이유였다. 


티켓을 구입하는 동생들 뒤에 서 있는 타이치와 야마토는 작은 목소리로 여기서라면 저 둘이 사귀고 있던지, 아니면 하다못해 서로를 향한 감정이 있음을 밝혀내고야 말겠다고 동의했다. 얼핏 보면 늘 그랬던 것 같지만, 타케루와 히카리가 요즘 따라 더욱 더 서로와 붙어있는 시간이 늘어난 것을 알아차린 것은 비단 타이치와 야마토 뿐만이 아니었다- 심지어 부모님들마저 알아차릴 정도였으니까.


아무리 잘 속이려고 해 봤자 형과 오빠 눈을 속일 순 없단다, 라는 듯 흐뭇하게 미소를 지은 야마토와 타이치는 동생들에게 티켓을 건네받아 놀이공원으로 향했다. 


놀이공원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재밌었다- 애초에 연인과 함께 놀이공원에 오는 것은 모두의 로망.비록 서로와 손을 잡는다거나 하는 행동은 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시간을 같이 보낸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만족하고 있었다. 물론, 동생들을 감시하는 일을 게을리 할 리는 없지만 말이지.


페이스 페인팅을 한번 받아보자며 히카리를 꼬셔서 그녀의 코를 중심으로 얼굴 전체에 그려진 반짝이는 나비를 보며 웃던 타케루. 롤러코스터가 천천히 정상을 향해 올라가자 손을 부여잡는 둘 (야마토는 그것을 지적했지만, 타이치는 쟤네는 어렸을 때부터 그랬지 않았냐며 고개를 저었었다), 이상한 장식이 주렁주렁 달린 파티 모자를 집어들고는 타케루 군한테 가장 장 어울리는 모자를 찾았다며 씌워주곤, 이건 나한테도 조금 너무한 거 아냐? 라는 타케루의 뺨을 쿡쿡 찌르는 히카리-


그 외에도 많았겠지만, 자신들도 신나게 즐기느라 놓친 것들이 많았을 터. 하는 행동은 이미 연인 관계인 것 같은데, 그래도 저 둘이 사귄다는 확실한 증거를 찾지 못한 타이치와 야마토는 마지막 승부처로 귀신의 집을 택했다.


"우린 뒤따라 갈테니까, 먼저 가."


일렁이는 촛불 속에서, 팔짱을 끼고 멀어져가는 타케루와 히카리의 얼굴만이 흐릿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촛불을 들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걸어가는 야마토를 선두로, 그 둘도 걸음을 재촉했지만 그렇게 무섭지도 않은 데다가 거리까지 떨어져 있으니, 여기서 어떻게 승부를 보나.


그런 생각에 다다른 타이치는 곧 갑자기 튀어나와 야마토를 깜짝 놀래켜 줄 준비를 하며, 은근슬쩍 야마토와 거리를 벌렸다. 어둠 속에서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던 타이치- 하지만 그 순간, 타이치는 모두가 지나갔을 거라 생각하곤 건너편으로 넘어가려던, 화장도 코스튬도 반쯤 벗겨진 귀신과 마주했다. 


기괴하게 삐걱이는 소리와 가짜 같은 비명 소리만이 울려퍼지던 그 귀신의 집에서 이게 웬 봉변인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며 전력으로 뛰쳐나간 타이치는 저 멀리에서 야마토를 보고 안심했지만, 자신을 보고 놀라 도망가는 야마토 덕에 타이치는 덩달아 귀신의 집 밖까지 뛰어나가고야 말았다.


"헉- 헉- 아니- 애인이 뛰어오는데 도망가는 놈이 어딨냐!!"


아차. 자신을 보며 도망가는 야마토가 너무 어이 없어 무심코 내뱉은 말이지만, 이미 내뱉은 말은 주워담을 수 없는 법. 슬쩍 돌아본 히카리가 미소를 짓고 있자 타이치는 이제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그 때 야마토가 히카리와 동시에 외친 말은 모두를 정적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리게 하는 데 충분했다.


"오빠들 사귀죠!"

"너네 사귀지!"


**


놀이공원 내의 한 식당 안. 가만히 앉아 서로의 눈을 피하는 네 명 사이에는 쎄한 침묵이 내려앉아 있었다. 거대한 곰돌이의 목을 팔로 잡고 있는 타이치, 아직도 아까 타이치가 반 억지로 씌워놓은 고양이귀 머리띠가 반쯤 흘러내린 것도 모르는 듯 마른 침을 삼키는 야마토. 히카리가 사 준 파티 모자를 푹 눌러쓰고 시선을 피하는 타케루, 반쯤 지워진 페이스 페인팅이 무색하게 정적을 지키고 있는 히카리.


"그래서... 언제부터 알았어요?"


오랜 침묵 끝에 마침내 타케루가 입을 열었다.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는 서로가 잘 알고 있었으랴- 미간을 주무르던 야마토는 고개를 흔들며 타케루의 질문에 답을 해 주었다.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러냐? 너희가 스파이 같은 거 안하는 게 다행이야, 진짜. 어쩜 그렇게 티가 나냐고! 전 세계에서 모르는 사람 단 한 명도 없었을 거다 진짜!"


야마토의 말 이후 다시 감도는 정적. 다음은 그들의 차례였고, 너흰 언제부터 알았는데? 라는 타이치의 물음에는 히카리가 대신 답을 해 주었다.


"미미 상 주도로 저희 모두 내기에 돈을 걸었는걸요, 오빠들이 사귀고 있다는 걸 언제 밝힐까 하고. 다이스케 군 마저 둘은 중학교 때부터 그런 낌새가 보였다고 그러던데."


아, 그랬구나. 헛웃음이 나오리만치 어색한 단말마. 참 웃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모두가 자신들의 관계를 알고 있는 데 자신들은 잘 숨기고 있었던 것 마냥 상대의 관계나 파헤치려고 하고 있었으니- 


"정말, 예전부터 너희는 어쩜 사귀나 마나 하는 짓이 똑같냐."


"그건 형들도 마찬가지에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터져버린 웃음은, 도통 가라앉을 줄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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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소라 - 꽃말
2016년 4월 6일


따릉-

"어서오세요- 어머, 야마토?"

"안녕하세요, 아주머니."

등에 메고 있던 기타 때문에 땀이 났는지, 하늘색으로 빛나는 교복 자켓의 단추를 푼 금발 머리의 남자가 시원한 에어컨이 돌아가는 꽃집에 들어오며 인사를 건넸다. 이곳에 많이 와본 듯, 아무렇지도 않게 진열장의 미로를 피해 카운터로 다가간 그는, 자신을 쳐다보는 중년의 여자에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오늘은 학원에서 안 가르치시나봐요?"

"요즘 꽃집이 얼마나 바쁜지 너도 잘 알잖니. 그이가 바쁠 땐 내가 대신 해야지. 그나저나, 이걸 어쩌지? 오늘 소라는 친구랑 쇼핑 간다고 가버려서 여기 없는데."

"아, 네, 알고 있어요. 그게-"

무언가 우물쭈물한 듯한 표정을 지은 야마토는, 멋쩍은 듯 괜히 타케노우치 여사의 시선을 피했다. 


"그, 내일이 저희 1000일째 되는 날이라서요. 무언가 의미 있는 걸 선물하고 싶은데-"


"어머, 벌써 그렇게 됐니?"


그제서야 야마토의 진의를 알아차린 그녀는, 작게 웃으며 진열장을 향해 다가갔다. 소라가 중학생일 적, 떨리는 목소리로 남자친구인 이시다 야마토를 소개해준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천일이라니!


"그래서, 꽃을 선물해주고 싶다 이거지?"


"네- 네."


"흐음- 좋아. 그럼 내가 직접 예쁜 걸로 골라줄게."


이런저런 꽃들을 둘러보며 그들에게 어울릴만한 꽃을 찾던 그녀는, 어색하게 서있는 야마토를 흘긋 쳐다보고는, 다시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래서, 어떤 점이 좋았니?"


"예?"


"소라의 뭘 보고 반했느냐는 거야. 너희가 그- 디지털 세계에 가면서 처음 만난거니까, 초등학생 때였나? 첫인상은 무척이나 달랐을거 아니니?"


"아아, 음, 글쎄요."


뺨을 긁적인 야마토는, 신중히 단어를 고르고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 


기타를 내려놓고, 의자에 앉아 고민을 하기를 몇 분. 

마침내 입을 연 그는, 천천히 소라에 대한 생각을 말로 적어내려갔다.


"처음 만났을 때는- 그러니까, 첫인상은- 꽤 당돌한 여자애 정도에 불과했어요. 고작 초등학생들밖에 없었던 저희 그룹의 리더같은 존재였어요. 아, 물론 리더는 타이치였죠. 그건 아직까지도 유효하구요."


턱을 쓰다듬던 야마토는, 말을 멈췄다. 아주머니가 계속 듣고 계신걸까? 라 생각하며 시선을 돌렸을 때, 그녀가 진열장에서 꽃 몇 송이를 꺼내며 계속하라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야마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소라는 타이치랑 다른, 뭐랄까, 어머니 같은 존재였어요."


"우리 모두를 돌봐주었고, 감싸주었죠. 의지할 수 있는 존재랄까요. 제가- 말하자면 길지만, 나쁜 길로 빠졌을 때도, 저를 도와준 건 소라였어요."


"저희의 모험이 끝나고 나서는, 8명 모두가 떼놓을 수 없는 친구가 되어있었지만, 그 뿐이었죠. 하지만- 그- 음..."


꽃다발을 묶고 있는 그녀는 야마토를 올려다보았지만, 그는 골똘히 생각에 잠긴 듯, 그녀의 눈빛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 듯 했다.


"모르겠어요. 모든 게 끝나고 났을 때, 소라는 제가 처음 알던 그 아이가 아니었죠. 자상하고, 다정다감하며, 모두를 밝게 만들어주는 사람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잘 모르겠어요, 언제부터 소라가 좋아졌는지."


"어렸을 때는- 제게 한가지 색만 있는 줄 알았어요. 모두를 차갑게 대했죠. 제가 파란색이라면, 그 파란색 하나 뿐이라고, 그렇기에 나는 바뀌지 않고, 누구도 날 침범할 수 없다고 생각했었어요."


"하지만 모험을 하면서 파란색도 같은 파란색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어요. 때로는 남청색도, 때로는 하늘색도 될 수 있다는 것을요."


"그리고 그걸 제게 알려준 게 소라가 아닐까, 생각해요. 소라의 붉은색이, 제 마음의 벽을 깨고 다가와서- 다른 색으로 저를 칠해줬으니까요."


"그래서- 그... 그래서 좋..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네..."


무슨 인터뷰라도 하듯, 딱딱하게 말을 끝낸 야마토는 귓볼까지 온 얼굴이 새빨개져 있었다. 그런 그를 보며 웃음을 터트린 그녀는, 그에게 보라색 꽃이 잔뜩 들어있는 꽃다발을 건넸다.


"잘 들었다. 역시 노래를 하는 애는 표현력도 남다르구나? 네가 우리 소라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 잘 알려준 것 같네."


"감-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건-"


"보라색 튤립이야. 꽃말은, 영원한 사랑."


"영원한 사랑..."


"그래, 푸른색과 붉은색이 만나면, 보라색이 되니까." 

"우정도, 사랑도 잃지 않는 그 예쁜 관계, 잃지 마렴. 1000일 축하한다!"


자신을 보며 미소짓는 그녀의 말에 화답하듯, 야마토 또한 얼굴에 큰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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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켄 - 새벽

연성/단편 2016. 2. 21. 16:44

다이켄 - 새벽
2016년 2월 20일


허억-

오늘도 같은 꿈. 놀라서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이치죠우지 켄은,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식은땀을 닦아냈다. 옆에서 곤히 자고 있는 웜몬을 한번 쓰다듬고 침대에서 내려오자, 아침해가 천천히 떠오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가 디지몬 카이저로써 악행을 저지른지 벌써 수 년. 고등학생이 되었지만, 그는 아직도 그 때에 대한 악몽을 꾼다. 울려퍼지는 디지몬들의 외침, 자신을 경멸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다른 아이들, 그리고 자신에게 등을 돌리고 있는 오사무 형. 아무리 잡으려 해도 닿지 못하는 그를 뒤쫓다 다리에 힘이 풀리면, 눈이 없는 친구들이 기괴한 입으로 자신을 비웃는 그런 꿈을, 그는 한 때 매일 꿨었다-

모토미야 다이스케가 자신의 집에 켄을 초대했던 그 날이 오기 전까진.

처음에는 초대에 망설였던 켄이었지만, 곧 다이스케에 이끌려 그의 집에 간 것은 그에게 있어서 좋은 선택이었다. 친절한 다이스케의 가족들, 맛있는 음식, 그리고 재밌게 나눈 많은 대화들. 그는 친구와의 행복을 만끽했다.

하지만, 어김없이 밤은 찾아왔다.


똑같은 악몽에 또다시 몸을 휘적이고 소리를 낸 탓일까. 눈을 떴을 때는 다이스케가 걱정되는 눈빛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괜찮냐는 질문에 아무 일 없다며 내젓는 손짓. 부모님에게 많이 썼던 수법이었지만, 다이스케는 그를 믿지 않는 듯 했다. 결국 다이스케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자, 그는 아무 말 없이 켄을 데리고 방의 창문을 열었다.


폐를 찌르는 듯이 몰려들어오는 새벽의 찬 공기. 몸이 오싹해질 정도였지만, 다이스케는 켄을 웃으며 바라볼 뿐이었다. 


"그거 알아, 켄? 나는, 새벽이 좋아."


고개를 갸우뚱하는 켄에게 다가간 다이스케는, 켄 옆에 벌러덩 드러누워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잠이 안올때면, 나는 새벽 공기를 마시곤 하거든. 모두가 숨죽이고 잠든 이 시간에, 나만의 맑은 공기를 만끽하며." 


"너무 너 자신을 가두려고만 하지 마, 켄. 넌 잘못하지 않았어. 설사 잘못했다 하더라도, 그 죗값을 이미 오래전에 치뤘는걸."


"그러니까, 너 자신을 드러내도 괜찮아. 봐, 새벽은 어둡고 무서울 것 같지만, 정작 나를 저 어두운 밤에서 격리시켜주는 창문을 열면, 맑고 깨끗한 공기가 들어오잖아?"


자신을, 그리고 그제서야 떠오르기 시작하는 해 덕에 천천히 밝아지는 하늘을 번갈아 바라보는 켄을 보며 웃음을 터트린 다이스케가 덧붙였다.


"뭐, 아무리 새벽이 어두워도 해는 뜨는 법이니까- 안 그래?"


그 이후로, 켄은 악몽을 꿀 때마다 조심스레 일어나 창문을 열곤 했다. 봄이건, 여름이건, 가을이건, 겨울이건,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며 다이스케의 말을 되뇌이고 나면, 신기하게도 잠이 솔솔 오곤 했다.


하지만 오늘, 오늘만큼은, 켄은 해가 뜨는 것을 지켜보기로 했다.


어두컴컴하던 하늘은 지평선 너머로 고개를 내민 햇님에게 자리를 비켜주었다. 다이스케가 처음으로 그에게 손을 내밀었던 용기와 같은 주황색이 해 주위에서 춤을 추고 있었고, 다이스케가 자신을 가장 먼저 인정해줬던 그 우정을 상징하는 듯한 푸른색이 새까맣던 하늘을 물들이고 있었다.


그래, 다이스케 군. 오늘도 내 자신에게 좀먹히지 않을게. 가두려고 하지 않을게. 나는 이제 어깨를 피고, 허리를 펴고 이 세상을 두 팔 벌려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는걸.


아무리 혹독한 겨울이라도 봄은 오니까.

아무리 어둡고 무서운 새벽이라도, 해는 뜨니까.


나에게 한파 속에서도 피어오른 꽃봉우리처럼, 

어두운 새벽을 천천히 밝혀오는 빛처럼 눈부신 모두가 있는 이상-


나는 절대 혼자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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